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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81화 (181/363)

181화 가족의 신뢰

“법적 문제는 전부 해결되었습니다. 검찰에서도 법원에서도 더는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성규가 한채아와 만나고 한 달이 지날 무렵, 변호사가 모든 혐의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비공개로 열린 공판에서 성규가 성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내밀었을 때는 난리가 났었다.

특히 검찰 측의 반응이 가관이었다. 협박에 의한 진술이라는 둥, 성폭행은 비친고죄이니 피해자가 증언을 철회해도 재판은 지속해야 한다느니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대단한 증거라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판부 또한 이대로 재판을 지속해 보아야 누구에게도 실익이 없다며 빠르게 면죄부를 주어 버렸다.

“완전히 복권되셨으니, 이제 편히 행동하셔도 됩니다. 아! 여권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시려고요?”

“우선은 폴란드나 다녀올까 합니다.”

“아! 사장님께서 아직 동유럽에 머물고 있으시다고 하셨죠? 거기가 폴란드였던가요?”

“어디 계신지는 저도 확실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워낙에 종적이 묘한 분이라서요. 우선은 폴란드에 가서 흔적이라도 찾아볼까 합니다.”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앞으로도 큰 도움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국 최고의 로펌이라는 KCK의 파트너 변호사는 이번 사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맡길 일은 아주 많다.

성규는 복권이 되자마자 한국을 떠났다. 변호사에게 말한 것처럼 폴란드는 아니다.

거기서 남쪽으로 한참 떨어진 에게해에는 그의 조부가 몇 단계의 차명 과정을 거쳐 소유하고 있는 섬이 하나 있었고, 현지 경찰의 협조 덕분으로 외지인은 섬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다.

성규가 도착한 섬에는 한국에서는 보기도 힘든 거대한 저택이 에게해를 내려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외지 생활이 오래되어 고생이실 텐데, 어려움은 없으셨는지요.”

그리고 그곳엔 그간의 실책으로 쫓겨나다시피 한국을 떠났고, 그 뒤로는 검찰 수사가 두려워 낯선 땅에서 평생을 몸 바쳐 온 대양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던 그의 부친 류근수가 있었다.

“괜찮다. 서울에 있을 때보다 외려 잘 지내고 있다. 회사 일에 신경을 끊으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아주 마음이 편하더구나.”

그의 말처럼 류근수의 얼굴은 나이에 맞지 않게 매끄럽고 윤기가 흘렀다. 정말로 잘 놀고 잘 쉬었던 모양이다.

성규는 이 저택에 들어서면서 몇 명이나 되는 스물 안팎의 젊은 여자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던 것을 떠올린다.

늙은이. 하는 짓은 변함이 없군. 그 피가 어딜 갈까?

성규는 부친이나 자신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래도 크게 편찮으신 곳은 없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성규는 잠시 부친의 근황을 묻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조부가 남긴 유언장에 관해 설명했다.

“그러니까 네 조부께서 대양 그룹 전 계열사 주식을 회사에 출연한다는 유언장을 써 놓았다는 말이지?”

“네. 현재 시가로는 대략 4조 원이 조금 넘을 겁니다.”

“허. 그렇게나 크단 말이더냐?”

“예. 웃기는 게 대양이 그렇게 둘로 나뉘고 난 뒤로 비주력 계열사들의 주가가 전에 비해 월등히 올랐습니다.”

“다 그 녀석이 인수할 거라는 이야기 때문이겠지.”

부자가 말하는 그 녀석은 말할 것도 없이 유진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발표한다면 정권에서도 아마 더는 압박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적어도 회장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신 듯합니다.”

“그러겠지. 전 재산을 헌납하겠다는데,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일가를 괴롭히는 게 딱히 좋게 보이지는 않을 거야.”

류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도 다시 귀국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 이렇게 떠도시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거라.”

류근수는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내 신변과 큰형님의 석방에 4조 원이라니, 그게 말이 될 듯싶더냐? 어림도 없는 소리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귀국을 못 하는 건 물론이고 조만간 인터폴 적색수배까지 내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색수배 그까짓 것 얼마든지 내리라고 해. 설마 내가 어디 이 한 몸 누일 데가 없겠느냐?”

“아버지.”

“괜한 말은 말거라. 그 유언장이나 처리할 방법을 찾자꾸나.”

단호한 류근수의 태도에 성규가 대답한다.

“금고를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모르니 열 수가 없다더군요.”

“금고라…… 침실에 있는 걸 말하는 게로구나.”

“네. 열두 자리라고 하더군요.”

“그 여자가 네게 말하더냐?”

이미 그녀가 부친의 후처가 된 지 20년이 훌쩍 넘어서지만, 아들들은 여전히 그녀를 모친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부친이 사망한 지금에야 예를 차릴 이유 따윈 더더욱 없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 그뿐만은 아니겠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럴 겁니다.”

“안에 들어 있는 것 중 유언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을 게다.”

“그 여자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략 그런 것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는 있습니다.”

성규는 삼촌에게 들은 내용을 부친에게도 전부 전달하지 않았다.

“대양 그룹이 세계에 진출한 지도 벌써 어언 50년이 다 되었다. 그간 그 양반이 여기저기 묻어 둔 것이 적지 않다. 나와 네 큰아버지들이 알고 있는 것은 그중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지. 고약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뭘 그리 아낀다고 끝끝내 혼자만 알고 있던 겐지 모르겠구나.”

대양 그룹을 창업한 사람은 류 회장이지만, 대양이 이렇게 커 오는 데에는 틀림없이 형제들의 지분도 있다.

하지만 류 회장은 90이 넘어설 때까지도 그룹의 경영권을 놓지 않으려 했고, 아직도 아들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아들들의 그런 푸념은 오히려 노인의 욕심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류 회장이 아들들에게 충분한 지분과 해외에 감추어 둔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면, 어쩌면 대양은 벌써 몇 개로 찢겨 나갔을지도 모른다.

류 회장은 아들들이 자신만큼이나 욕심으로 가득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 일생에 걸쳐 일구어 온 대양이라는 제국이었고, 수많은 제국의 창업자들이 그러했듯 자신이 눈을 감기 전에 제국이 분열되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다.

회장은 자신이 죽을 무렵 세 아들 중 하나에게 제위를 양보해서 대양 그룹이 무사히 후대로 이어지기를 바랬다.

만일 유진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지 않았다면 노인의 염원은 아마도 무사히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노인은 자신의 제국이 이미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룹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혈육에게까지 노려지고 있는 거대한 분노를 눈치챘다.

이미 대양 그룹의 힘 따위로는 거스를 수 없는 유진의 복수를 피해 갈 방법은 오직 하나뿐임을 깨달았다. 바로 대양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걸로나마 유진의 노기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만일 유언장을 파기하고, 지분을 가족끼리 상속받는다면, 그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쓰러트리기 위해 치졸한 짓거리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성규는 유진의 분노가 향하는 마지막에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은 쏙 빼어놓고 말했다.

“그렇겠지. 하나 대양의 지분을 포기한다고 녀석이 그냥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차라리 그걸 현금화해서 녀석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리든가…….”

“언제고 올 반격의 시간까지 기다리면 되겠지요.”

성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은 포기할 수 없다.

유진이 노리는 궁극적인 대상이 자신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어떻게 목을 내놓고 칼을 맞아 줄 수 있을까?

“4조라…… 그리고 세계 각지에 숨겨 놓은 자산도 적지만은 않겠지. 그걸로 그 녀석과 싸울 수 있겠느냐?”

“그동안 저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

“예. 이리저리 자금을 돌려 나름 앞날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크다고는 못해도, 할아버님의 유산 중 아버지 몫 정도는 벌어 놓은 듯합니다.”

성규의 말에 류근수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허언을 내뱉는 사람은 아님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한 말은 도무지 믿기 어렵구나.”

“연전부터 그 녀석이 암호화폐에 크게 손을 대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습니다. 아직은 놈에게 운 때가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해 지니고 있던 돈을 전부 거기에 쑤셔 넣었지요.”

성규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의 말에는 절반의 진실도 없다.

남보다 빠르게 암호화폐에 손을 댄 것은 맞지만, 그렇게나 큰 수익이 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진의 행보를 따라 투자에 나선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진의 선견지명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말을 이 자리에서 꺼내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다.

“허허! 그렇구나. 세상에 너보다 그 녀석을 잘 알고 있는 이도 없겠지. 그래, 때로는 원수를 잡기 위해서 원수가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부친의 얼굴에 대견하다는 표정이 서렸다.

“고생이 많았다. 그리고 역시 우리가 살아남을 길은 너뿐이겠구나. 준규와 현규 그 녀석들은…….”

부친은 잠시 회한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들, 그룹에서 물러나고 허송세월만 하는 모양이더구나. 그나마 연락도 요사이는 끊어졌고.”

무려 대양 그룹 회장의 셋째 아들로 살아온 그지만, 류근수도 이제 70을 눈앞에 둔 노인이다.

자식들에 대한 서운함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다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성규는 능청스레 형제들의 편을 들었다.

“여하튼 알았다. 다행히 내가 금고의 비밀번호라는 것을 대충 짐작하고 있구나. 이미 20년도 더 전에 받은 거지만…… 아마 틀리지는 않을 게다.”

대양의 회장은 자신에게 큰일이 생긴다면 금고를 열도록 세 아들에게 몇 개의 비밀번호 조합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류근수는 메모지에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비밀번호를 적어 성규에게 건네주었다.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그 물건은…… 네가 혼자 차지하도록 하거라. 형제들이든 그 여자든 나눠 주지 말고.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힘이 약해져 있어. 그걸 다시 가족 수대로 나누어서는 그 녀석에게 맞설 여력 따위 나지 못할 게다.”

“아버지.”

“사실 그리고 네 형제들이나, 사촌들이나 패기 있는 놈 하나 없어. 그걸 나눈다면 다들 제 앞가림하기도 바쁠 거다. 놈을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제가 해낼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제가 아니면 그럴 사람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지요.”

성규는 이 자리가 겸양이나 떨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절대 우습게 보지 말거라. 그 여자, 보통 욕심이 많은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당장 절반은 달라고 할 게다.”

“절반이나 나눠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신속하고 확고한 성규의 대답에 류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대양을 찾아오고, 아버지께 조부님의 자리를 돌려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 시대는 이제 끝났어. 이제는 네가 뜻을 펼쳐 가야 할 때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하루 쉬고 바로 들어가 보거라. 그 여자, 네가 비밀번호를 가져오기를 애가 타도록 기다리고 있을 거야.”

“물론이지요.”

그리고 두 부자는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정원의 식탁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이며 다정하게 부자의 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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