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네옴시티
지난해인 2017년 6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제1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폐하고 친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초대 국왕인 알 사우드에 유언에 따라 형제 상속을 우선하게 되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위 계승 체제를 바꾸어 놓고, 사우드 일가의 결속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왕세자의 지위와 부총리 겸 국방장관이라는 요직까지 독차지한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는 바로 행동에 나섰다.
바로 자신의 왕권 계승에 도전자가 될 수 있는 사우디 왕족들에 대한 숙청에 나선 것이다.
명분은 충분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들은 수십 년 동안 국가 경제를 독점하며 다양한 부패를 저지르며 자산을 불려 왔다.
유가가 고공행진을 할 땐 국가가 제공하는 안락함 때문에라도 그러한 부패를 눈감아 온 국민들이지만, 몇 년 전부터 계속되는 저유가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는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국민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 30대 젊은 층의 실업률은 사상 최악의 상황이다.
그들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 지기를 원했다.
새로운 왕세자는 이걸 기회로 삼았다.
대부분 그 자신의 사촌 관계인 왕족들을 부패 혐의로 호텔에 가두고 지금까지 축적해 온 자산의 70%를 내놓으면 풀어 주겠다는 제안과 함께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어느 사회이건 부패에 대한 처단은 국민들의 큰 호응을 받기 마련이다.
비록 그 부패를 처단하겠다는 사람 역시 비슷한 행위의 가담자였다 해도, 단순히 정권 싸움인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해도, 부패 처단을 내세우면 지지도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왕세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전격적인 숙청으로 정권을 장악한 왕세자는 다음 단계로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정유 회사인 아람코를 상장하려 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국 내 석유 생산 독점권을 가진 아람코는 당연하게도 원유보유량과 원유생산량에 있어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 회사이다.
회사의 잠존 가치는 적어도 2조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아람코를 상장한다면 겨우 5%의 지분을 파는 것만으로도 최하 1,0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상장된 주식을 활용하기에 따라서 석유로 벌어들이는 수익 외에 가외 수익을 얻어 낼 수도 있다.
아람코의 주가는 철저하게 유가의 등락에 따라 움직일 것이고, 유가의 움직임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사우디 왕가이다.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를 탈석유화하는 일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구조는 철저하게 석유 산업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 예산의 85%, 국내 총생산의 42%,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수출의 90%가 석유로부터 비롯된다.
그리고 세계는 환경 위기를 맞이해 점점 탈 화석연료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석유에만 의존하던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이미 주변의 다른 산유 국가인 카타르나 아랍에미리트, 오만 등이 석유에 의존하는 경제를 뜯어고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노력하고 있던 것에 비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척이나 늦은 편이다.
지금에라도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왕세자의 계획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그의 개혁을 지지해 주던 국왕은 이번에는 왕세자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지난해 말로 예정되었던 아람코의 IPO는 올해로 밀렸고, 현재 상황으로 보아서는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다.
“아람코의 상장으로 모두 1,000억 달러 정도의 자금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야시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돈은 사우디 경제의 정상화를 위해 사용될 예정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자금이 모일 수도 있지요. 저하께서는 상장에 앞서 확실한 계획을 세워 놓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야시르의 말은 유진이 알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과 그렇게 차이 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목적이 단순히 확실한 계획만은 아니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아람코의 상장이 좌절된 것은 국왕인 부친의 반대 때문이다.
국왕은 자신의 자리를 이어받을 왕세자에게 힘을 실어 주면서도, 아람코의 상장 건은 자신의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본 듯했다.
아람코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걸 왕세자의 주도하에 상장한다는 것은 외부 시선으로 봤을 때 완전히 그에게 모든 권한이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많은 아들 중에서도 일곱 번째 자식인 빈 살만을 왕세자로 삼을 만큼 신뢰하는 국왕으로서도 그것만은 쉽게 허용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의 실권을 장악한 빈 살만이 아람코를 상장시키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숙청 말고도 달리 추가적인 성과가 필요했다.
유진의 지난 삶에서는 왕세자가 PIF를 통해 일본 소프트뱅크와 손잡고 비전 펀드에 450억 달러를 출자해 1000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미래 비전을 선보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프트뱅크 대신 유진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당연한 고민이다. 누가 보아도 앞을 내다보고 투자를 한다면 유진이 가장 적격이다.
적어도 수백억 달러에서 많게는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대형 투자를 진행한다면 가장 뛰어난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유진은 지난해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살만 왕세자의 요청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상대방이 애가 타고 있는데, 덥석 원하는 것을 내어 줄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유진은 소프트뱅크처럼 당장 남의 돈이 필요한 사람도 아니다.
“전하께서는 안정적인 투자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이 훨씬 더 중요하지요.”
야시르는 다시 한번 왕세자의 목적이 안정적인 투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손해의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과감한 베팅을 하겠다는 말이다.
세상엔 수많은 부자가 있지만, 수천억에 달하는 투자금을 들고 와서 위험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빈 살만 말고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비전 2030의 모든 프로젝트에 유진의 의견을 참조하겠습니다. 네옴(NEOM)시티의 건설에 있어서도 원하는 업체가 있다면 가능한 함께할 수 있도록 조처하지요.”
그렇게 오랜 협상의 끝에 비로소 납득할 만한 조건이 나왔다.
비전 2030은 역시 빈 살만이 내놓은 미래의 사우디아라비아를 건설하기 위한 초대형 프로젝트이다.
예상 규모는 7,000억 달러로, 유진이 한국에 투자하겠다고 말한 5,000억 달러를 뛰어넘는다.
중견 국가의 1년 GDP에 해당하는 예산으로 사우디아라비아를 첨단 기술과 투자의 허브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중 5,000억 달러는 아라비아반도 북서쪽 홍해에 건설할 신도시 네옴의 건설비로 책정되어 있다.
서울 면적의 44배에 달하는 26,500㎢의 부지에 건설될 이 멋진 신도시는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만 사용되며 경비, 배달 등 단순 반복 작업과 노인·유아 돌보기 등을 로봇이 수행하게 될 것이다.
도로에는 사람이 필요 없는 자율주행 자동차와 무인 드론만이 오갈 수 있다.
다분히 미래지향적인 프로젝트이다.
물론 많은 비판도 있다. 현재의 기술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공상에 불과한 프로젝트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투입될 비용만은 진짜였다.
대형 건설 사업이 늘 그러하듯, 이 프로젝트 또한 수많은 기업이 적지 않은 수해를 볼 것이며, 한편으로는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만들어 내는 산실이 될 것이다.
그 사업에 유진이 참여한다는 것은, 굉장한 특혜를 주겠다는 것이다.
당장 유진이 주식을 가지고 있는 건설회사가 이 프로젝트에서 수주를 받는 것만으로 지분 가치가 치솟게 될 것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그가 얻게 될 이득 또한 천문학적 수준이 될 것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유진에게 투자한 자금이 다시 여기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왕세자 또한 충분한 이득을 얻어 낼 것이다.
빈 살만은 유진에게 본격적으로 손을 잡자는 제안을 했다.
이걸 통해 유진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는 적어도 1조 달러에 달하는 경제 공동체를 만들게 될 것이다.
“참조라는 말이나 가능하다면 함께……라는 말은 너무 모호하군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유진의 의사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하지요.”
세계에서 가장 상행위에 능통한 민족으로 유대인과 함께 아랍인을 꼽는다.
나라를 잃고 세계를 떠돌며 오직 믿을 것은 돈뿐이었던 유대인들처럼, 아랍인들은 오랜 시간을 대륙과 대륙을 잇는 교역에 종사해 왔기 때문이리라.
유진은 그들을 상대할 때에는 항상 아주 많은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1조 달러짜리 초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아랍 왕자의 대리인도, 유진도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거래였다.
* * *
“그자에게 연락이 왔다고?”
에게해로 날아간 성규가 돌아오던 날 오후, 유진은 무척 이상한 보고를 받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한국의 헤드쿼터인 SS 파트너스의 김환에게 찾아온 것이다.
“흠…… 그래. 알았어. 우선 원하는 게 뭔지 들어 보도록 하지.”
“이게 그 유언장이로군요.”
성규가 금고에서 꺼낸 서류철을 들고 훑어보며 말했다.
성규가 에게해의 별장에서 은거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부친에게 받아온 비밀번호로 금고는 쉽게 열 수 있었다.
성규는 회장의 침실에서 이 침실의 유일한 주인인 회장의 미망인과 함께 은밀한 행사를 하고 있었다.
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 둘 이외에도 두 사람이 더 있다.
바로 유언장을 작성한 변호사와 숨겨진 아들인 류 비서이다.
미망인과 성규는 금고 안에 들어 있는 유언장 말고도 원하는 것이 더 있었고, 그걸 다른 한 명과 나누길 원하지 않았다.
에게해까지 날아가 비밀번호를 알아낸 성규는 은밀하게 미망인에게 연락해 류 비서를 소외시키고 금고 안의 자산을 둘이 나누기로 했다.
미망인으로서도 거부할 까닭은 없었다.
“정말로 대양 그룹 지분을 전부 넘기겠다는 거네요.”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성규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짓이지. 한두 푼도 아니고.”
수십 년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남편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으며 미망인이 말했다.
“됐어요. 이제 이게 우리 손에 들어왔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필요가 없어졌네요.”
유언장을 훌훌 넘겨 보던 성규가 말했다.
“그래. 그 흉측한 건 찢어…… 아니, 태워 버려야지.”
“그런데 변호사와는 이야기가 잘된 건가요?”
“물론이지. 그쪽도 쓸데없이 입을 열지는 않을 거야.”
미망인은 이미 자신이 변호인에게 충분히 손을 써 두었음을 말했다.
“그리고 이건…….”
성규는 유언장을 미망인에게 넘기고, 금고 안에 들어 있는 서류들을 살펴본다.
미망인도 이미 손에 들어온 유언장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성규와 함께 서류를 찾는다.
회장이 수십 년 동안 숨겨 놓았던 해외의 자산이 거기 숨겨져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