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86화 (186/363)

186화 위험한 서류

“아쉽지만 내가 꾸민 일 따위 아니야. 미치지 않고서야 유언장을 그대로 두고, 회장님이 남겨 주신 해외 자산까지 검찰들에게 넘길 이유가 뭐가 있겠어?”

미망인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양 그룹 회장의 침실을 습격한 검찰들은 그동안 꼭꼭 감추어 두었던 회장의 모든 서류를 깨끗하게 압수해 갔고, 유언장의 훼손과 회장의 은닉 재산을 이유로 그 자리에 모여 있던 회장 손자들도 체포해 갔다.

몸싸움을 벌인 이들에게는 공무집행방해 명목까지 추가되었다.

과거의 대양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미 대양의 이름값은 바닥으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긴급체포된 손자들은 변호사의 도움으로 이틀 만에 풀려날 수 있었고, 성규는 풀려나자마자 바로 미망인을 찾아온 상황이었다.

“대체 그날의 태도는 뭐였던 겁니까?”

성규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물었다.

검찰이 들어오던 날 미망인은 잠시 놀라는 표정을 보이기는 했었지만, 금세 침착하게 수사관들에게 협력했다.

더군다나 그날 다른 사람들과 달리 미망인은 체포되지도 않았으니,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걸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검찰이 내 방까지 들어왔어.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말이야. 그렇다면 내 집안의 누군가가 그들에게 조용히 문을 열어 준 것이 틀림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너도 봤잖아? 누가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종수 그 자식이 신이 나 있던 것은 보았습니다만…….”

성규는 도통 그녀의 표정을 읽어 낼 수 없었다. 정말로 그날 벌어진 일들과는 관계없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일을 꾸미고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 그녀가 그 일을 꾸며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날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니까.

“그래. 류 비서가 모든 걸 꾸민 거지. 나 원.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나도 아직 멀었나 봐.”

미망인은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당신 짓은 아니라는 거로군요.”

성규는 혹시라도 그녀와 정권 사이에 어떠한 밀약 따위가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대양 그룹의 지분을 넘겨주고, 숨겨 놓았던 해외 재산도 헌납하고, 무엇보다 수많은 정치인과 법조계 인사들에 관련된 비밀스러운 자료들을 넘기는 대가로 무언가를 받아 낸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동안 대양 그룹으로부터 적지 않은 지원을 받아 왔던 정계와 법조계의 유력자들은 이제부터 발 뻗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모두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걸 가지고 간 쪽은 검찰. 그 자료가 누구 손에 들어갈 것인지는 불을 보듯 빤하다.

이번에 새로 정권을 손에 쥔 그자들은 그 자료들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과 관련된 부분을 싹 도려내고, 정적들을 향한 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건 정권으로서는 아주 훌륭한 칼을 손에 넣은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넘겨주는 대가로 미망인이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유산의 떨거지 부분뿐 아니던가?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결국 역시 류 비서 그 녀석이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제 완전히 끝나 버렸어요. 유언이 공개되면 지분도 날아갈 테고, 해외의 재산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게 말이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힘없이 대답한 미망인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위스키병을 들고 통째로 입에 가져갔다.

* * *

“잘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검찰에서는 지금 회장 자택에서 압수해 온 자료와 우리 측에서 확보해 놓은 자료의 교차 검증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대양 그룹이 지난 40여 년 동안 은닉해 놓은 수조 원대에 달하는 해외 자산을 추적해 전부 되찾았다는 검찰의 발표가 날 겁니다.”

“정권에서는 무척 반기겠군.”

“그렇죠. 사상 최대의 비리를 밝혀 낸 거니까요. 사람들이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당분간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겁니다. 더군다나 경제도 호전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전부 회장님 덕분이기는 하지만요. 흐흐.”

김환이 미국까지 날아와 유진에게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해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는 존 브래넌이 작성한 대양 그룹의 해외 비자금에 대한 자료를 검찰에 제공하고, 그쪽에서 벌이고 있는 수사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전달받고 있었다.

“대양 그룹 회장의 사망 소식도 내일쯤 나갈 예정입니다. 유언장도 공개될 거고요.”

“유언장은 전부 찢어 버렸다 하지 않았나?”

“그래도 조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 복원할 수 있었던 모양입니다. 회장의 유언장을 작성한 변호사도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밝히기로 했고요.”

“그럼 정말로 회장 일가의 지분을 회사에 헌납하는 건가?”

이미 검토를 마친 듯, 김환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욱 좋은 것은 회장이 남긴 유언장을 훼손한 것 때문에 그 손자들이 유산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지요. 망자의 유언장을 훼손한 경우 유산 상속 권리가 박탈됩니다.”

“그래?”

“그것 때문에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이 전부 자기는 상관없는 일이라 주장하고 있답니다. 남은 찌꺼기라도 챙겨야 하니까요. 한때 재벌그룹의 후계자라고 힘주고 다니던 인간들이 건물 하나라도 받아 내기 위해 저들끼리 추잡하게 싸우는 모양입니다. 그날 손에 찢어진 유언장을 들고 있던 녀석은 꼼짝없이 주범이 된 거고, 남은 녀석들은 그걸 말리려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장하고 있답니다.”

“그러면 남은 재산은 대부분 그 여자 차지가 되겠네?”

유진이 미망인을 언급하자, 김환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되겠지요. 뭐, 딸들도 있고 하니 분배가 조금 복잡해지기는 하겠더군요. 참! 그 일을 꾸민 사람이 언제고 한번 회장님을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더군요.”

“류종수라고 했었나?”

“예. 회장의 숨겨진 아들이라고 하더니, 꽤 눈빛이 무서운 사내입니다.”

“그 집안 남자들은 정말 하나같이 그런 모양이야. 욕심으로 가득하지.”

“단순한 욕심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회장 일가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으니까요.”

김환은 류 비서가 자신을 찾아와 거래를 제안했을 때의 일들을 잠시 머리에 떠올리며 말했다.

류 비서는 미망인이나 성규가 자신을 빼놓고 금고를 열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굳이 회장의 은닉 재산을 분배하는 데에 자신을 끼워 둘 필요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럼에도 류 비서는 성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비밀번호를 찾아 오도록 종용했다.

그리고 성규가 해외로 떠난 사이 김환에게 접촉해 그 사실을 알리고 함정을 준비해 두었다.

그렇게 성규가 부친에게서 비밀번호를 찾아 돌아온 뒤. 미망인은 류 비서에게 외부에서 할 일을 시켰고, 류 비서는 그날이 둘이서 금고를 열 날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회장의 다른 손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검찰에도 알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도록 만들어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던 것은 전부 류 비서의 수완 덕분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떨겠네요. 대양 그룹 회장의 금고에서 나온 그 자료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런데…… 지금 정권에 그렇게 큰 흉기를 들려 주는 것이 과연 괜찮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김환의 의견은 꽤 타당했다. 지금 정권을 잡은 새 대통령은 그다지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주 노련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협잡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5년 동안 한국 경제는 유진의 투자 덕분에라도 고성장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과실을 따 먹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자에게 대양 그룹의 비밀 파일이 손에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짐작하기 힘들다.

“흉기라. 맞는 말이지.”

유진도 동의했다. 그 파일들은 금고에 들어가 있어야 안전하다.

대양 그룹 측에서도 그걸 사용하면 자신도 다치기 때문에 결코 휘두를 수 없는 흉기였다.

죽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노출할 수 없는 흉기.

회장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걸 사용하기보다는 차라리 대양 그룹의 지분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정권은 이야기가 다르다. 대통령으로서는 아무런 부담도 없이 그걸 마구 휘두를 수 있다.

“조금 위험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가는 사람은 아니니까.”

사실 유진의 지난 삶에서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도 아니다.

이번에 유진이 500조 원에 달하는 엄청난 투자를 약속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정권이 교체되었을 터이니까.

그렇기에 그가 한국의 권력을 완벽하게 손아귀에 넣었을 때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는 유진도 예측할 수 없었다.

“괜히 엄한 사람만 키워 주는 꼴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걸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유진은 여유 있게 웃으며 오히려 김환을 달랬다. 그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 * *

“그래서, 아무리 뒤져 봐도 15년 전의 파일들이 없다는 말인가?”

그 시간, 청와대에서도 아주 은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네. 지금 확보한 파일은 전부 2002년 이후의 내용뿐입니다.”

쾅!

비서실장의 보고에 대통령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대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 건가? 그자의 비밀 자료들이 거기 전부 숨겨져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저희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막상 열어 보니 거기에 들어 있던 것은 2002년 이후의 자료들뿐이었습다.”

“누가 빼돌린 거 아니야? 그날 나갔던 검사와 수사관들 전부 재조사해 봤어?”

“예. 틀림없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들만 보냈었고, 그 자리에서 전부 봉인해서 가지고 올 때까지 중간에 샐 곳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유출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대통령의 뺨은 분노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분노라기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무조건 확보해야 할 자료입니다.”

대양 그룹이 수십 년 동안 정치계에 헌납한 자금들을 자세하게 기록해 둔 그 서류는, 그들에게는 그날 그 자리 있던 것 중 가장 중요한 물건들이었다.

특히 이제 겨우 초선과 재선 무렵이던 대통령의 이름도 쓰여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이전인 그가 겨우 초임 판사였던 시절부터 대양에서 접대받은 내용까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그가 대양과 관련된 재판에서 내린 판결과 연관된다면 더더욱 치명적이다.

“그 녀석들은 뭐라고 하던가?”

대통령이 말하는 이들은 대양 그룹 회장의 식솔들이다.

“그날 처음으로 금고를 연 것은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모두 그 안의 서류는 살펴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전부 다른 방에서 물어보고 이중, 삼중으로 확인한 것이라 틀림없습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쩌면 파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너무 위험한 것이니…….”

“그게 말이 돼? 그 인간이 그럴 인간이야?”

“아니면 다른 장소에 보관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곳 어디?”

대통령이 소리치듯 물었다.

“그건 저희도 잘…….”

세상 누구도 모르는 것을 비서실장이 알 리 만무했다.

“그 여자는? 그 여자는 그날 체포하지 않았다고 했었지?”

“예? 아, 그 여자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거라서…….”

우물쭈물하며 대답하는 비서실장의 말에 대통령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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