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198화 (198/363)

198화 자선 기금

“조금 맵기는 하지만, 그렇게 고통스러운 정도는 아니에요.”

유진은 우선 아데예모의 두려움을 덜어 주었다.

“흠. 그럼 상관없습니다.”

아데예모가 슬며시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기껏 맛있는 요리를 찾아 점심시간에 맞춰 방문했는데, 지옥같은 매운 요리였다면 슬퍼졌을 것이다.

“크랩은 좋아하시나요?”

“크랩이라면 역시 던지니스크랩이지요. 코리아식의 크랩 요리라면 역시 스파이시한 양념이 가득하겠군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스파이시한 크랩이고, 다른 하나는 소이 소스로 요리했지요. 뉴저지의 유명한 한국 식당에서 오는 것인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유진은 잠시 뒤 그의 놀라는 얼굴을 볼 수 있길 기대하며 미소지었다.

“소이 소스와 크랩이라니, 잘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어쨌든 벌써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아데예모는 잠시 뒤에 차려진 간장 게장과 양념 게장을 보고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요리가 아직 덜 된 것 같은데요?”

생살이 그대로 드러난 게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시아 몇 개 나라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 여기서 바로 익혀 먹는 거로군요?”

한국식 BBQ를 떠올리며 아데예모가 물었다.

“아닙니다. 요리는 이미 끝이 났어요. 이대로 즐기시면 됩니다.”

유진이 젓가락으로 간장에 잘 절여진 게 한 마리를 아데예모의 접시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네? 살아 있는 게를 그냥 먹어요?”

“살아 있지는 않습니다. 간장에 이틀 정도 푹 절였으니까요.”

“어……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게장을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주춤할 수밖에 없다.

“아데예모 씨는 스시를 꽤 즐기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안나가 끼어들었다.

“그렇기는 해도…….”

“저도 스시는 무척 즐기는 음식이에요. 익히지 않은 생선의 살과 소이 소스는 무척 잘 어울리지 않던가요?”

“물론이지요. 아주 멋진 요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데예모는 말을 하면서도 익히지 않은 게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저걸 정말로 그대로 먹는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어떤 의미에선 소이 소스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생선보다 크랩일 거예요.”

말을 하던 요안나가 간장 게장 한 마리를 집어가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제일 마음에 들었던 음식이 바로 이 게장이었어요.”

게 한 마리를 밥 한 수저만 곁들여 쓱싹 먹어 치운 요안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보기에는 솔직히 좀 무섭지만, 한 번 맛을 들이고 나면 절대 잊을 수 없다니까요.”

그녀는 다시 두 마리째의 게에게로 손을 뻗었다.

“어…… 요안나도 그렇게 추천한다면…….”

아데예모가 쭈뼛대며 앞에 놓인 게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떨리는 손으로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게를 입에 무는 순간 그의 눈이 힘차게 감겼다는 것은 아마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굉장히…… 크리미하군요.”

딱 한 입을 먹고 난 아데예모의 얼굴에서는 이미 공포 따윈 사라진 뒤였다.

“이해할 수 없군요. 어떻게 익히지 않은 게의 살이 이렇게나…….”

“마치 버터 같지요?”

요안나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지만, 아데예모는 벌써 게를 입에 물고 이빨로 껍질을 눌러 살을 짜내고 있어 대답할 수 없었다.

“여전히 모르겠어요. 내가 알고 있는 게의 맛이 아니에요. 아니, 내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음식과도 달라요.”

“맞아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죠. 생긴 것과 맛이 이렇게 다르기도 어려워요.”

요안나는 벌써 두 마리째의 커다란 게를 해치우고, 이번에는 시뻘건 양념으로 가득한 게를 손에 쥐고 있었다.

“게장을 만난 것만으로 한국에 간 것이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저도 벌써 오늘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마음먹은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어지는군요.”

“아데예모는 늘 여기서 점심을 함께하는 거 아니었던가요?”

“아! 그랬던가요? 하하! 될 수 있다면 유진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말이지요.”

“그리고 다양한 한국 요리도 접하고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지요. 아직 접해 보지 못한 다양한 요리를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니까요.”

아데예모는 간장 게장에 홀딱 반해 버린 모양인지 두 번째 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오늘도 아데예모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유진도 즐거운 마음으로 식사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점심 시간은 그렇게 만족스럽게 지나갔다.

하지만 다른 테이블에서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한 직원들이 결국 포기하고 핫도그나 샌드위치 따위를 사겠다며 뛰쳐나가는 일이 속출하고 있었다.

역시 선입견을 이겨 내고 위험해 보이는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나도 사회 공헌에 대해서는 늘 고민해 왔습니다.”

요안나와 함께 테이블을 치우고 나서 유진이 입을 열었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업무로 이어진다.

한국에서처럼 점심시간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은 탓에 누군가는 여유 있게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쓰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은 샌드위치 따위를 입에 문 채로 따로 점심시간도 없이 일에 열중하기도 한다.

그나마 유진과 그를 돕는 비서진들은 여유 있는 점심을 즐기는 편이다.

지난 삶까지 합하면 유진이 미국에서 살아 온 것이 30년이 훌쩍 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창 때까지 한국인으로 살았기 때문인지, 유진은 여전히 점심시간을 즐겼다.

“이제 유진의 이름을 모르는 미국인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캔자스 시골의 노인조차 유진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죠. 문제는 모두들 유진이 부자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는 겁니다.”

아데예모가 꺼내 놓지 않은 사실 하나는 유진이 외국인 출신, 그것도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낯선 동양인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미국인들 대부분은 다른 인종에 대한 거부감이 있고, 특히나 소수인 아시아인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외부인이 미국에서 돈을 벌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라면 굉장한 장점이지만, 막상 유진의 터전이 되어 줄 이곳에서는 좋다고만 하기는 어렵다.

미국이 가장 자본주의 이념에 충실한 국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돈만 밝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인종적 불리함을 안고 있는 유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피터 루스터의 방안에 대해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겠군요. 내일은 피터 루스터와 캠벨 홀트, 그리고 음…… 브라이언 디즈도 같이 모이도록 하죠.”

“브라이언도요?”

“진행하게 되면 꽤 큰 프로젝트가 될 것 같군요. 브라이언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물론 본인의 의사가 중요하겠지만요.”

브라이언 크리스토퍼 디즈는 월리 아데예모와 함께 백악관의 대표적인 젊은 파워로 불리던 사람이다.

백악관에서는 주로 정책 개발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아 왔고, 특히 기후와 에너지 담당 보좌관으로 활동해 왔었다.

그 또한 아데예모처럼 블랙록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유진이 손에 넣은 인재이기도 하다.

원래였다면 아데예모와 함께 블랙록에 근무하다가 다음 정권인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중임될 운명이었을 것이다.

오바마에 이어 바이든까지 중요하게 쓸 정도라면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해도 좋았다.

“하기야, 브라이언이라면 아주 훌륭하게 해낼 것으로 믿습니다.”

아데예모도 유진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다음 날 점심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유진과 점심을 함께했다.

이날은 한국 음식에 낯선 몇몇을 위해 평범하게 플라자 호텔에서 몇 가지 요리를 시켰다.

유진은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한국의 요리를 권유하고는 했지만, 사람을 불러놓고 억지로 한국 요리를 강요하는 몰상식한 짓은 하지 않았다.

이날도 테이블에 김치볶음밥을 둥글게 뭉쳐 튀긴 아란치니를 슬쩍 곁들인 것이 전부였다.

“빌 게이츠는 사업가로서 활동할 당시 실리콘 밸리의 악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척이나 약탈적이고 무자비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자선 사업에 나선 이후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지요.”

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바로 격렬한 토의에 들어갔다.

유진의 이미지를 위해서든, 세금 문제를 위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기부 행위는 필요했다.

빌 게이츠를 제외하더라도 미국의 대부호들은 항시 적지 않은 액수를 다양한 방법으로 기부해 오고 있다.

미국 내 50대 부호들이 2017년 한 해 동안 기부한 금액만 150억 달러를 넘어설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제일의 부자인 유진이 입을 씻고 있는 것은 절대 좋은 모습은 아니다.

유진을 포함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그보다는 어떻게 일을 추진해 나아갈 것인지의 방법론이 문제였다.

“단순한 일회성 기부보다는 기금을 만드는 것이 낫습니다.”

기획을 올린 피터 루스터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편이 낫겠군요. 빌 게이츠처럼 일정 규모의 기금을 마련하는 쪽으로 하지요.”

“기금이라면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규모의 문제였다.

“적어도 50억 달러 정도로 시작할 생각입니다.”

“50억 달러면 꽤 준수한 펀드가 되겠군요.”

2017년 빌과 멀린다 부부는 47억 달러를 자신들의 기금에 기부했다.

빌이 현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선 활동을 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진의 50억 달러는 충분하다고는 못해도 체면치레는 충분히 할 정도이다.

“올해 출연액만 그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계속 늘려갈 생각입니다. 2025년쯤이면 아마 1000억 달러 규모는 되어야 할 것 같군요.”

“어…… 100억이 아니고 1,000억 달러가 맞는 겁니까?”

브라이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빌게이츠 부부의 자선 재단인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최근까지 20여 년에 걸쳐 4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모아 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것도 전액 두 사람이 기부한 것이 아니라 워런 버핏 등 다른 부호들의 참여와 소액 기부까지 합한 금액이다.

“1,000억 달러의 자선기금이라니, 예외적인 숫자로군요. 하지만 유진의 자산 규모를 생각하면 또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요.”

세계 제일의 부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그 정도는 되어야 유진의 인종적 불리함을 감소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벌어들이는 수익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내놓을 수 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앞으로 7년 동안 1,000억 달러라면 눈을 감고도 내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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