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칼날 위를 달리는 자들
“물론이죠. 세상에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가족뿐 아니겠어요?”
물론 자신의 형제조차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도 한정훈 부사장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그래.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족뿐이지. 지금은 그자와 서로 이익을 공유할 수 있으니 함께하고 있지만, 동업이란 게 영원할 수는 없는 법이니.”
제일 그룹은 창업부터 국내 최대의 기업 집단으로 성장하는 과정까지 적지 않은 동업 관계를 맺고 사업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동업 관계는 언제나 시한부였다. 당연하지만 동업이 끝났을 때, 그 사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쪽은 언제나 제일 그룹이었다.
때로 동업의 상대방은 제일이 나누어 주는 제법 큼지막한 덩어리로 만족하기도 했고, 때로는 형편없는 소득 분배에 피눈물을 흘리며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땐 이미 제일 그룹의 위상은 상대방이 어쩔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동업은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지만, 만약 해야 한다면 늘 마지막 순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제일 그룹 초대 창업주의 손자로서 한정훈 또한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있어 다른 누구와 협력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한편으로 협력 관계는 언제고 끝이 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경우가 바로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순간이다.
유진의 협력으로 제일은 대양 그룹의 주력 계열사를 몇 개나 집어삼켰고, 계열사들의 경쟁력을 끌어 올릴 수 있었다.
제일 그룹은 명실상부하게 한국 제일의 기업 집단이지만, 그 위치가 영원하리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 또한 자명하다.
유진과 손을 잡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제일 그룹에겐 악몽과 같은 시간이 다가오리라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제일이라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자본을 움직이는 상대와 경쟁을 하는 것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제일로서는 유진과의 협력이 자발적이면서도 동시에 강요된 것이나 다름없는 현실이다.
더군다나 유진이 동원할 수 있는 현금은 제일 그룹을 몇 개나 인수할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이 알려져 있다.
“언제고 그자와 결별의 순간이 왔을 때,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과 내주어도 상관없는 것을 잘 구분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이 오기는 할 겁니다.”
피를 나눈 형제 사이라 해도 사업을 하다 보면 갈라서기 마련이다.
유진과의 협력이 끝나는 순간에 회장 일가에게 남아 있어야 할 것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물론 그들 일가는 그런 결별의 순간에 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강유진이라는 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상대했던 그 누구와도 다르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거라.”
“그렇죠. 하지만 권불십년이라 했습니다. 나라의 권력을 잡은 이도 십 년을 가기 어려운데, 오직 투자만으로 언제까지나 그렇게 승승장구할 거로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제일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기업주가 유진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러했다.
유진의 성공은 전적으로 행운에 기댄 것이 크다. 그리고 행운이란 것은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는 변덕쟁이였다.
“기업을 성공시키는 것과 투자에서 큰돈을 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제일 그룹 한 회장 일가는 언제고 유진의 투자도 벽에 부딪히게 되리라 예상했다.
그때가 되면 제일과의 협력도 삐걱거릴 것이고, 이미 한국 정계와의 관계, 그리고 법조계와 언론까지 손에 넣고 있는 제일은 언제나 그랬듯이 동업의 성과를 독차지하고 우아한 이별을 고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언제나 겸허하고 낮은 자세로 있겠습니다.”
한국 제일의 재벌이라는 명성과 다르게, 제일 그룹 총수 일가는 어디서든 좀처럼 거들먹거리는 일이 없었다.
그건 한국 근현대사의 부침과도 연관이 있다.
광복 이후 수십여 년 동안 한국의 정치권은 총을 든 자의 것이었고, 재계를 주름잡던 기업주도 권력자의 변덕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빼앗기던 시절이 겨우 2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제일은 늘 권력자의 눈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리고 시대마다 바뀌는 여러 권력자의 흥망 속에서 살아남는 것은 늘 제일이었다.
제일의 수장들은 시대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방법을 아주 잘 익히고 있다.
명백하게도 지금 이 시대를 호령하는 것은 권력자가 아니라 태평양 건너편의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 도한 바로 한정훈이다.
한 회장이 큰아들을 차기 수장으로 방점을 찍은 것 또한 시류를 읽는 그런 눈치 때문이었다.
“하지만 항상 과거에 없던 일은 생기는 법이지.”
“맞습니다. 그자의 시대가 아주 오래 갈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일은 인내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밑바탕에 깔려 있는 확고한 자신감을 내비치며 차세대 제일 그룹을 이끌어 갈 한정훈이 말했다.
“그래. 너도 드디어 인내의 가치를 깨달았구나. 그걸로 충분하다. 늘 모두가 지금을 즐기도록 놓아두거라. 언젠가는 인내하는 자가 웃게 될 터이니.”
부자의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이미 제일의 차기 수장으로 한정훈을 낙점한 회장은 최대한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려 하고 있었다.
물론 장남이 여전히 미숙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은 익히 파악하고 있다.
하나 그룹의 미래를 위해서나, 자식의 성장을 위해서도 지금은 그를 북돋워 줄 때였다.
“경영은 늘 칼날 위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인 법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지만, 걸음을 멈추는 순간 칼날에 발바닥을 베이고 말지.”
“다시 한번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 * *
“제일 전자의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있습니다. 전자뿐 아니라 제일 그룹 계열사 전체가 그렇지요. 사실상 보유하고 있는 지분의 상승분만으로 지금까지 투자한 돈의 몇 배는 뽑은 셈이에요.”
요안나가 한국에서의 투자에 대해 밝은 얼굴로 브리핑하고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제일 그룹과 다산 그룹의 주가는 단 한 번도 꺾이지 않고 상승해 왔어요. 한국의 주식 시장에서 이 두 회사가 가진 지분이 절대적이고요.”
본래 한국 시장에선 전자부터 자동차, 금융 그리고 소비자 생활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제일, 다산, 대양, 명성의 네 대기업의 지분이 확고했다.
그런 와중에 대양이 무너지고 제일과 다산이 그걸 흡수하며 두 거대 기업 집단이 지닌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유진이 이미 집행한 투자 금액은 대략 50조 원 정도. 하지만 제일과 다산 그룹 계열사의 주가 상승은 그걸 아득하게 넘어서고 있다.
그런 와중에 유진이 한국을 위한 기금을 만들고, 제일과 다산 회장이 뒤를 이어 수십조 원 규모의 자선기금을 만든다는 소식에 주식 시장이 다시 한번 폭등했다.
그 결과 이미 제일과 다산 그룹 주요 계열사 주식을 다양한 투자 은행을 통해 보유하고 있던 유진이야말로 이번 폭등의 가장 큰 수해자가 되었다.
“우리가 예상한 이상으로 시장이 반응하고 있어요. 올해 말까지 45% 정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쩌면 100% 이상의 선전도 가능할 것 같아요. 두 그룹에 대해서는 계속 매입 우위로 나가면 되겠지요?”
“내년까지는 그렇게 하지.”
유진도 흔쾌히 요안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앞으로 3년 동안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주식 시장이 활황이 될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뒤에 다가올 무시무시한 붕괴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퀀트 팀에서 보고가 올라왔어요. 최근에 설치한 새 인공지능이 굉장히 효과적이더군요. 블랙볼트의 기술력에 대해 새삼 감탄하게 되었어요. 다른 AI와는 전혀 차원이 달라요.”
요안나가 이끄는 투자팀도 월스트리트의 여느 투자 기관처럼 다양한 종류의 투자 방법을 통해 이익을 실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데이터 마이닝을 통해 인공지능으로 주식 투자를 이어가는 부서도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한 퀀트 투자의 경우라면 아직 메이저 투자 부서에 비해 적은 규모의 투자만을 이어가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규모의 퀀트 투자라 해도 겨우 수십억 달러에 불과한 정도이다.
이는 어지간한 투자 기관이 수백억에서 많게는 수천억 달러의 자금을 굴리는 것에 비하면 소소하기만 한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공지능의 수준이라는 것이 아직은 명백하게 트레이더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안나의 퀀트 팀 또한 수십억 달러 수준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최근 설치한 인공지능 덕분인지 인간 트레이더의 투자에 비해 많게는 수십 %의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보고되어 왔다.
“물론 보스의 큰 그림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다른 인공지능 투자와 요안나의 팀이 다른 것은 유진이 정해 주는 방향성을 인공지능이 참조한다는 것이다.
유진은 한국과 미국 주식 시장의 상승일변도를 예상하고 있었고, 인공지능은 그걸 토대로 다른 자료들을 마이닝해서 그때그때의 투자를 결정하고 있다.
“그걸 고려한다 해도 이번 AI의 투자 수익이 명백하게 다른 직원들보다도 훨씬 더 높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에요. 사실 이번 결과 발표를 보고 긴장하는 트레이더들이 꽤 많아요. 어쩌면 우리 쪽부터 AI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지요.”
“AI가 맡을 수 있는 규모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한정적일 거야. 솔직히 나부터도 수천억 달러를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인공지능이라 해도 정말 이성을 지닌 존재는 아니다. 만일 실수를 한다면 인공지능보다는 인간 쪽이 더 큰 실수를 할 수 있고, 배신을 한다고 해도 인간 쪽이 배신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유진은 현재의 기술은 완벽하게 신뢰할 정도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적어도 아직은 인간의 지능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릴 가능성이 더 크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라는 시점의 문제일 뿐이다. 앞으로 겨우 5, 6년만 지나도 적지 않은 트레이더들의 자리를 인공지능이 대체하게 될 것이다.
“얼마나 남았을까요? 우리를 대신해서 인공지능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까지?”
요안나는 확실하게 이번 보고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명석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는 유진이 아직이라고 했지만, 조만간 인공지능이 트레이더를 대신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지. 정말로 인공지능들이 우리 대신 결정을 내리게 되는 시간이 올지도 모르겠어.”
“난 언젠가는 그런 때가 오고야 말 것 같아요. 아직 시작에 불과한데 벌써 설치비 이상의 가치를 해내고 있어요. 1년이면 블랙볼트에 투자한 비용을 전부 뽑고도 남을 거예요. 그런데 앞으로 5년 뒤에는 대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낼까요?”
요안나가 살짝 어깨를 떨었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우리 목을 조르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글쎄? 어차피 인간들은 늘 그래 왔지. 늘 새로운 성취를 이루어 내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가며 말이야.”
유진은 자신이 결정한 인공지능에 대한 투자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