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백악관 만찬
유진은 다음날 조찬 시간에도 후지타와 미셸 두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편안한 밤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전날 밤 두 사람에게 플라자 호텔의 럭셔리 스위트룸을 제공했지만 두 개의 스위트룸 중 오직 하나만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유진은 밤사이 둘 사이에 큰 진전이 있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미스터 후지타와 함께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어요.”
할리우드의 섹시 스타답게 미셸은 전날 처음 만난 남자와 함께 밤을 보낸 사실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요.”
물론 후지타 유아야 또한 지난 밤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단지 잠깐의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저희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겨우 하룻밤 만에 미셸 루비나와의 결혼을 결심했다 선언하는 후지타는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차지한 것 같은 정복자처럼 당당한 모습이었다.
“좋은 일이로군요. 축하드립니다.”
“저도 후지타도 평생의 연인을 이제야 만난 기분이에요.”
“아마도 미셸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긴 여정을 걸어온 것 같습니다.”
후지타는 누가 보아도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미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정말로 결혼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 후지타의 집안이 너무나 대단하더군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우리의 사랑에 방해가 된다면 집안 따위 아무 소용 없으니까.”
후지타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듯한 기세였다.
멋진 사랑이다.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영국의 에드워드 8세처럼 후지타는 자신의 사랑에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미셸의 눈가에 언뜻 스치는 눈빛을 보면 그녀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두 분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커플이고, 미셸의 우아한 이미지가 후지타의 정치적인 행보에도 크게 도움이 될 터이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렇죠? 집안사람들은 물론이고, 저를 지지해 주는 유권자들도 미셸을 좋아해 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50이 넘은 미셸을 후지타의 가족이 반길 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유진은 그가 결국은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미셸 때문에 후지타에게 정치적인 야심이 생기리라는 사실 또한 알았다.
미셸은 그저 낯선 동양인 배우에게 반한 것이 아니다. 일본 유수의 귀족 가문의 후계자인 후지타에게 매력을 느낀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남편이 일본의 수상이 되기 원했고, 남편에게 한결같은 요구를 했다.
“좋은 사람이지만 야망은 없었죠. 내가 늘 곁에서 그이를 북돋아 주어야 했어요.”
미국의 토크쇼에 나와 자신과 남편 사이 세기의 사랑에 대해 하염없이 늘어놓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기에 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 사이의 일화들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했었다. 남편과의 만남, 남편 집안의 반대, 그리고 결혼에서부터 남편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까지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했었는지 이야기했다.
많은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늘 대중의 관심에 굶주려 있었고, 결혼 뒤에도 종종 고국의 TV쇼에 출연해 자신을 과시했다.
“솔직히 걱정은 돼요. 정치인으로서의 후지타에게 악영향이 가지 않을까 싶어서요. 특히 동양인들은 같은 피를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물론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을 사랑하지요. 특히 미국의 멋진 여배우라면 절대 밀어내지 않을 겁니다.”
“맞아요. 일본 사람 누구도 미셸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겁니다.”
유진의 말에 후지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의 말을 덧붙였다.
물론 사랑에 빠진 남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그래 보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일본의 유권자들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 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하신다면 이번 영화에 차질은 없겠어요?”
“물론이죠. 얼마 만에 찾아온 기회인데요!”
유진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셸이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녀의 말처럼 마흔 살 이후로 제대로 된 역할을 맡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 이번 기회는 어쩌면 일생 마지막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후지타와의 기약 없는 애정보다 그쪽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영화사 쪽에는 이대로 계속 추진하도록 말하죠. 상대 배우만 정해지면 바로 일정을 시작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모두들 말하더군요. 유진과 만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요. 맞는 말이었어요. 이렇게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배역도 그렇지만, 미스터 후지타를 만난 것은 정말 최고예요.”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드는 여자라고는 보기 어려운 고혹한 표정을 지으며 미셸이 촉촉한 눈으로 후지타를 바라보았다.
역시 한때 그녀의 수식어였던 섹시 스타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후지타 씨는 앞으로의 일정을 계속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미셸도 한동안 저와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후지타를 뉴욕으로 부른 것은 단순하게 친목 모임이나 갖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면 오늘 오후에는 로버트와 미팅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워싱턴으로 넘어가 백악관에서 쿠슈너와 좌담이 준비되어 있고요.”
“아!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쿠슈너가 요즘 가장 바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이죠. 큐수너도 일본의 미래를 책임질 후지타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슈너와 단독으로 만날 수 있다면, 아버님도 꽤 기뻐하실 겁니다.”
이맘때 즈음 쿠슈너는 백악관의 헤게모니를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여러 경쟁자가 트럼프의 신임을 차지하기 위해 암투를 벌였지만, 사랑하는 딸과 사위라는 관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지금 세간에서는 쿠슈너야말로 백악관의 진정한 실세라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했다.
이제 겨우 2년 차의 미국 대통령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니 쿠슈너는 실질적으로 세계 2인자의 자리쯤 될 것이다.
전 세계의 정치인이나 재계 거물들이 앞다투어 쿠슈너와 단독 회담의 자리를 원하고 있었고, 현재 그런 자리를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유진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아! 그런데 쿠슈너와 만나서 딱히 할 이야기는 없는데…… 미스터 쿠슈너를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후지타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세간에서 그에 대해 말하는 속을 알 수 없는 정치인이라는 평은, 그가 속이 깊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 비어 있어 그렇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쿠슈너도 일본의 정치나 경제에 대해 딱히 대단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서로 친목을 나누는 정도로 생각해 주면 됩니다.”
어차피 쿠슈너가 관심있는 것은 일본에서 런칭한 이방카 트럼프 패션의 매출 규모 정도일 것이다.
일본 제일의 미남 정치인과 만나는 자리에는 이방카 또한 참석할 것이고, 그녀가 입은 옷과 장신구가 다음날이면 일본의 모든 매체에 실리게 될 것이다.
당연히 이방카 패션의 신상품들이 불이 나게 팔려 나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에서의 이방카 트럼프 패션은 중국의 그것과 달리 상당한 고가로 브랜딩 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세상 누구보다 미국을,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미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훨씬 더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당연히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 또한 짝사랑하고 있었고, 일본의 언론 또한 미국 매체보다도 훨씬 더 열심히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쉬지 않고 내보내고 있다.
시장 규모로 보면 중국보다 훨씬 작지만, 이방카 트럼프 패션은 일본에서도 아주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다.
덕분에 제러드도 이방카도 유진이 주재한 이번 회담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유진으로서는 백악관의 두 실세를 즐겁게 해 줄 기회도 되고, 그가 미래 일본의 수상으로 점찍어 놓은 후지타의 인지도도 높일 기회이니 더욱 기껍기만 했다.
“참!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백악관에서의 만남 때는 우리가 지정하는 의상을 입어 주면 좋겠군요. 두 사람 모두요.”
일본의 매체에 잔뜩 오르게 될 테니, 이방카 트럼프 브랜드의 의상을 입히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저도 함께 가는 건가요?”
미셸이 깜짝 놀란다. 그녀가 한때 유명한 여배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많이 잊혀진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다행히도 운이 좋아 블록버스터 영화의 꽤 비중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일본의 유력한 정치인과 스캔들도 만들 기회가 되었지만, 백악관에 초청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물론이지요. 앞으로 미스터 후지타와 함께하실 동반자로서, 그리고 내년 최고의 흥행작을 이끌 배우로서 백악관에서 미셸의 그 매력을 마음껏 뽐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멋진 일이네요. 미셸과 함께 백악관에 갈 수 있다니 말이에요.”
후지타도 미셸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정말 유진은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에요.”
조찬이 끝나고 자리를 벗어나며 미셸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아낌없이 주는 사람?”
“네. 할리우드의 친구들이 모두 같은 말을 하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모두에게 행운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고요. 유진 덕분에 재기한 친구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요. 새롭게 떠오른 스타들도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러니까 모두가 그러죠. 어떻게든 유진과 만날 기회를 만들라고요. 그의 눈에 들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고요. 처음에 그에게 연락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라고, 흥분했는지 모를 거예요.”
“그렇군요. 사실 나도 조금 놀라기는 했어요. 물론 그가 백악관에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기에 만남을 바로 승낙했지만 말이에요.”
후지타가 여전히 물색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악관에서의 영향력은 모르지만, 할리우드에서라면 유진은 황제와 비슷해요. 작년에 성공한 블록버스터 열두 개중에 유진이 출자한 영화가 무려 열한 개예요.”
“와! 그건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니까 모두가 그와 가까워질 자리를 가질 수 있기를 얼마나 원하는지 알겠지요? 당신과 만나게 된 것도 유진 덕분이니까 말이에요.”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애정이 담긴 눈길을 주며 걸어갔다.
그날 오후부터 후지타는 정신없는 일정을 보내야 했다. 뉴욕의 전현직 거물급 정치인들과의 만남이 쉴새 없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의미 없는 스몰토크가 오가는 시간이었지만, 함께 대동한 사진사는 대화의 내용과는 상관없는 멋진 사진들을 잔뜩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후지타의 가장 큰 장점은 장신의 미국인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도 그 매력적인 외모가 조금도 퇴색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어차피 매체에 실리고, 대중들이 접하는 것은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몇 장의 사진들이니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