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동량(棟梁)
“정말로 그 미셸 루비나로군요.”
“알고 계시니 다행이로군요. 앞으로 10분 정도 뒤에 도착할 듯합니다.”
유진이 알고 있던 대로 후지타 유아야는 이미 이 시점에서 미셸에게 빠져 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이 대략 3, 4년 뒤 정도의 일이라 이때 벌써 관심이 있었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는데, 예상보다 일이 잘 풀리려는 듯했다.
“오! 미셸! 정말로 미셸 루비나를 만날 수 있다니, 정말 강 회장님을 뵈러 온 것이 내겐 최고의 행운이로군요.”
“그렇게까지 반가워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흥분했네요. 물론 강 회장님을 이렇게 뵐 수 있는 것이 제게는 가장 큰 행운입니다. 하하!”
나름 예의를 차리겠다며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지만, 후지타 유아야는 자신의 얼굴에 가득한 행복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학창시절부터 좋아하던 배우였습니다. 미국에 와 있는 동안 그녀의 영화는 전부 찾아다니며 보고는 했었지요. 참 멋진 배우입니다.”
신이 난 후지타는 자신이 얼마나 그 여배우에게 빠져 있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순수하다는 평을 받을 만한 남자였다.
솔직히 정치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마음속에 품은 것을 감추지 못하고, 정치적인 수사를 사용할 줄 모른다.
그러니까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리 똑똑하지 않은 유쾌한 친구이다.
“참 아쉬운 일이지요. 10년 전 영화에 한 편 출연한 뒤로는 오랜 시간 동안 쉬고 있어요.”
후지타의 말에는 가감이 없다. 말이 꽤 많은 편이지만, 내실은 없는 편이다.
사실 연예인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재질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잘생기고, 수다스럽고,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떠들어 대는 매력적인 남자이다.
하지만 정계에서의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현시점에서 국민들이 관심 있어 하는 시사 문제에 대해 심도 있는 의견을 내놓지도 못하고, 솔직히 그다지 관심도 없어 보였다.
만일 부친이 일본인들의 큰 사랑을 받아 온 수상이 아니었다면 절대 정치계에 나설 일도, 내각에 오를 일도 없는 사람이다.
그가 정치인이 된 것은 틀림없이 일본의 영화계나 연예계, 그리고 일본의 정계에 있어서도 그리 축복할 만한 일은 아니리라.
이런 남자가 일본의 정치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유권자들이 그만큼이나 자국의 정치인들에 대해 무신경하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정견 한번 내 본 적 없는 이 미남 배우는 현재 선거가 있을 때마다 일본 집권당에 수백만 표를 끌어다 줄 만큼 대단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2선 의원치고는 당내에서 꽤 큰 입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아 온 후지타 수상의 후원을 등에 입고 정계에 입문해서 단지 그의 외모 때문에 선거장에 나서는 여성 유권자들의 표를 끌어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뒤에는 일본 정계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차기 수상으로 거론되기까지 한다.
이미 당내에서는 그의 부친 계파에 속했던 의원들이 이젠 젊은 후지타를 미래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모여 있다고 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정계는 파벌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대개 파벌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인기와 재력, 그리고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혈연 또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상 전국 시대 전국의 다이묘들이 합종연횡하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후지타 유아야는 그런 파벌 하나를 장악할 만한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의 정치적 자질이 조금 많이 모자란 탓에 그런 배경을 지니고서도 정작 큰 정치인으로 성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점일 것이다.
유진은 그런 후지타가 앞으로 일본 정계에서 원래의 역할보다 훨씬 더 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지금의 후지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후지타 유아야에게 부족한 무언가는 사실 그리 어렵지 않게 채워 줄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야 소질이 부족하다지만, 후지타는 훌륭한 연기자였다.
그러니 그에게 진정한 정치인으로서의 소양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정치인을 연기하는 배우의 역할을 맡기면 해결될 것이다.
어차피 유권자들은 진정한 정치인과 정치인을 연기하는 배우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진짜 정치인보다 멋진 정치인을 연기하는 배우를 훨씬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
“사실 제가 배우의 길에 들어선 것에는 미셸의 영향이 컸어요. 나도 배우가 되면 언젠가 미셸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미 마음이 풀려 버린 후지타는 지금의 자리가 공적인 자리라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열심히 미셸이 자신에게 준 영향력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미셸 씨가 도착하셨습니다.”
“앗! 벌써요? 어! 어쩌지?”
그리고 약속된 시간에 미셸이 도착하자, 신이 나 있던 후지타가 긴장하기 시작한다.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배우 출신의 정치인이라 해도, 어린 시절부터의 우상을 직접 만나는 것은 무척 흥분되고 두려운 모양이다.
잠시 뒤, 저 멀리서 점잖은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배우가 우아한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후지타는 그녀의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미셸은 손님인 후지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눈인사하고는 유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우리 함께 논의할 게 있었지요? 앉으세요. 루비나 씨.”
“그럴까요?”
유진은 그녀를 후지타의 건너편에 앉혔다.
“이쪽 분은 굉장히 멋진 분이시군요. 혹시 그때 말씀하신 제 카운터 파트너인가요?”
루비나가 후지타에게 강렬한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아쉽게도 미스터 후지타는 배우에서는 은퇴하셨습니다. 루비나 씨와 함께 쇼를 진행할 배우는 지금 물색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쉽군요. 굉장히 매력 있는 분이신데. 어떤 일로 은퇴를 하신 거죠? 지금이라도 다시 연기하시면 굉장히 반응이 좋을 텐데요?”
루비나의 칭찬에 후지타는 무척 기뻐하면서도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우상으로 여기던 미셸 루비나의 뜨거운 눈길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으니, 아마 지금쯤은 천국을 걷고 있는 기분일 것이다.
이제는 세간의 관심에서 조금 멀어진, 왕년의 할리우드 섹시 심벌 루비나는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그 고혹한 자태가 사라지지 않았다.
“미스터 후지타는 일본의 하원의원이고,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후계자이기도 하지요.”
“일본에도 귀족이 있었나요? 그건 잘 몰랐네요?”
미셸 루비나가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후지타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진이 입수한 루비나의 자료에 따르면 미셸 루비나는 귀족이나 유서 깊은 가문 따위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편이다.
사실 그렇게 서로에게 무언가 호감이 있었으니 두 사람이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지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의 우상이었고, 루비나에게는 그녀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줄 귀족이자 엘리트 정치인이라는 배경이 중요했을 것이다.
“현대로 들어서며 더 이상 귀족의 작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백작 가문이었던 것은 맞습니다.”
후지타가 조금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는 유명한 배우로 활동했었고, 대학은 여기 뉴욕대를 졸업하셨지요.”
유진은 미셸 루비나에게 후지타 유아야를 잔뜩 띄워 주는 소개를 이어 갔다.
“정말 세상의 모든 것을 독차지하신 분이네요.”
계속되는 배경 소개에 미셸도 후지타에게 조금이나마 호감이 생긴 모양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면…… 하하!”
원래 제 잘난 맛으로 사는 후지타는 기쁜 듯 환한 웃음을 짓는다.
“전부터 미셸 씨의 팬이었습니다. 가장 최근 작품인 ‘폭풍처럼’에서의 명연기가 인상에 남는군요. 언제고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어머! 정말 팬이 맞으신가 봐요. 폭풍처럼은 독립 영화라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없는데요.”
미셸은 적극적인 후지타의 태도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할리우드에서 나이든 섹시한 여배우의 자리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젊은 시절 관능적인 이미지로 뜨기 시작했더라도, 30대가 되면 슬슬 연기파 배우로 전향해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미셸 루비나는 그것을 실패했다. 십 년 넘게 주류에서 밀려나 버린 그녀를 지금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양의 미남이라면 그녀로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남자가 그녀보다 거의 10살이나 어리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기쁠지도 모른다.
잠시 세 사람은 식사를 이어 가며 화기애애한 자리를 이어 갔다.
“이번 영화에선 루비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합니다. 조연이지만 사실상 주연에게 밀리지 않는 역할이에요.”
“시나리오를 봤어요. 정말 그렇더군요. 이런 중요한 역할에 절 추천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이 자리에 초대한 후지타를 위해서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의 우상인 미셸 루비나라는 선물을 준비했고, 미셸 루비나를 위해서는 그녀가 가장 원하는 할리우드 대형 작품의 중요한 배역을 준비해 두었다.
이로써 두 사람 모두 유진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미래의 일본 수상과 수상 부인이 유진에게 고마움을 가지는 것이 유진에게 가져올 이익을 생각하면, 그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 오히려 가볍게만 느껴진다.
“다시 영화에 나오시는 건가요?”
유진과 미셸의 대화를 듣고 있던 후지타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SF 대작이라고 하더군요. 여왕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미셸도 신이 나서 대답한다.
“말하자면 스페이스 오페라 판의 클레오파트라 역할이지요.”
유진이 살짝 설명을 덧붙였다.
“오! 정말 멋진 일이로군요. 전부터 미셸이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항상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거든요.”
정치나 시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보기 어려운 순발력이 후지타에게 숨겨져 있었다.
역시 사람에게는 각자의 소질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그는 토크쇼 출연자나 연애 상대로서는 완벽한 사내였다.
“나도 클레오파트라 같은 역할은 꼭 한번 연기해 보고 싶었어요. 아쉽게도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야 그걸 이루게 되었군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미셸은 여전히 젊고 아름답고, 전보다 오히려 더욱 깊은 그윽한 매력을 가지고 계시네요.”
유진은 자신이 마련한 이 자리가 이보다 더 성공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식탁 한쪽에 서 있던 직원에게 슬쩍 눈치를 주자, 그가 잠시 뒤에 다가와 귓속말로 급한 연락이 있다 알렸다.
“아! 그렇군. 잠시 자리를 조금 비워야겠군요.”
아마도 벌써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을 위해 유진은 자리를 비켜 주기로 한다.
유진은 물론 둘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데까지 아직 많은 역경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실상의 최고 귀족 가문인 후지타의 집안에서는 후계자보다 10살이나 많은 흘러간 할리우드 섹시 심벌을 며느리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