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유언장
“이거로군요.”
“그래. 거기 네 개의 서류철이 있을 거야. 너희 부친 거는 그중 하나고.”
“작은아버지 거도 하나 있겠군요.”
성규는 자신보다도 어린, 사고만 치고 다니는 미망인의 아들을 거론했다.
“그래. 참 다정하신 분이지. 네 아들에게 각기 한 몫씩을 남겨 주셨네.”
“하지만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뿐이고요.”
“공평하게 해. 알지?”
“그러죠. 할머니가 둘, 내가 둘.”
성규는 당장 그녀와 다툴 생각은 없다. 이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켜 보아야 둘 모두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은 서로가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이다.
“어차피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니까 거기서 두 개를 골라가. 그리고 나머지 둘은 내게 주면 돼.”
“공평하네요. 정말.”
성규는 네 묶음의 서류철 중 두 개를 남기고, 나머지를 미망인에게 넘겼다.
“흠…… 어렵네.”
미망인은 넘겨받은 서류철을 조금 훑어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온통 영어투성이의 서류들이다. 물론 그녀라고 영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전문적인 서류를 크게 접해 본 것은 아니니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좀 도와드릴까요?”
성규가 느물거리며 물었다.
“됐어. 자네한테 맡기느니 차라리 류 비서한테 물어 보지.”
“류 비서라…… 너무 믿지 마세요. 그 인간 보통 음흉한 게 아니에요.”
“그러려나?”
미망인이 고혹한 웃음을 지었다. 어느덧 4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여자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이제 겨우 서른이나 넘었을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타고 나기도 그러했겠지만, 그동안 외모를 위해 투자한 비용이 나이가 들어서도 그 가치를 해 주는 듯했다.
“할머니는 웃을 때 매력적이에요.”
“아주 엉큼한 손자네.”
“아쉽단 말이지요.”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성규와 미망인이 칼이 숨겨진 묘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깥이 부산스러워진다.
“여기가 못 올 데라도 되는 거야? 비켜!”
“사모님께 말씀을 드려야…….”
고용인과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침실의 문이 벌컥 열린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
고용인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뒤로하고, 험상궂은 표정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뭣들 하는 거야!”
침실의 주인인 미망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할머님! 저희들 왔습니다.”
문을 들어선 것은 미망인과는 피가 섞이지 않은 손자들이다.
회장의 장남과 차남, 그리고 삼남의 아들들 전부가 하나씩 들어와 성규와 미망인을 둘러싸고 섰다.
“소식 들었습니다.”
장남의 큰아들인 한규가 무리를 대표해서 입을 열었다.
“무슨 소식?”
“할아버지 유언장과 해외 자산 말입니다.”
“그게 아니면 뭐겠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중요한 일을 우리는 쏙 빼놓고 하신다는 겁니까?”
“해외 자산?”
미망인은 그들이 들어오던 순간부터 어떤 일인지 짐작했다.
어디에서인지는 몰라도 비밀이 새어 나간 것이다. 대체 누가? 그녀는 성규를 슬쩍 노려본다.
하지만 성규는 그녀보다도 오히려 더 당황한 모습이다. 평소의 자신 있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유언장의 폐기로 득을 보는 것은 여기 모여 있는 모두이다.
하지만 해외 자산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성규. 너 많이 컸다.”
이번에는 회장의 삼남인 류근수의 큰아들, 성규의 형 류준규가 입을 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성규를 잡아먹을 듯 눈을 부라리고 말을 이었다.
“어디서 더러운 피를 데려다 거둬 주었더니,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어?”
형이 성큼 다가서자 성규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내놔!”
준규는 성규가 들고 있던 서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윽박질렀다.
하지만 성규라고 호락호락 제 손에 들어온 서류를 넘겨줄 위인은 아니다.
잠시 서류를 둘러싼 실랑이가 이어진다.
“할머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것을 그렇게 둘이서 꿍짝꿍짝 집어삼키려고 합니까?”
한규는 미망인이 들고 있는 서류를 노렸다.
“응? 아니. 이건…….”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미망인이 뒤로 물러선다.
“이런 중대한 일은 가족들 전부가 함께 논의해서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체 둘이 무슨 사이이기에, 이렇게 죽이 맞아 전부 꿀꺽하려는 겁니까?”
말이 점점 험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싶은 게야!”
참다못한 미망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 서류. 넘겨주시지요.”
한규가 손을 내밀었다. 그나마 아직은 조모의 대우를 해 주겠다는 표현이었다.
“여기 너희들 몫은 이것뿐이다.”
잠시 고민하던 미망인이 두 개의 서류뭉치 중 하나를 장손에게 건네준다.
하나 한규는 그걸 받아들고도 여전히 미망인을 노려본다.
“회장님께서 남기신 것은 모두 네 개다. 하나가 너희.”
미망인이 장남의 자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하나는 너희들.”
이번에는 차남의 아들들을 보며 말한다.
“너희 것도 하나 있어. 전부 그 녀석 손에 있으니 알아서들 챙기거라.”
미망인은 이 난장판을 헤쳐나가는 것이 우선인지라, 성규를 지목하며 말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손을 안 놔?”
여전히 성규와 실랑이를 벌이던 준규가 참지 못하고 손을 휘둘렀다.
성규는 서류를 잡고 있느라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얻어맞고야 만다.
미망인이야 일이 이렇게 되어도 챙길 것이 있지만, 성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다른 형제들과 사촌들이 챙겨 가고 나면 그에게 떨어질 것은 거의 없다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성규는 필사적으로 서류를 끌어안고 있을 뿐이다.
“윽!”
서류를 움켜쥔 성규가 바닥에 쓰러지자, 장정 셋이 모여 서류를 난폭하게 빼앗았다.
“하아…… 진짜. 쓰레기 같은 게.”
성규의 다른 형제가 그를 내려다보며 비아냥거린다.
“그 유언장은 어디 있습니까?”
미망인에게서 서류철을 빼앗은 한규가 다시 물었다.
“여기 있네.”
그새 욕심을 누르고 침착을 회복한 미망인이 짐짓 위엄을 갖추고 말했다.
“흠…… 이게 그 유언장이라는 말이지.”
“정말로 지분을 전부 헌납하겠다고 써 있어요?”
차남의 큰아들이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성규에게 빼앗은 두 개의 서류철 중 하나를 차지한 그는 이제 다른 재산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인다.
“보자…… 정말이네. 흠.”
“어디 봅시다.”
차남의 큰아들이 한규에게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유언장이 건네어지지는 않았다.
“형님. 설마 그거 그냥 그대로 발표하려는 건 아니죠?”
“음…….”
한규는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지 맙시다, 우리. 그거 얼마짜리인지 알고 계시오?”
“알지. 알고말고.”
“무려 4조입니다. 요즘 대양 값어치가 오르고 있어, 좀 더 버티면 5조, 6조짜리가 될 수도 있어요.”
“음…….”
한규가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에 빠진다.
“설마 정말로 그 유언대로 하면 큰아버지가 풀려나실 거라 기대하는 건 아니죠?”
“그거야 모르지.”
아들로서의 도리를 저버리지 못한 한규는 부친을 생각해서라도 유언장을 찢어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막말로 큰아버지야 죗값을 치르면 그만인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그 큰돈을 포기하는 게 말이 됩니까?”
“진규야!”
“아니.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습니까? 안 그래요? 한두 푼도 아니고 4조, 5조예요. 어차피 절세는 틀린 일이고, 세금 낼 거 다 내도 각자 5천억은 떨어집니다. 그걸 그 양반 감옥에서 빼내자고 바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철썩!
도저히 참지 못한 한규가 자신의 부친에 대해 험한 말을 하는 사촌 동생의 뺨을 후려치고야 말았다.
그 자신도 부친을 석방시키기 위해 그렇게 큰돈을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촌 동생의 무례한 모습을 놓아둘 수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크게 폭력이라도 일어날 것 같던 사태는, 뺨을 맞은 진규가 허리까지 숙이며 사과를 하는 것으로 진정되었다.
“형님께서 지금 얼마나 힘드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잔뜩 목소리를 높이며 쏘아붙이던 모습은 간데없고, 차남의 장남은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백부님을 위해서도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거라도 손에 쥐고 있어야 우리가 다시 일어설 기반이 됩니다.”
“맞아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려운 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그 유진인지 뭔지 하는 개자식이 원흉 아닙니까? 그 녀석과 싸우려면 우리도 뭔가 손에 든 게 있어야지 않겠어요? 그걸 포기하면 우린 정말 끝입니다. 백부님께서도 지금은 좀 힘드시겠지만, 조만간 나오시면 손에 쥔 게 있어야 싸움을 하든 뭘 하든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는 우리 아버님께 구형된 형량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겐가?”
한규가 착잡한 표정으로 묻자 다시 진규가 답했다.
“이십 년이지요. 제가 그걸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검찰이 구형한 형량이 그대로 인정되는 거 보셨습니까? 변호인들도 열심히 하니 길어야 5년입니다. 그리고 재심으로 가면 3년. 그때쯤이면 그 녀석의 기세도 줄어들 테니 집행유예까지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니라 해도 겨우 1년 정도면 형집행정지로 나오실 테고요.”
“…….”
“겨우 1년입니다. 길어야 1년이라고요. 이 나라 사법부가 재벌그룹 사주에게 그보다 길게 형을 주는 거 보셨어요? 하지만 여기서 이 유언장을 실행하면 백부님은 더 이상 그룹 사주도 아니십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더 지켜야 해요.”
아무도 전 대양자동차 사장을 대양 그룹의 사주라고 보는 이는 없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조금 달랐다.
여전히 대양 그룹은 자신들의 것이고, 이제 가장을 물려받은 회장의 장남이 사주라는 논리다.
“으음…….”
한규는 사촌 동생의 논리에 조금은 수긍하는 표정이다.
아니, 사실은 그도 유언장대로 실행해서 자신의 손에 들어올 수천억을 놓치기 싫었을 뿐이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난 조금 생각이 달라요.”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 것은 삼남의 장남인 준규 쪽이었다.
“회장님께서는 단순하게 백부님의 형량만을 생각하신 것은 아닐 겁니다. 그건 우리가 백기를 들고 투항하겠다는 말이잖아요? 제발 이제 우리를 놓아달라는 말이라고요.”
“누구한테?”
“당연히 그 찢어 죽일 유진인가 하는 놈 아니겠어요? 녀석에게 남은 가족은 살려달라는 말이잖아요. 솔직히 난 먹힐 수도 있다고 봐요.”
“먹히다니?”
“그 녀석도 인간인데, 우리가 이렇게 대양 그룹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그동안의 원한을 잊을 수도 있다는 거죠. 대양 그룹이 우리 전부 아닙니까?”
“그래서 이걸 포기하자고?”
한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묻는다.
그도 조금 전까지 유언장을 그대로 발표하는 걸 고민했었지만, 유진에 관한 것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아버지인 류근호에 관한 일만 마음에 걸렸을 뿐, 그 막대한 자금을 유진 한 사람 때문에 포기한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