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87화 (187/363)

187화 거대한 음모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 거야?”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노한 음성으로 질책했다.

“그걸 어디 숨겨 놓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을 사람이 그 여자 아닌가? 어째서 그 여자만 빼놓고 체포해 왔단 말이야?”

검찰이 조금 무리를 해서 대양 그룹 식솔들을 전부 체포해 온 이유는 회장이 숨겨 놓은 해외 자산 따위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유언장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처음부터 목적은 대통령의 치부가 담긴 서류에 있었다.

어떻게든 그 서류를 안전하게 확보하고 혹시라도 빠진 것이 있다면 그들을 추궁해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그날 체포된 회장의 손자들은 전부 다른 방에서 각자 검사의 취조를 통해 알고 있는 금고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검찰은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 구치소에 갇혀 있는 회장의 장남과 해외에 도피 중인 삼남 두 사람뿐이며, 그날 금고가 열리기 전까지는 회장의 부인조차 열지 못해 전전긍긍해 왔다는 사실을 순순히 자백했다.

회장 부인은 금고 안의 전부를 차지하고 싶어 했지만, 비밀번호를 모르니 삼남의 아들인 성규를 포섭해 둘이 몰래 그걸 열어 보려 했던 모양이다.

성규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회장 자택으로 향했던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회장 부인도 서류의 남은 부분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사태가 엄중하니만큼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

하필 그 여자만 체포하지 않아 제대로 취조하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다.

“처음 그 일을 알려올 때부터, 그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그런 조건을 내놓았단 말이야?”

“그거야…… 양 의원이 중계하긴 했습니다만…… 양 의원 뒤엔 SS파트너스가 있고, 그 뒤에는…….”

비서실장이 잔뜩 주눅 든 목소리로 말을 흐렸지만, 대통령은 SS파트너스라는 말 다음에 누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 그 사람인가?”

노기가 가라앉고, 이제는 섬찟한 눈으로 비서실장을 바라보며 대통령이 물었다.

“네. 대양 그룹의 해외 자산을 그렇게까지 섬세하게 조사해 놓을 기관은 국내에는 없습니다. 역시 미국 정부가 뒤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대통령과 비서실장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강 회장을 단순히 월가의 투자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대통령은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면 그렇습니다. 솔직히 외국인이 단순하게 투자만으로 몇 년 사이에 그렇게 큰 부를 이루어 낸다는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강 회장이 사실은 꼭두각시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꼭두각시라니?”

“강유진이 재산을 불려 온 과정을 보면 각국의 정세를 기가 막히게 파악해 불가능하다 여겨지는 투자를 계속해서 성공시킨 것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런 정세를 일개 민간인이 알아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두 번이라면 운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매번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는 것은 각국의 내밀한 정보에 정통한 기관이 뒤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 정도의 정보 기관을 가진 곳은 오직 미국뿐입니다.”

“그래서, 미국 정보 기관이 그의 뒤에 있다는 건가?”

대통령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쩌면 단순하게 정보를 주는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일을 꾸미고 그걸 토대로 투자에 나선다면 그의 성공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그의 행보는 미국 행정부와 아무 관계도 없지 않았나?”

“그러니까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저희 분석으로는 어쩌면 트럼프의 당선까지도 미국 행정기관 내 매파들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음모론치고는 너무 황당하군.”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대통령이 헛웃음을 흘렸다.

“단순하게 음모론이라 보기에는 그의 행보가 너무 의심스럽습니다. 미국 정보 계통의 거목인 존 브레넌 전 CIA 국장을 비롯해 다양한 정보 기관에서 근무하던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그의 주변에 포진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현직 법무부 장관이나 백악관 비서실도 그와 연관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렇게나…….”

“강유진의 주변에 대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입니다. 그자는 미국의 행정부, 정보부, 사법계, 그리고 상하 양원의 전현직 거물들과 아주 광범위한 커넥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서는 미국 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조직이 존재하고, 그들이 지닌 정보와 영향력으로 강유진을 통해 급속하게 자금을 긁어모으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터무니없이 거창한 음모론이 튀어나왔지만, VIP는 물론이고 정계에서 오랜 시간을 굴러온 비서실장까지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그 음모론을 말하는 사람은 외부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3비서관이란 직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상 국정원과의 연결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국정원의 모든 정보를 받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그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말은 사실상 국정원의 공식적인 의견으로 보아도 된다.

“왜 그런 말을 이제야 하는 겐가?”

얼굴 가득 주름을 만들고 있던 대통령이 묻는다.

“사실인지 확인되지 않은 분석이기 때문입니다. 또 저로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조금 더 공신력 있는 정보를 확보하고 제대로 보고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음모론으로 각하의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네. 터무니없는 이야기로군. 터무니없어…….”

대통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국의 경제를 한 손에 쥐고 있으며, 정치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이 미국 행정부 내 어떤 비밀스러운 조직의 꼭두각시라니.

“말이…… 되는군.”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무런 배경도 없는 한국인이 뉴욕으로 건너가서 겨우 3, 4년 만에 세계 제일의 거부가 되었다는 말보다, 차라리 미국 행정부 조직의 꼭두각시라는 말이 더욱 그럴듯하다.

그러고 보면 요 몇 년 동안 세상의 흐름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영국의 브렉시트부터,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까지.

어느새 대통령은 그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서류들은?”

“금고에 겨우 10여 년 치의 자료만 있었다는 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회장이 달리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그쪽으로 넘어갔다고 보아도 무방할 겁니다.”

“역시 그런가?”

대통령이 조금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물었다.

“네. CIA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최근 국내 CIA 지부가 조금 어수선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작전 팀 하나가 움직였다는군요.”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이제 보고하나!”

비서실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보고 드리기가…….”

“그게 왜 사소한 거야?”

“됐네. 외국 정보팀 하나 움직이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할 수야 없겠지.”

대통령은 조금 전 잔뜩 노기를 발산하던 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어쩐지 잠깐 사이에 10년은 나이들어 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중요한 서류들은 전부 미국에 넘어갔다는 말이로군.”

대통령의 지친 표정을 본 비서실장이 대신 물었다.

“최악의 경우 그렇게 생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최악은 아니지. 그게 공개적으로 노출되었을 때보다야 낫겠지.”

“미국 정부나 강유진 측에서 그걸 빌미로 무언가를 요구해 올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민정수석실의 3비서관이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도 그렇게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그것까지 손에 쥐고 있으면…….”

비서실장이 참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제는 그쪽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대통령이 더욱 핼쑥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 나라에 정부가 세워진 이래로 미국 정부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여하튼 그건 염두에 두고, 그래도 모르니 좀 더 알아보도록 하세.”

대통령은 더는 회의를 주재할 기력이 없는지 살짝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두 심복이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 대화를 이어 갔다.

“좀 더 파 봐. 그래도 국정원에 미국 쪽 커넥션이 꽤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합니다만, 요 몇 년 동안 꽤 많이 망가진 모양이더군요. 지난 정권에서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간 게 없는 모양입니다.”

“국정원장은 뭐라나? 자네가 지금 한 이야기가 맞다 하던가?”

“솔직히 외부에서 미국 내 내밀한 일들을 어떻게 제대로 파악하겠습니까? 하지만 미국 쪽과 연관 있는 요원들 말로는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랍니다. 미국 내 정보부처에서도 그 강유진에게 줄을 서려는 움직임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꼭두각시라며?”

민정수석실 비서관이 작게 고개를 젓고는 대답한다.

“꼭두각시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입니다. 확정적인 것은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그자가 현 대통령과 그 사위를 언제라도 만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미 행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처음에는 얼굴마담이었다가, 지금은 오히려 단순한 대리인을 넘어서는 위치가 아닌가 하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골치 아프네. 여하튼 더 파 봐. 나도 이쪽에서 더 알아볼 테니.”

“예. 알겠습니다.”

* * *

“이게 현재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파일이란 말이지?”

존 브레넌이 가져온 서류의 양은 작은 책꽂이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이 서류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들여오기 위해 존 브레넌은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해 주한미군 군용기까지 사용해야 했을 정도였다.

정상적인 루트로 이런 서류를 옮기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인천 공항이나, JFK 공항에서 누군가 이것들을 들춰 보기라도 했다면 난리가 날 것이 불을 보듯 훤한 일이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존.”

유진은 존에게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걸 들여오기 위해 존 브레넌이 직접 한국으로 건너가 주한미군 오산 기지에서 뉴저지의 한 군용 공항까지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챙겨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의를 표해야 하겠지만, 존 브레넌이 한 일은 그 이상이었다.

성규가 터키의 공항에서 환승하지 않고 사라진 사실을 알자마자 존은 바로 에게해에 은거하고 있는 성규의 부친을 떠올렸고,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별장에 드나드는 여자를 포섭하도록 지시했다.

유럽의 정보팀은 그녀에게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도청기 몇 개를 건네주고 별장의 중요한 곳들에 숨겨 놓도록 요구했고, 혹시나 하고 시작한 작전은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겨우 1만 달러로 얻어낸 대가라기에는 너무 대단했단 말이지요.”

1만 달러. 고작 그만한 돈을 넘긴 것으로 유진은 성규와 그의 부친의 대화를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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