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코리아 평화 기금
“그리고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을 기금 조성의 목적에 맞게 사용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라면 상당한 반향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제안을 한 피터 루스터는 유진의 예산안에 큰 만족감을 보였다.
그리고 기금 조성과 집행을 책임지기로 한 브라이언 또한 수긍했다.
“물론 전부 미국 내에서만 사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벌어들인 수익의 상당수는 해외에서 기인한 것이니, 그에 걸맞은 지출도 있어야 하겠죠. 우선은 절반 정도는 미국에서, 나머지는 해외의 빈곤층 해결에 사용하도록 하죠.”
“미국 내라면 우선 당장 떠오르는 것으로는 역시 푸드뱅크에 지원하는 거겠죠?”
미국은 세계적인 초강대국이라는 위명에 걸맞지 않게 끼니를 잇지 못하는 소외된 저소득층이 많다.
보고에 따르면 식량 불안에 시달리는 미국인이 5,0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더군다나 80년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복지에 대한 예산을 대거 삭감한 이후 이런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은 국가가 아닌 자선 단체들의 푸드뱅크를 통해 해결하는 실정이다.
사실상 미국 내 다양한 푸드뱅크들이 아니라면 미국인의 1/6이 굶주린다는 분석도 있다.
국가가 지원해야 할 복지를 자선 단체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이 가진 냉혹한 사회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일면이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푸드뱅크 지원을 최우선 순위로 하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내년부터 시작되는 초유의 사태로 미국 내에서 푸드뱅크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딱 좋은 시기이다. 사실 유진은 이미 당장 몇 년 동안 지출할 기부금 대부분을 미국의 저소득층 식비에 사용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배가 고플 때 도와준 사람만큼 기억에 남는 사람도 달리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저소득층을 위한 교육 지원이 있습니다.”
아데예모와 브라이언이 차분하게 유진이 내어놓을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에 대한 의견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캠벨 씨의 기획안도 집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또 한 명의 연구원인 캠벨도 오바마 행정부에서 상당한 고위직에 몸담고 있던 사람이다.
국무부에서 아시아, 태평양 담방 차관보를 지내며 미국의 동아시아 대외 부분을 책임지던 이로, 유진이 그에게 부탁한 연구는 해외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높일 방안을 찾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일은 단기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10년, 길게는 수십 년 이상의 투자와 세심한 계획이 필요할 겁니다.”
미국 내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인 캠벨은 유진의 풍부한 자산을 이용해 세계 각국, 우선은 미국과 동아시아에서의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는 문화화 학문을 이용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우선은 한국 문화의 세계 진출에 힘을 기울이고, 한편으로는 각국의 대학과 연구기관 등에 무차별적인 자금을 뿌리는 것이 제일이라는 의견이었다.
“미국의 경우 적지 않은 잽머니가 대학에 흘러들어 왔습니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수많은 학자들이 일본의 구미에 맞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고 있지요.”
“알고 있습니다. 미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요. 심지어 한국에서조차 말이지요.”
유진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2차대전의 A급 전범인 사사카와 료이치가 2차대전 후 재기해 일본에서 경정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으로 설립한 재단법인인 일본선박진흥회를 전신으로 하는 일본재단은 도박으로 쌓은 돈을 세계 곳곳에 뿌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자금을 받은 각국의 학자들은 다양한 연구 결과를 통해 일본의 지저분한 과거를 미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유진의 말처럼 심지어 한국의 최상위 대학들조차 이런 자금을 받아, 일본의 주장을 긍정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못마땅한 상황이지만, 유진은 아무리 싫어하는 상대라도 배워서 취할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본재단 같은 사적 기금뿐 아니라 일본 정부도 다양한 통로로 자금을 뿌리며 일본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일본은 한낱 도박장의 주인마저 그렇게 자국의 이미지 재고를 위해 모은 돈을 쓰고 있는데, 한국의 기업은 그런 것에 무척이나 인색하다는 점이다.
“특히 대학의 연구에 기금을 조성하고, 엘리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은 시간은 좀 걸리지만 확실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걸 한번 해 보도록 하지요.”
유진이 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기금을 만들고, 많은 돈을 쓰겠다는 것은 결코 그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넘치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유진은 결코 한국 출신이라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2세대, 3세대 이민들도 미국 내에서는 한국계, 아시아계로 분류되는 형편이다.
다른 민족에 비해 아시아 계통의 이민자들이 좀처럼 미국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시아의 위상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마이너리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진은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이 아시아, 그리고 한국계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면, 차라리 한국계라는 사실이 유리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우선은 미국인들이, 그리고 아시아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호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전 세계가 한국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를 통해 한국 출신의 부자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유진을 친숙하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침 한류의 열풍이 서서히 아시아를 넘어서기 시작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유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류 문화에 힘을 실어 줄 생각이다.
더불어 캠벨의 계획처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학계에 풍부한 자금을 마구 살포할 생각을 한다.
“우선 펀드를 하나 만들도록 하지요. 가칭은 코리아 평화 기금 정도로 하면 되겠군요. 그를 통해 미국 내 100대 대학에 각각 100만 달러의 기금을 조성하겠습니다.”
그래 봐야 겨우 1억 달러밖에 들지 않는다.
“기금의 크기는 계속 늘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내년부터는 미국의 대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도 하지요. 로즈 장학금처럼 유명한 장학 기금을 만들어 미국의 엘리트 학생들이라면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겠습니다.”
남아프리카 식민지 수탈로 큰 재산을 만든 세실 로즈가 만든 로즈 장학금은 그걸 받는 것만으로 큰 영예가 될 정도로 권위 있는 장학금이다.
아프리카 식민 수탈로 조성된 기금인 만큼 수많은 논란을 불러 왔지만, 여전히 로즈 장학금의 권위는 부정하기 힘들다.
“그런 위상을 지닌 장학 기금이라면 상당히 큰 비용과 노력이 필요할 겁니다. 물론…… 유진이라면 아무 걱정도 없겠지만요. 하하.”
캠벨이 잠시 필요한 예산 규모를 계산해 보다가, 유진이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자산 규모를 떠올리고는 멋쩍게 웃어 버린다.
“미국 내에서만 적어도 매년 최상위 엘리트 학생 1만 명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급할 겁니다.”
유진은 한번 마음먹은 기부에 거침이 없었다.
“매년 최소 7, 8억 달러가 필요하겠군요.”
뉴욕의 사립대학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합하면 대략 10만 달러가량이 필요하다.
모두가 사립대에만 지원하지는 않을 터이니, 1만 명을 생각하면 그 정도가 나온다.
하지만 이제는 이 자리의 누구도 혀를 내두르지는 않는다. 1년에 무려 100억 달러에 달하는 기부금을 부담 없이 사용하겠다는 이가 물주였으니.
“미국 외 국가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수준의 장학 기금을 운용할 계획입니다.”
미국이 아니라면 훨씬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사람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다.
유진의 요구처럼 각국의 엘리트들에게 수여된다면, 궁극적으로 각국의 엘리트 중 일정 부분을 친한파로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설령 친한파는 무리라도 최소한 유진에게 호의를 지닌 엘리트들이 각국을 이끌어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여 있던 사람들은 유진이 조성할 기금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할지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갔다.
실무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 놓고, 유진은 달리 사람들을 모아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국의 세계적인 투자자 강유진 씨는 앞으로 3년 동안 모두 10조 원에 달하는 기금을 조성해 저소득층의 교육 지원, 대학생 학자금 보조, 청년들에게 더 많은 사회 활동의 기회를 주기 위해 사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해당 기금을 통해 매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저소득 미성년자에게 학업에 필요한 자원을 보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진의 통 큰 자선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고, 당연히 한국 사람들에게서 가장 큰 반향이 나온다.
지금까지 한국의 그 어떤 기업가도 유진처럼 대대적인 기부 활동을 해 온 적은 없었기에 시민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거기다 그동안 유진에게서 여러모로 받은 게 많은 언론인들이 부지런히 유진의 기부를 찬양하는 기사들을 올리기 시작한다.
[미국인들은 자선 행위를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수십억 혹은 수백억 달러의 자산을 지닌 부자들뿐 아니라 평범한 서민들도 70% 가까이가 기부를 습관처럼 하고 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미국에는 총 150만 개의 자선 단체가 있고, 매년 5,000억 달러라는 엄청난 기부금을 모으고 있다.
국가에서 미처 챙기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이러한 기부금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미국보다도 못한 수준의 복지 지출을 하고 있는 한국의 경우는 이런 기부 문화도 없어 소외층의 고통은 미국보다 오히려 큰 편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자산가들이 매년 기부하는 금액은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들의 공헌에 대해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그에 반해 한국의 대기업이 사회적 공헌에 사용하는 돈은 정말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소위 5대 그룹 전체를 합해도 겨우 수백억 원에서 천억 원 남짓한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목적 사업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공익을 위해 만든 이러한 재단이 사실상 기업 승계와 유산 상속을 위한 수단으로 전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대기업 총수가 설립한 공익 재단 중 상당수는 설립 후 공익 활동은 전혀 하지 않거나, 수익용 자산의 1%를 겨우 넘기는 수준의 활동을 할 뿐이다.
공익 자산에 기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속세를 내지 않고 기업의 지분을 자식에게 넘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강유진 회장의 기부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의 기부는 다른 기업주들처럼 특정 회사의 지분을 담보로 하지도 않고, 전액 현금으로 조성된다고 한다. 그리고 조성된 기금 전부를 목적에 맞게 사용한단다.
이제 한국도 기부 문화에 있어서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맞이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