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85화 (185/363)

185화 난장판

“어쩌면 그게 싸게 먹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자식…… 앞으로도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 파멸시키려고 할지도 몰라요. 그 녀석이 가진 힘이 솔직하게 말해 너무 무서워요.”

“파멸이라…… 그런 걸 원한다면 아마도 너희 형제들에 대해서겠지.”

진규가 성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유진과 대양 그룹 사이의 분쟁이 시작된 것은 모두 성규 한 사람 때문이라는 의미였다.

“맞는 말입니다. 이 빌어먹을 자식 때문에 모든 게 벌어졌죠.”

사촌 형제들 모두가 아직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규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의 형인 준규 역시도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괜히 남의 여자를 찝쩍거려서는. 더러운 피는 못 속인다니까.”

“흥! 그게 어디 성규 혼자만의 탓이었던가? 강유진 부친의 회사를 삼키려던 게 숙부님 아니셨나?”

“그런 것도 있죠. 뭐, 원죄가 우리한테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어찌 됐든 지금 그자가 원하는 게 우리뿐만은 아닌 거야 모두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녀석은 대양을 쓰러트렸다고요. 지금 정권이고 은행이고 그렇게 눈치를 보는 게 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녀석이 가진 돈과 권력 때문 아닙니까? 녀석이 이걸로 만족할 거라 보십니까?”

준규의 물음에 진규가 살짝 발끈한 듯 되물었다.

“만족 못 하면?”

“생각해 봐요. 예전에 이 대한민국 땅에서 우리한테 밉보이면 어디 살아갈 수나 있었습니까? 지금은 딱 그 반대가 된 거라고요. 그 녀석한테 밉보이고 한국에서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대통령에서 국회의원들까지 전부 한통속이 되어 버렸는데?”

“그래서? 정말 유언장대로 지분을 넘기자는 거냐?”

“당장 그렇게 하자는 말은 아니고요. 조금 고민해 볼 여지는 있다는 거죠. 우리 이 소식을 들은 지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잖아요.”

그때, 잠자코 손자들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미망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래서 그 소식을 어디서 들었는데?”

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사달이 난 것인지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쏙 빼놓을 생각을 하셨습니까? 할머님.”

염언히 이 집안의 장손인 한규가 불퉁스럽게 되물었다.

“너희를 빼놓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유언장을 없애야 너희에게도 돌아갈 것이 있으니 당연한 게 아니었니? 난 단지 너희 형제가 부친에 대한 효심 때문에 일을 그르칠 것을 걱정했을 뿐이란다.”

잠깐 사이에 그녀는 완전히 평정심을 회복했다.

“그래서 이것도 둘이서 나눠 먹으려 했고요? 그건 또 어떻게 변명하시겠어요?”

“그건 네 등분으로 나누어 합당하게 나누어 줄 생각이었다.”

“맞습니다. 아버지께 여기 금고 비밀번호를 받아 올 때도 그렇게 말씀드렸고, 아버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전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부름을 따른 것뿐입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덧붙였다.

“흥! 나더러 그런 말을 믿으라고?”

“아니. 다짜고짜 폭력을 쓰시면 어쩌십니까? 형님이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저한테 이번 일을 맡기신 게 아닙니까?”

성규는 뻔뻔스럽게 자신을 변호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언제나 가족들 사이에서 경원시 당하는 신세였으니.

“아버지께서도 유언장을 남겨 놓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절 보내신 거고요.”

“그래! 그렇지? 숙부님께서 그러셨다는 말이지?”

성규의 말에 장남과 차남의 자식들이 조금은 솔깃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미 사고로 사망한 차남 류근일의 자식들은 더욱 그러하다.

아직도 죄인의 몸인 장남 류근호나 해외 도피 생활을 하고 있는 삼남 류근수의 자식들과 달리 류근일의 자식들에게는 아버지를 위해 희생해야 할 이유 따윈 전혀 없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선대의 과오로 후대가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고요. 아버지와 백부님의 법적 문제 때문에 다른 가족들 모두의 자산인 지분을 그렇게 허무하게 내다 버릴 수는 없다 하셨습니다.”

성규는 사촌 형제들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렇군. 숙부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신다면야…….”

은근히 부친에 대한 부담감에 불편해하며 차마 유언장을 찢지 못하던 한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더는 왈가왈부 하지 말고 빨리 처리해 버립시다.”

성규가 한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자, 그가 유언장을 반으로 찢어 내어 준다.

성규는 그걸 다시 반으로 쭉 찍어 다시 그 유언장을 류근일의 첫째 진규에게 넘겼다.

유언장은 그의 손에서 다시 여러 조각으로 찢겨 나갔다.

이로써 류 회장의 세 아들 모두의 후손이 유언장을 파기하는 데 함께한 셈이었다.

그렇게 회장의 마지막 행사는 조손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나가고 말았다.

“그러면 이제 후환은 깨끗하게 치워졌네요.”

유언장을 찢는 것으로 주도권을 찾아온 성규가 조금 전 폭력 행위의 증거를 입가에 남긴 채 말을 계속했다.

“할아버님께서 남기신 유산은 네 부분입니다. 그걸 어떻게 분배해야 할지 이제 논의해 보도록 하죠.”

“그건 네놈이 끼어들 게 아니야.”

성규의 형 준규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이걸로 대충 끝냅시다. 각자 챙긴 것을 어떻게 나눌지는 알아서들 하고요.”

삼남의 첫째 자격인 준규가 각각 장남과 차남의 첫째인 한규와 진규를 보고 말했다.

첫째들이 대표하여 재산 분배를 진행하자는 의미였다.

그러자 둘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이 알아서 잘 나누어 놓으셨겠지.”

그들 역시 괜히 서류를 펼쳐 다시 어떤 자산이 나은지 비교하는 것보다 여기서 깨끗하게 배분을 끝내는 것이 낫다는 데 동의했다.

“참 잘도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구나.”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회장의 미망인이 괜히 한소리 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여사님.”

한규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는 조부의 부인에게 할머니라는 명칭 대신 여사님이라는 말을 쓰는 것으로 경멸을 표현했고, 미망인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굳어진다.

“네…… 네 녀석이!”

미망인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갑자기 침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검찰입니다. 모두 꼼짝하지 마세요. 유언장 훼손과 횡령 등의 혐의로 모두 체포합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들어온 한 남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검사님. 찾았습니다. 맞습니다, 유언장.”

수사관 한 명이 진규 손에 쥐어진 찢겨 나간 종이 쪼가리를 빼앗아 확인하고 손을 든다.

“그래? 잘 챙겨. 하나도 빠트리지 않게.”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한규가 소리쳤다.

“너희들 뭔데 남의 집에 들어와서 이 난리야!”

“여기 영장입니다. 모두 현행범으로 체포되었습니다. 반항은 말아 주십시오.”

“야! 그거 해. 미란다.”

“여러분은 모두…….”

“이런 씨!”

자리에 있던 이들 중 하나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사관에게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몸싸움을 벌여 본다.

그러자 그런 몸싸움은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준규는 자신의 몸에 손을 댄 검찰 수사관에게 주먹까지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주먹이 수사관의 얼굴에 그대로 박혔다.

한데 고통스러워해야 할 수사관은 씩 웃고만 있다.

“공무집행방해로 체포하겠습니다.”

일부러 맞아 준 것이 틀림없는지, 수사관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어느새 꺼낸 수갑으로 준규의 손을 뒤로 꺾어 가볍게 구속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손쉽게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양 그룹 회장의 자택까지 찾아와 그 식솔들을 체포하다니.

불과 1년 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수사관들은 그렇게 회장의 손자들에게서 서류를 하나씩 빼앗았다.

“여기 은닉 재산 자료들도 있습니다.”

“여기도요.”

수사관들이 각자 회장이 남긴 서류들을 들고 말했다.

“금고가 열려 있습니다. 안에는 서류만 가득합니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안 돼!”

수사관들이 금고로 다가서자 한규가 퍼뜩 정신을 차린다.

가문의 장손으로서 다른 형제나 사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던 그는 금고 안의 서류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금고 안에 남아 있는 서류들은 큰 자산 가치는 없지만, 어찌 보면 그 어떤 자산보다 위력적인 것들이다.

다시 말해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을 구원해 줄 자료들이기도 했다.

“건들지 마! 네놈들이 함부로 손댈 게 아니야! 네까짓 것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한규가 목소리가 찢어지도록 소리쳤다.

사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 서류들엔 수십 년 동안 정계와 법조계의 유력 인사들에게 흘러 들어간 불온한 자금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게 터지면 죽어 나갈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금고 안 서류들은 펼쳐 보지 말고, 그대로 담아.”

그리고 가장 뒤에서 사태를 주관하던 검사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혹시라도 수사관들이 서류를 보지 못하도록 못을 박는다.

“너! 어디 소속이야!”

“중앙지검입니다. 변호사가 필요하시다면 지금이라도 부르시지요.”

아직 젊어 보이는 검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능글맞게 웃으며 전화를 할 수 있도록 호의를 보여 주는 여유까지 보였다.

완벽한 성공이다. 필요한 자료는 전부 손에 넣었고,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구속했다.

이번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는 자신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명백하게도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에서부터 내려온 명령이다.

“쯧쯧!”

검사는 수사관들에 의해 수갑이 채워지고 있는 류 회장의 식솔들을 바라보며 고소를 흘렸다.

그동안 수사관들은 금고 안을 깨끗하게 비웠고, 방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종이 쪼가리 하나까지 챙겨 갔다.

그리고 잔뜩 굳어진 표정으로 조용히 그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성규는 오직 한 사람, 이 방의 주인만이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수사관들에게 미소를 보이며 방안에 비치된 가구들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 주며 안내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 실례가 많았습니다, 사모님.”

그리고 검사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고 인사를 할 때 즈음에는 비로소 이 난장판의 근원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 당신이?”

성규가 눈을 부라리며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모습도 확인한다.

“뭐?”

성규의 모습에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다른 손자들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미망인에게 눈을 돌린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가 꾸민 짓이구나!”

“이런 빌어먹을!”

이윽고 손자들이 할머니를 향해 퍼붓는 욕설이 넓은 침실을 가득 메웠다.

“패륜이네.”

그리고 침실 밖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오며 한마디 내뱉는다.

“어쩌자고 손자들이 할머니한테 욕설을 퍼붓는 건데?”

류 비서가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비난의 말을 내뱉었지만, 침실 안 손자들에게는 그다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성규를 제외하고는 그를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너! 이 자식! 네가 꾸몄구나! 너희들이 작당한 거야!”

그리고 유일하게 한 사람, 류 비서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성규가 분노 어린 외침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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