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삼인성호(三人成虎)
- 혹시 미국에 있는 어떤 특별한 조직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있으세요?
“조직?”
- 네. 그 녀석이 말하기로는 미국의 정보부를 포함한 행정부는 물론이고 금융계까지 아우르는 굉장히 은밀하고 거대한 조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있다더군요. 실질적으로 미국을 장악하고 있는 그림자 정부(Shadow Government)에 가깝다고…….
“무척이나 뜬금없는 소리로군.”
- 저도 그렇다니까요. 비밀 조직이라니. 우습지 않아요?
“친목 모임이라면 또 모르겠어. 미국은 워낙 사교 모임이 많으니까.”
유진이 어이없다는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 여하튼 회장님은 알고 계신 게 없으신 거로군요.
“알고 있는 게 없다기보다는 그런 조직 자체가 공상이라는 말이지. 타블로이드에서나 다룰 만한 음모론 아니야?”
- 그러게요. 하지만 국정원 측에서는 거의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에요. 더군다나 회장님도 그 조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어요. 괜히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제 반응을 살펴보더군요.
“하하. 재미있네. 그러니까 국정원에 있다는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게 의도적이었다는 말인가?”
- 예. 틀림없어요. 제가 눈썰미가 있는 편이잖아요. 하하. 여하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국정원에서 그런 음모론을 믿고 있다는 게 웃기기는 하더군요.
김환이 보고하고 있는 국정원 내부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유진이 오히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존 브레넌은 ABC를 위해 자신이 현직에 있을 때 구축해 놓은 커넥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우선은 그가 헤드를 맡았을 때의 직원들 다수를 영입했고, 그 직원들은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 아주 폭넓은 교류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교류망에는 각국의 정보기관에 재직 중인 현역들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유진이 직접 관여한 기업 중 경제 관련 정보 수집 기관인 ABC(아메리카 비즈니스 센터)가 가장 많은 자원을 사용했고, 또 가장 광범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업들을 대상으로 각국의 정세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미래 전략을 세우는 데에 도움을 주는 컨설팅 회사로서 ABC는 세계 각국에 진출해 있다.
그리고 대략 50여 개 나라의 정보기관과 이런저런 방식의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통적으로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어온 동맹국들에서 그러한 활동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국가정보원도 미국의 CIA와 오랜 교류가 있어 왔고, 국가정보원의 전현직 요원 중에는 존 브레넌 휘하의 직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온 사람도 꽤 많은 편이다.
이런 일련의 커넥션을 통해 유진은 국가정보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 아마도 청와대에서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 김환이 말하고 있는 상황은 유진 자신의 의도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기도 하니 더욱 그러하다.
- 여하튼 국정원 내부뿐 아니라 정부 당국에서도 미국 내에 그런 조직이 존재한다 여기는 모양입니다. 대체 언제 적에 통용되던 음모론이 지금도 먹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김환은 시종일관 유쾌하게 한국 내에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보고했다.
“뭐. 그쪽에서도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모양이지. 하기는 나도 모르고 있어야 제대로 된 비밀 조직 아니겠어?”
유진도 시치미를 뚝 떼고 김환에게 대꾸했다.
서로 신뢰하는 사이라 해도 모든 정보를 공유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 자신이 국정원에 그러한 엉뚱한 정보를 퍼트렸다는 사실을 김환이 알고 있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은 없다.
유진은 한국 정부에 자신이 무척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영향력이라는 것이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현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어느 때라도 한국의 정치권에서 유진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정해야 했다. 특히 청와대의 주인이 그러하다.
어느 미친 대통령이 그 나라에 수천억 달러라는 막대한 투자를 약속하는 사람을 적대적으로 대하겠냐만, 그건 결코 확신할 수 없는 일이고 확신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특히 한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여느 민주주의 국가의 국가원수에 비해서도 상당히 큰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는 오직 미국 대통령 정도가 한국의 대통령에 비견될 만한 권한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미국은 주의 연합이라는 특징과 오랜 민주주의의 경험 때문에 각 정치 세력 간의 견제가 충분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런 정치적 견제나 권한의 분립이 명확하게 이루어져 있다 보기 어려웠다.
대통령의 지시 하나만 떨어져도 모든 권력기관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찍어 놓은 대상을 어렵지 않게 파멸시킬 수 있다.
무소불위와도 같은 재벌그룹 사주들이 정치권에게만은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미국이라면 기업의 대표가 특정 정치인이나, 심지어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선 일개 기업인이 대통령을 조금이나마 비판하고 나서는 것은 금도를 한참 넘어서는 일이다.
해당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이루어지고, 검찰이 전방위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가고, 행정기관에서 필요한 허가를 내주지 않는 등 감수해야 할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만일 대통령이 개인적인 사감으로 국가 경쟁력이나 개인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유진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한국은 대통령의 연임이 불가능하니, 임기를 일정 기간 넘어가면 지지율에 상관없이 엉뚱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
그런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지만, 언제고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한국의 국정원 내부에서 보스의 존재에 대해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더군요.”
김환의 보고가 끝난 후 한국 정부와의 관계 설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유진에게 존 브레넌이 한 가지 힌트를 주었다.
“약간 몽상가적이고, 강박 증세가 있는 친구인데, 전부터 미국 내에 특정 집단이 존재하고, 그 집단이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암중에서 지배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답니다.”
“그런 사람이 국정원에 있다니 놀랍군요.”
“사실 어느 정보기관이라도 그런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어두운 곳을 살피다 보면 자칫 위험한 상상을 하기 쉽거든요.”
존 브레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심지어 미국의 정보기관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여느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을 배제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정보를 모으고, 취합과 분석을 하는 와중에는 전혀 의외의 사실이 도출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남과 다른 특이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한둘 있는 편이 다양한 결과를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국정원의 그 친구도 그런 종류의 분석을 내놓는 인물인 모양이다.
“그 친구가 이번에는 미국 행정부 내의 어떤 비밀스러운 결사가 보스를 지원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은 모양입니다. 그 결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보스에게 알려 주어, 보스가 지금까지 투자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거지요. 하하. 솔직히 저도 그 분석을 보고 정말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입니다. 정말 세계를 아우르는 조직에서 제공한 정보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늘 성공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존 브레넌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물론 그런 음모론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자신이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정밀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지요. 정보기관이란 것은 언제나 한정적인 분석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데 말입니다.”
세계 제일의 정보기관이라는 CIA도 9·11사태를 예측하지 못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삽질로 유명하다.
또한, 9·11 이후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미국의 정보기관 공동체도 각 정보기관 사이의 알력과 너무 많은 정보기관의 난립으로 제대로 된 정보 수집과 분석에 종종 실패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보기관은 틀림없이 국가나 기업의 운영에 필수불가결한 기관이지만, 그들이 내놓는 정보를 무한하게 신뢰할 수는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존 브레넌이 이끄는 ABC의 정보에 대해서도 유진은 어느 정도까지만 믿고 있는 편이다.
다행히 유진에게는 그걸 뒷받침하고도 남을 만한 미래 지식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그런 비밀결사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한국 정부로서는 참 곤욕스럽겠군요.”
유진은 그 음모론이 마음에 들었다.
청와대의 주인이 어느 순간에 유진에게 적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조직에 적대할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음. 그렇겠군요. 확실히 보스가 그런 조직의 일원이라면, 섣불리 보스에 적대할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요.”
존 브레넌은 유진의 말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세계 최고 강대국의 정보기관 수장으로 오랜 시간을 복무할 수 있던 데에는 보스의 심중을 알아차릴 능력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재미있는 일이로군요. 음,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오히려 유진보다 더 의욕적으로 움직였다.
존 브레넌의 아래에는 국정원의 필드 요원은 물론이고, 분석 요원들에서 조직의 중추를 이루는 중견 간부들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커넥션을 지닌 사람이 몇몇 있었다.
한편으로는 주한 미국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는 현직 CIA 요원들마저도 오랜 시간 국장을 역임해 온 존 브레넌의 옛 부하들이다.
그런 인사들이 국정원의 요원들과 접촉하며 그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었고, 전현직 CIA 요원들에게서 흘러나온 정보는 국가정보원에게 가장 믿을 만한 정보라 판단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음모론을 사실로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미국의 행정부와 관련된 사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보고가 올라오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한미국 대사관의 정보 담당 요원이나, 워싱턴에 파견된 요원들이 올리는 보고가 쌓여 가면서 분석팀이 먼저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위쪽에서도, 더 위쪽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국정원의 수뇌부에서 그런 필드의 판단을 받아들인 것은 작전이 시작되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신중하기로 유명한 신임 국정원장까지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던 데에는 역시 유진이라는 존재의 특이성이 가장 컸을 것이다.
사실 유진의 성공은 단순히 운이나 능력만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떤 비밀 조직에서 뒤를 봐 주고, 특정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유진의 개인 자산은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국가 GDP에 육박하고 있었고, 그가 운용하는 자산은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인 영국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일개 개인이, 그것도 1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룩한 업적이기에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