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90화 (190/363)

190화 마천루

처음 류 회장의 비밀 서류를 손에 넣게 되었을 때, 유진은 그걸 완전하게 자신의 비밀로 해야 할지, 아니면 정부와 공유해야 할지 고민했었다.

만일 정부와 공유한다면 회장의 비밀 서류 때문에 어떤 종류의 알력이 생길 것을 고려해야 했다.

유진이 대양 그룹 회장의 뇌물 자료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서로에게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게 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유진으로서는 당장 그 서류를 사용해 풍파를 일으킬 의도는 없지만, 상대가 온전히 그렇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쨌든 자신의 가장 큰 치부를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편으로 지금의 대통령은 그다지 마음이 넓은 사람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한국의 많은 법조인이 그러하듯, 그도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서민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엄격한 판결을 내렸고, 대기업이나 같은 법조인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판단을 보여 왔다.

적지 않은 법조계 인사들이 그러하듯 그도 자신의 판단에 깊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이런 대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상대를 압박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상당히 하책에 불과하다.

일국의 대통령을 협박한다거나, 혹은 대치 상태를 이어가는 것은 어느 쪽도 유진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니 조용히 회장의 자택에 들어가 필요한 서류를 챙기고 오는 쪽이 가장 쉽고 효율적인 일이다.

하지만 유진은 회장의 금고 안에 들어 있는 유언장과 해외 비자금이 공개되기를 원했다.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지금껏 저질러 온 전횡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그들 전부를 파멸로 몰아넣을 절호의 기회였다.

다행히 유진에게는 마침 좋은 패가 있었다. 국정원을 통해 진행하고 있는 작전이 성공적이라는 존 브레넌의 보고가 올라온 참이다.

이제 유진은 더 이상 일개 기업인이 아니라, 미국 정부를 장악한 어떤 조직의 일원으로 보이게 되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자신의 치부가 담긴 서류가 기업인의 손에 있는 것과 미국의 행정부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청와대에서도 엉뚱한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진의 의도는 아주 훌륭하게 수행된 모양이다. 검찰에서는 대양 그룹 회장의 금고에서 사라져 버린 서류를 추적하기를 포기했다.

청와대에서 유진이나 SS파트너스에게 압박을 하려는 시도도 보이지 않았다.

유진이 머리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위험한 조직이 자신들의 치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 * *

“대양 그룹이 감춰 놓은 해외 자산이 10조 원이 넘는다더라. 지난번에 대양중공업 공매도로 7조 원쯤 날려 먹었는데도 아직 5조 원도 넘게 남아 있었다는데? 기가 막히네.”

“그러니까 말이야. 해외에 숨겨 놓은 돈이 대양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보다 더 많았다네.”

“하여튼 무지막지한 놈들이야. 대체 얼마나 해 처먹은 거야?”

대양 그룹 회장 저택에서의 사건이 기사화된 날부터, 한국인들의 화제는 단연 그 일로 모여졌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대양 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나마 회장이 죽을 때가 되어서 지분을 회사에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자식들이 그걸 훼손했다니…… 그놈들이 더 지독한 놈들이야.”

비난의 화살은 이미 사망이 발표된 회장을 넘어 그 자식과 손자들에게로 향했다.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니야? 유언장만 없으면 5조 원이 떨어지는데, 나 같아도 찢어 버리고 만다.”

물론 정서적으로 납득이 간다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그럼 회삿돈 수십조를 횡령하고, 유언장까지 없애 버리는 게 옳다는 거야?”

“옳다는 게 아니라…… 그럴 만도 하다는 거지. 잘했다는 게 아니고.”

“아주 꼴좋다. 그러니까 해외 비자금도 전부 털리고, 주식도 빼앗겼다는 거지? 그놈들 이제 완전히 거지꼴 되겠네.”

“거지꼴은 무슨. 그래도 지금까지 모아 놓은 돈이 얼마나 많겠어?”

“그렇기는 하네. 하, 그렇게 하고도 남은 평생 호화롭게 살아가겠지…….”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시민들의 여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처럼 그 손자들 대가 남은 평생을 호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 회장 자택에 모여 있던 손자들은 문서손괴죄의 혐의 등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지금의 상황으로는 최대한의 양형이 기대되고 있었다.

게다가 유언장을 훼손한 행위로 인해 회장의 다른 재산에 대한 상속권까지 박탈당해, 최소한도의 유산도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회장의 아들들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자산이나 지분까지 압류된 것은 아니니, 세상 사람들의 말처럼 여전히 그들은 일반인과는 비교하기 힘든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진짜로 차원이 다른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가던 그들이 조부에게서 물려받을 수 있는 모든 유산을 물려받지 못하게 된 것은, 일반인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박탈감을 남겨 주었다.

한편, 한국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스 법원에서 류근수 사장의 인도를 허가했습니다.”

에게해의 멋진 별장에서 여자들을 잔뜩 불러 놓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대양 그룹 회장 삼남의 위치를 파악한 한국 검찰은 외교부를 통해 그리스 정부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고, 그리스 정부는 그다지 큰 알력 없이 바로 인도해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로써 회장의 남은 두 아들 모두가 한국의 교도소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할 것이 확정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여론은 대양 그룹 사주 일가에 대한 일말의 동정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변호사를 쓴다 해도 그들이 남은 일생을 온전히 교도소에서 보내야 할 것은 명백했다.

“손자 열 명이 문서손괴죄로 재판을 받을 예정입니다. 그중 여섯은 대양 그룹 계열사에 근무하는 중 행한 횡령에 대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혐의가 입증되는 대로 추가 기소가 있을 겁니다.”

대양 그룹 계열사를 점령하고 있는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 그리고 유진이 파견한 다국적 회계사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역량 대부분을 지난 시간 동안 사주 일가들이 행한 다양한 범죄 행위의 증거들을 찾아내는 것에 집중해 왔다.

수백 명에 달하는 전문가들의 손길은 회계 장부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는 증거들을 낱낱이 파헤쳐, 완벽한 증거로 검찰에 보내졌다.

“사위나 딸들도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기소될 겁니다. 당장에 그 딸들만 해도 회사에 출근도 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직위로 급여를 타 갔으니 엄벌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그룹 관계사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미성년자나 학생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든 범죄 혐의를 받게 되겠지요.”

그렇게 대양 그룹 사주 일가가 화려한 몰락을 향해 달려가는 시간, 유진은 다음 행보를 이어 가고 있었다.

“한국의 주요 도시 다섯 곳에 중점 교육기관을 설치하겠습니다.”

SS파트너스의 김환은 기자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계획을 발표했다.

“기존에 공언했던 대로, 이 교육기관들에서는 국내 인력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데 필수적인 교육을 받고 해외 취업까지의 모든 관리를 받게 될 겁니다. 교육생들의 편의를 위해 다섯 개 도시 중심부에 각각 대형 교육 빌딩을 건설할 계획입니다. 모두 60층 이상으로 각기 1만 명 이상의 학생이 교육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육기관의 건물로는 상당히 높은 빌딩이로군요.”

“아마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가 가지고 있는 가장 높은 교육용 건물의 타이틀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각 시도와의 협의가 이미 끝났습니다.”

유진은 기왕 손을 대는 거라면 무엇이든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를 위해 교육용 건물로는 어울리지 않을 초고층 마천루를 선택했다.

서울을 포함한 전국 대도시의 중심부에 건설될 이 건물들은 각 도시의 사방 어디에서든 눈에 들어올 것이고, 도시의 시민들은 이 건물들을 볼 때마다 유진을 떠올릴 것이다.

특히 서울에서는 강남 한복판에 80층 규모로 세워질 예정이다.

상업용 건물이나 주거용 아파트였다면 300m가 넘는다고 해도 큰 화제는 되지 않겠지만, 교육용 건물이 이렇게나 높게 올라가는 일은 한국에서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눈길을 끌 것이다.

유진은 이 교육기관을 미국에서 자신을 뒷받침해 줄 인재들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로 만들 계획이었다.

당연히 일반적인 교육기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투자가 이어질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멀리서 이런 빌딩들을 보며 장래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했다.

“SS파트너스는 해외의 다양한 기업들과 연계해 내년부터 적어도 매년 수만 명 규모의 신규 해외 일자리를 창출해 한국의 젊은이들이 세계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해외 취업이라면 주로 강 회장님께서 투자하신 기업들이겠군요?”

“물론 그런 기업들도 있습니다만, 그 외에도 아주 다양한 기업들에서 한국의 인재들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한국의 인재들이야 일 잘하고, 열심히 하는 걸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한국 근로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는 게 사실 아닌가요? 하하.”

“그런데 한국의 유능한 인재들이 전부 해외로 빠져나가면 한국 기업들은 어디서 사람을 뽑습니까?”

얼핏 합당해 보이는 지적에도 김환은 웃으며 대답했다.

“좋은 인재를 원한다면 합당한 급여를 지불하면 됩니다. 당장에 미국 기업의 70%만 준다고 해도, 굳이 30% 더 받겠다고 외국에 나가려는 사람보다 차라리 남아 있겠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벌써 제일이나 다산에서는 직원들의 급여를 앞으로 5년 동안 매년 대폭 상승하기로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일이나 다산 그룹은 강유진 회장님으로부터 매년 수십 조에 달하는 투자를 유치해서 그런 방법이 가능하겠지만, 다른 기업들의 상황은 다릅니다. 이래서는 한국에 오직 제일과 다산 그룹, 그리고 SS 세 개의 그룹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라면 지금도 좋은 인재를 확보하기 너무 어렵다는 소리가 많은데,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큽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좋은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더 높은 급여를 지불하고, 더 나은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다른 어떤 나라에 비해서도 월등한 교육을 받고, 근면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우를 못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까? 하루 여덟 시간이 아니라 야근에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하는 수많은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착취해 온 것은 아닐까요? 중소기업이라고 당연히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급여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환의 목소리는 당당했고, 기자들 사이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