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아람코
“대양그룹의 해외 자산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파악이 끝났습니다. 대부분 가명 또는 차명 자산이라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큰 건은 거의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양 인터내셔널과 대양 홀딩스. 두 개의 지주회사로 바뀐 대양 그룹에는 적지 않은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갔고, 그중에는 유진이 영향력을 행사한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은 회계 관련 인사들이었고, 지난 1년여 동안 그들은 대양 그룹의 회계 자료를 샅샅이 살펴 특히 해외와의 거래에서 문제가 되는 점을 찾아내었다.
그렇게 밝혀진 자료들은 존 브래넌이 이끄는 ABC(아메리카 비즈니스 센터)에 넘어갔고, 그곳에서 자료를 토대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을 대양 그룹 회장 일가의 해외 자산을 파악하고 있었다.
정치가 불안정한 개발도상국의 많은 재계의 인사 그러하듯 과거 한국의 재벌가 회장들은 한국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해외로 재산을 옮겨 놓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욕적으로 세계 진출에 앞장선 대양 그룹 일가는 더욱 그런 성향이 두드러졌다.
한국 재벌 그룹 중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했고, 가장 많은 나라에 진출해 있으며, 아직도 가장 많은 해외 법인과 해외 현지 공장을 운영하는 곳이 바로 대양 그룹이다.
동구권의 자동차 공장을 위시해 유럽부터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 각국에 이르기까지 대양의 현지 공장이 없는 곳은 없다고 할 정도이다.
당연하게도 그 수많은 나라에 진출할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로 석연치 않게 사라진 자금이 적지 않다.
특히나 인터넷이나 정보 공유가 쉽지 않았던 20세기에는 국가 간 자금 흐름 과정의 곳곳에 빼먹을 곳이 많았다.
“주로 돈이 될 것들은 부동산이더군요. 다른 자산들은 대양 그룹의 해체로 가치가 하락된 것이 많지만, 부동산의 경우는 다르니까요.”
존 브래넌이 올린 자료에 따르면 적어도 100여 국가에 적지 않은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대부분 각국의 수도나, 수도에서 멀지 않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구매 당시의 가격에 비해 월등히 오른 곳이 적지 않았다.
“그중 상당수는 카리브해 등지의 조세 피난처에 본사를 둔 법인을 통해 소유하고 있습니다. 케이먼 제도, 파나마, 사모아 등 10개가 넘는 국가들에 설립된 법인의 수만도 100여 개에 달합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섬세하게도 해먹은 모양이다.
“에릭 홀더와 논의해서 법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진이 고용한 또 한 명의 유력 인사인 에릭 홀더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던 배경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법률가들과도 강한 유대가 있는 모양이다.
대양 그룹 회장 일가는 틀림없이 한국 사람이고, 한국 국적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해외 자산은 미국에도 일정 부분 있지만, 대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법률상으로는 미국의 법무부에서 관여할 여지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부분에서만 그럴 뿐이다.
어떤 식으로든 대양 일가는 미국에서 각기 사업을 영위하고 있고, 미국 법률에 저촉받을 여지는 잔뜩 있다.
특히 세금 문제가 그랬다. 단 몇백 달러라도 미국 세무 당국의 조사에 휘말리면 보통 골치가 아파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유진이 에릭 홀더 등의 전직 인사들을 통해 압박을 가하면,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해외 재산에 대한 압류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물론 진짜는 한국 정부에서 시작할 것이다. 존 브래넌이 확보한 자료는 한국 정부가 대양 그룹 사주 일가의 착복에 대한 압류에 나서게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류성규가 터키에서 환승을 하지 않았다고 했던가요?”
성규가 인천공항을 통해 폴란드로 출국한 사실은 당일 바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자가 터키에서 환승 비행기에 탑승하지 않고 사라진 사실도 다음날 바로 받을 수 있었다.
“키클라데스 제도에 류근수가 머무르고 있는 별장이 있습니다. 아마 그곳이 목적지인 듯합니다.”
대양중공업 사장이던 류근수는 대양중공업 주식 공매도 사태 이후로 해외로 나가 종적이 묘연해져 있는 상태이다.
대략 유럽 어디엔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곤 있지만, 그 넓은 유럽 땅 어디에 머무르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세계적인 정보기관의 수장을 몇 년이나 역임한 존 브래넌에게는 그다지 대단치 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류근수가 유럽으로 건너가서 겨우 몇 주일 만에 그가 은둔해 있는 정확한 장소와 공중에서 찍은 사진까지 보고가 올라왔다.
듣기로는 ABC에 충분한 예산을 배정해 주었더니 유럽의 드론 제작사에 투자하고, 그곳에서 개발 중인 군용 드론을 받아 시험 삼아 운용하고 있단다.
나름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딜이었던 모양이다.
“지금 유럽 지부에서 다시 확인 중에 있습니다.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존 브래넌은 용건만 말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일반적인 보고라면 굳이 행차할 이유가 없지만, 대양 그룹에 관련된 일은 가능하다면 직접 찾아와 상세한 브리핑을 했다.
보스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존 브래넌이 나가고 나서 곧 또다른 손님을 맞이했다.
이번에는 멀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잘생긴 중년 남자였다.
“오랜만이로군요. 야시르.”
야시르 모함메드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 펀드(PIF)의 미국 담당 중역으로, 사실상 국부 펀드의 주인인 빈 살만 왕세자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물론이고, 뉴욕에서도 환영받는 큰손이었다.
유진 또한 모함메드와의 만남은 좀처럼 거절하는 일이 없다.
총 추정자산이 5,00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 펀드는 최근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외부의 다양한 기업에 통 큰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세로 등장한 빈 살만 왕태자가 석유에 의존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해 첨단 사업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투자를 아낌없이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투자의 상당 부분은 유진의 펀드와도 관련이 있다.
“왕세자 전하께서는 내년까지 모두 1,000억 달러의 기금을 마련해 유진과 조인트 펀드를 만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한 시간가량의 잡담이 오고 간 뒤에야 모함메드는 본론을 꺼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무슬림 사업가와의 회합은 단순한 비즈니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신뢰를 하는지를 보여 주고, 주변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세상 돌아가는 일을 화제로 토론을 하다가 간신히 주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굉장히 큰 액수로군요.”
이미 오랫동안 유진과 그의 측근들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력 관계에 대해서 많은 논의를 해 왔고, 유진은 PIF의 투자 규모를 그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빈 살만 왕세자는 일본의 소프트뱅크와 함께 비전 펀드를 만들어 앞으로 몇 년 동안 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의 등장 때문인지, 비전 펀드의 투자 규모는 아직 유진이 알고 있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비전 펀드의 가장 큰 물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는 그동안 저울질을 해 온 모양이다.
유진이 없었다면 일본의 소프트뱅크야말로 명백하게 가장 공격적이며 규모 있는 투자 기업이다.
하지만 유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늘 세계 제1의 투자자 자리는 그의 몫이다.
“앞으로 4년 동안 그 정도의 기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미국 기업에 대한 투자가 목적이라고 했었죠.”
“유진이 당분간 미국 경제만큼 활황을 보이는 곳은 없을 거라 말씀하셨으니까요. 왕세자 전하께서도 크게 동의하시는 부분입니다.”
“그리 대단치 않은 사견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사견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겁니다. 겸양이 너무 지나치시군요. 이번에도 왕세자 전하께서 크게 기꺼워하셨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도 코인의 상승장에서 제법 짭짤한 수익을 거두었다. 물론 유진의 덕분이다.
그리고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왕세자 또한 유진에게 필요한 도움이 있다면 얼마든지 요청하라는 말을 남겼다.
평범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인사치레라 하겠지만, 일국의 왕세자, 그것도 석유 산업을 지배하는 나라를 실제로 통치하는 이가 내뱉은 말의 무게는 다르다.
유진은 언제고 사우디 왕세자의 약속을 한 번쯤은 써먹을 일이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조인트 펀드의 건에 대해서는 난색을 보였다.
“4년 동안 1,000억 달러짜리 펀드를 받아들이기에는 여유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른 투자 기업이라면 이처럼 돈을 싸 들고 오는 손님을 절대 박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한두 푼이 아닌 작은 나라의 GDP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하지만 유진의 입장은 달랐다. 지금도 그의 펀드에 투자하겠다는 세계 유수의 은행과 권력자들이 줄을 서 있다.
“일반적인 자산운용사와는 다르다는 점을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군요.”
현재의 세계 정상들에게 유진이 운용하는 펀드에 자산을 맡기는 것은 사실상 특혜로 인식되고 있었다.
유진에게 맡겨 놓으면 매년 적어도 10% 이상, 많게는 30%에 가까운 수익을 볼 수 있으니 그만큼 매력적인 투자처도 없다.
물론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는 헤지펀드의 경우라면 그런 이익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반대로 투자 금액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일도 흔하다.
수십만이나 수백만 달러라면 그렇게 위험한 헤지펀드에 투자할 수도 있겠지만, 억 단위가 넘어가는 자금을 위험한 투자에 맡길 수야 없다.
규모가 커지면 수익률보다는 안정성에 훨씬 더 높은 점수를 주기 마련이다.
그런 큰 자금은 결국 1년에 겨우 몇 %의 이익을 남기는 자산운용사로 몰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유진의 자산운용사는 지금까지 한 번의 실패도 없이 매년 수십 % 이상의 수익을 돌려주었다.
많은 권력자들이 투자하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에 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000억 달러를 투자받는다면, 다른 쪽에서도 비슷한 요구가 들어올 수 있다.
“투자 자금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어느 한도 이상의 수익을 내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지금도 벌써 우리가 운용 중인 자금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지요. 추가 자금이 들어갈 곳은 좀 더 위험한 분야가 될 겁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왕세자 전하께서도 결코 안정적인 투자를 위해 이런 제안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이 큰 분야에 더욱 진출하는 것이 전하의 요청입니다.”
“음…….”
“가능하다면 빨리 결정을 내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랍 사람답지 않게 재촉해 오는 것을 보면, 일상적인 방문은 아닌 모양이다.
“아람코의 IPO 때문이로군요.”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니 어떤 이유인지 금세 눈치챌 수 있었다.
“맞습니다. 전하께서 이번 상장에 큰 기대를 하고 계십니다.”
아람코는 지난해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상장하려다가 철회한 국영 정유사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는 이번에야말로 성공적인 상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