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00화 (200/363)

200화 제일 그룹의 행보

[제일 그룹 회장의 장남인 한정훈 씨가 제일 그룹 부회장 및 제일전자 대표이사로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세간의 이목을 모아 오던 제일 그룹의 후계자 구도는 한정훈 씨의 승계로 가닥이 잡혀 가는 모습입니다.]

[오늘 열린 기자회견에서 한정훈 부회장은 기업과 기업주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제일 그룹 창립 이후 70여 년 만에 세계적인 기업 집단으로 서게 된 데에는 국민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며, 이제는 그동안의 애정에 대해 보답을 시작해야 할 때라 밝혔습니다.]

[한 부회장은 제일 그룹 총수 일가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을 다양한 공익 사업을 위해 사용할 것이며, 특히 부친인 한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대부분을 이러한 공익 사업을 위한 재단에 희사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주식 시장의 활황으로 제일 그룹 한 회장의 보유 지분이 최소 16조 원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례없는 대형 공익 재단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일으키는 뉴스가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기 시작했다.

[한편 제일 그룹과 함께 한국 재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다산 그룹도 조만간 그룹의 규모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발표도 있습니다. 현 다산 그룹 회장 또한 자신의 보유 재산을 가족들에게 상속하는 대신 공익 사업에 활용할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일 그룹의 대형 공익 사업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규모라고 하는데요,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이 이렇게 일제히 상속 대신 공익 재단의 설립을 발표한 것은 얼마 전 뉴욕의 강유진 회장의 거액 기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유진의 기부 발표에 발을 맞추기라도 하듯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의 기부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커뮤니티의 게시판은 제일과 다산 그룹에 대한 의견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 16조 원을 기부한다고? 세상이 뒤집혔나? 믿기지가 않네?

- 저거 전부 꼼수임. 어차피 유산 상속하면 절반이 상속세로 빼앗기는데, 재단 만들어서 상속시키고 그걸 자식들이 운영하면 상속세 내지 않고도 그룹의 지배권을 지킬 수 있음. 상속세 안 내는 것만으로도 완전 꿀임.

- 스웨덴식으로 가겠다는 거지. 발렌베리 가문이 그렇게 공익 재단 만들어서 상속세 안 내고 지배하는 것처럼 말이야.

- 그러니까 결국 자기들 이득 때문에 한다는 거지?

- 그런 면도 없지는 않은데, 공익 재단에 기부한 재산을 통해 창출하는 수익은 전부 공익 사업에 써야 해. 그러니까 그걸로 재산을 늘리는 것은 못 하는 거지. 그것만 해도 어디인데.

제일과 다산의 기부 발표가 전적으로 호평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사람들은 기업의 기부 행위가 단순히 자선 활동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대기업 사주들이 공익 재단을 만드는 행위가 철저하게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럼에도 기부 규모가 천문학적이라는 이유로, 제일과 다산 그룹이 지금까지의 다른 재벌그룹과는 다르게 실질적으로 사회에 공헌하게 되리라는 사실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당장에 제일과 다산 그룹에서 매년 배당하는 액수만도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매년 수십억 원의 금액만을 사용하고 생색이나 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 그런 면에서 강 회장이 진짜 대단함. 회사 지분이 아니라 전액 현금으로 내놓는다고 하지 않았음?

- 그런 게 진짜 기부지.

- 맞아. 돈으로 내놓아야 기부지, 회사 지분을 쪼개 놓고, 지배권 유지용으로 사용하는 건 그냥 편법임.

제일과 다산의 공익 재단 출범 소식은 오히려 유진의 기부 활동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 그래도 그런 식이라도 기부를 많이 해야 함. 미국이나 유럽 부자들도 주로 그런 식으로 기부하는데, 우리는 그것도 거의 안 하는 거잖아?

- 맞는 말임. 한국 부자들은 너무 기부할 줄 모름.

- 제일이 16조, 다산이 9조라고 하는데, 다른 대기업들은 뭐 하나?

그리고 곧 제일과 다산을 제외한 다른 재벌 그룹에 대해 그리 곱지만은 않은 눈초리가 모아지기 시작했다.

- 제일, 다산이 10조 내면 명성은 그래도 4조는 내놓아야 하는 거 아님?

- 성진하고 삼호도 절반씩은 내야지.

- 기부가 무슨 세금임? 제일하고 다산이 내놓는다고 따라 내놓게?

- 기부가 세금은 아니지. 그래도 기왕이면 지금까지 번 돈을 사회에 봉사하겠다고 하는 그룹이 더 이뻐 보이는 건 사실임.

- 제일하고 다산은 강 회장한테 투자를 잔뜩 받아서 주가도 오르고 수익도 좋은데, 다른 대기업들은 아니잖아? 지금 기부 같은 거 할 여력이 어디 있겠어?

- 무슨 소리야? 기업 활동이랑 기업 총수가 지분을 출연하는 거랑 구별을 못 하나?

- 지금까지 대기업들이 땅장사하고 국내 산업을 전부 쓸어가기만 했지, 사회에 공헌한 게 얼마나 되냐? 이번 다산과 제일의 기부는 그래서 환영임.

- 맞는 말. 앞으로 제일하고 다산 거만 쓸 거임.

- 어차피 지금도 제일 아니면 다산 물건만 쓰고 있는데 앞으로는 극장도, 과자도 제일 아니면 다산임.

- 과자는 안 만드는데?

“언론이나 커뮤니티나 여론이 상당히 호의적입니다. 이번 발표로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이 얻게 될 효과는 상당하리라 예상됩니다. 각 부문에서 적어도 몇 %씩의 시장 점유가 늘어날 것 같습니다.”

제일 그룹의 한 부회장이 뿌듯한 얼굴로 부친에게 상황을 요약해 보고하고 있었다.

이번 기부 사태를 주도한 것은 다름 아닌 그였기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래. 어차피 상속세 내고 나면 절반도 건지기 어려운 걸 이렇게 해 버리면 차라리 낫겠구나.”

한국의 공익 재단 관련 법은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출연자의 권한이 상당히 제약되어 있어, 공익 재단으로 인한 경영권 승계가 그다지 크게 의미 없는 구조였다.

당장 출연자와 그 상속인들이 기부한 주식에 대한 처분권을 상실하고, 배당 수익도 얻을 수 없다. 오로지 의결권 행사만이 가능한 것이다.

만일 한 회장이 이미 자식들에게 자신의 지분 상당수를 이미 넘겨준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을 쉽게 진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그룹은 이미 지난 20여 년 동안 다양한 편법을 사용해 주력 기업의 지분을 한 회장에게서 네 명의 자식에게 승계해 놓거나, 해외의 자산관리 회사를 통해 운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후였다.

지금 남아 있는 한 회장의 지분은 2년 전까지만 해도 겨우 6조 원을 겨우 넘는 수준이었다.

물론 6조 원도 엄청난 액수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지분이라 할 정도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진과 협력 관계가 되며 제일 그룹의 전 계열사 주가가 수직상승했고, 한 회장의 보유 지분 가치도 2.5배나 높아져 버렸다.

유진과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부친인 한 회장의 눈도장을 찍고, 드디어 길고 긴 후계 경쟁의 승자로 우뚝 선 한정훈은 이번에도 유진과의 밀약으로 부친인 회장의 지분을 공익 재단으로 돌리는 것을 추진했다.

이는 전적으로 네 명의 자식 중 한정훈 한 사람에게만 유리한 방법이다.

만일 부친의 재산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상속하게 된다면 모친과 다른 세 형제와 나누어야 하지만, 공익 재단에 전부 출연하게 되면 공익 재단을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해당 지분을 오롯이 지배할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통 큰 기부 행위를 통해 한국 소비자들의 마음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준 것도 큰 의미가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모든 계열사의 점유율이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냈습니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고, 금융계열사와 패션, 건설 어느 부분에서도 점유율이 늘어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물론 강 회장의 투자도 큰 역할을 했지만, 그보다는 강 회장의 우호적인 이미지를 우리가 그대로 사용할 수 있던 점이 더 크다고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입될 투자금 덕분에 계열사들이 훨씬 더 공격적으로 운용할 수 있던 것도 한몫했고요.”

“그래. 이대로 10년이면 정말 모든 방면에서 확실하게 절대적인 우위를 선언할 수 있겠더구나.”

제일 그룹은 그 이름처럼 진출한 모든 분야에서 한국 제일이 되지 않으면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물론 실상은 몇몇 주력 계열사를 제외하고는 평범하게 시장을 나누어 먹는 수준이지만, 적어도 그런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때로는 출혈 경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진과의 협력을 통해 제일은 그러한 출혈 경쟁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유진이 내놓기로 한 500조 원의 천문학적인 투자금이 그걸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이다.

아들인 한정훈 부회장이나 부친인 한 회장 모두 점유율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뿐, 사실상 적지 않은 계열사의 수익률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거론하지 않고 있었다.

수익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업주가 아니라 기업에 출자한 주주들의 입장이고, 기업을 좌우하는 측에서는 해당 분야에서의 점유율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주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미래의 주가 가치이다.

지금 제일 그룹의 주주들은 앞으로도 몇 년 동안 유진이 거액의 투자를 이을 것이라는 사실에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당장의 손실이 발생해도 유진의 투자가 주가를 부양한다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제일 그룹은 모든 계열사에서 공격적인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유진의 투자가 이어지는 동안 적어도 한국 시장에서는 모든 계열사가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겠다는 마음가짐이 회장에서부터 말단 직원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내년부터 미국의 테슬라와 전기차 생산에 대한 협력이 성사되면 제일자동차 또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게 될 겁니다.”

한정훈 부회장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기자동차에 대해서는 네게 전적으로 맡기겠다. 하지만 전통적인 내연기관 자동차도 소홀히 하지 말거라.”

한 회장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양 그룹이 해체되며 가장 큰 이득을 본 곳은 역시 제일 그룹이다. 당장 염원이던 대양자동차와 제일자동차의 합병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한 회장은 제일 자동차의 성장을 위해 지금까지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자해 왔지만, 20여 년 동안 뚜렷한 성과는 얻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과 협력 관계가 된 이후로 대양을 흡수하며 한국 시장 점유율 35%를 바라보게 되었고, 가장 선도적인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와의 협력도 앞두고 있다.

물론 한 회장은 여전히 전기자동차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있었다.

환경 규제에 대한 여러 논의 때문에 미래가 밝다고는 하지만, 전기자동차가 지닌 본질적인 약점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유진의 추천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와 연결되어서 손해 본 것은 없다.

“절대로 완벽하게 믿으면 안 된다.”

하지만 한 회장은 한편으론 끝까지 경각심을 놓지 않도록 주의를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련한 기업인이 가진 일종의 본능 같은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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