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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03화 (203/363)

203화 피터의 우울

“갑갑하다고 하니 함께 바람이라도 쐬러 갈까?”

“어디로요?”

“대서양. 마침 이스트 리버에 정박해 있는 요트가 놀고 있거든.”

갑작스러운 유진의 제안이었지만, 환기가 될까 싶었는지 피터가 바로 대답했다.

“대서양이요? 흠…… 좋네요.”

“그럼 바로 준비하라고 하지.”

유진이 눈짓을 하자, 모니카가 바로 전화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유진과 피터는 맨해튼 섬 동쪽의 이스트강에 정박해 있던 요트에 올라탔다.

“저는 요트라고 해서 저런 걸 생각했었는데요.”

피터는 이스트강을 따라 오르내리는 2, 30미터 크기의 대형 요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근데 이건 요트라기보다 무슨 군함 같군요. 길이가 400피트 정도 되나요?”

“300피트라고 했던가?”

“정확히 322피트에요.”

요안나가 유진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엄청나군요. 생긴 것도 굉장히 날카롭고요. 선원들도 잔뜩 있네요. 진짜 군함이나 유람선 같아요.”

“상시 근무하는 선원이 50명이에요. 하루 유지비만 12만 달러고요.”

“휘유! 하루에 12만 달러라고요? 그건…… 얼마 전까지의 우리 사무실 한 달 경비보다 30%는 많군요.”

혀를 내두르는 피터의 말에 유진이 살짝 웃어 보인다.

“지금은 블랙볼트 하루 경비가 그 정도 되지 않나?”

“그렇기는 하지요. 그렇다고 해도…… 한 사람을 위한 비용으로는 무서울 정도네요. 세계 제일의 부자는 그 정도 지출이 아무것도 아닌 거죠?”

“이건 임시로 사용하는 요트에요. 제대로 된 요트는 아직 건조 중이에요.”

요안나가 성실하게 설명해 준다.

“제대로 된 요트라고요?”

“600피트짜리 대형 요트를 독일의 조선소에서 만들고 있어요.”

“600피트면 항공모함 크기 아닌가요?”

“그렇게 면적이 넓지는 않으니 항공모함보다는 조금 작은 크루즈선 정도예요.”

요트의 건조에는 요안나가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 그래서인지 요안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건조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1년도 넘게 남아 있는 그 새 배에 대해 떠들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큰 배는 얼마나 하나요?”

“대략 20억 달러에 조금 못 미치죠.”

“와! 그냥 배 한 척에 말이지요?”

“초대형 크루즈보다 더 비싼 배에요. 그만큼 안전이나 다른 편의 시설에 공을 들였죠.”

대략 비슷한 길이의 항공모함 한 척에 버금가는 비용이 드는 초대형 프로젝트로, 메가 요트 건조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한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큰돈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네?”

“솔직히 말해 감이 잡히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큰돈을 쓴다는 게 말이지요.”

“앞으로 몇 년 뒤면 피터도 이 정도의 소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게 될 거야.”

“그럴까요?”

요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피터는 어느새 아까까지의 무기력한 표정에서 벗어나 있었다.

역시 남자라면 이런 주제를 싫어할 수 없다. 더군다나 그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소비에 대해 말하며, 피터 또한 그리될 수 있다고 유진이 직접 북돋고 있으니 더욱 그러했다.

배에 오르고 나서 한동안 유진은 피터와 함께 요트를 구경하며 다녔다.

요안나가 두 사람을 이끌며 배의 구석구석을 알려 준다.

“그러고 보니 유진도 이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이게 겨우 두 번째 오르는 거니까.”

“산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죠?”

“석 달 정도 되었죠.”

모니카가 대답한다.

“석 달 동안 겨우 두 번이면…… 정말 아깝네요.”

“대신 우리 직원들이 알차게 사용하고 있어.”

“각 부서나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신청하면 원하는 날에 이용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구입한 거기도 하고요. 그런데 보통 주말에나 사용이 몰리고 주중에는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아하! 그건 무척 멋지네요. 나도 우리 팀원들에게 그런 복지를 지원하고 싶어요.”

“블랙볼트에도 원하는 때에 이용하라는 공문을 보냈을 텐데요?”

요안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랬었나요?”

“블랙볼트 스탭들은 다들 관심이 없어 보이더군요. 처음 봤어요. 요안나 직원들보다 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말이죠. 맨해튼의 트레이더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투자를 하니 밤낮이 없는 게 이해가 되는데, 블랙볼트 사람들은 그것도 아닌데 사무실을 퇴근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면서요?”

“……그런가요?”

피터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다들 굶주려 있으니까 그렇지.”

유진은 블랙볼트의 직원들이 여전히 스타트업의 정신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적지 않은 투자를 유치했고,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급여와 복지를 보장받았음에도 그들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해 있었다.

“그런 것도 같네요.”

피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인정했다. 사실 그 자신부터가 새벽부터 밤이 늦을 때까지 일에 파묻혀 있었다.

창업에 나선 뒤로 늘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인지 피터를 비롯한 모두가 여전히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진에게도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에게 유례없는 거액의 투자를 결행하며 유진은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리고 그 조건 중에는 창업자인 피터 헤이웍스에게 10년 동안 블랙볼트를 떠날 수 없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사직한다면 해당 기간 동안 관련 업무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독소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직원들에게도 10년까지는 아니지만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부정 경쟁을 방지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피터를 포함한 블랙볼트의 모든 임직원에겐 지금의 회사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셈이니, 만일 블랙볼트가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아주 오랜 시간을 기약 없이 묶여 있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개발자들이 충분한 창의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그들의 인생이 이 단 한 번의 시도에 달려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때로는 여유를 갖고 살도록 해. 인생이든 창업이든 단거리 경주가 아니니까.”

그들을 몰아붙인 자신의 책임에는 눈을 감은 채 유진이 천연덕스레 말했다.

“아직은 그럴 여유가 없어요. 이렇게 하루를 팽개친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불편할 정도이니까요.”

“그렇다면 하루라도 편하게 보내도록 하지.”

일행은 어느덧 메인 갑판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어느새 준비해 놓았는지 테이블 가득 요리와 술잔이 놓여 있었다.

갑판에 오르자 기다리고 있던 제복을 입은 급사가 술병의 뚜껑을 열고 일행에게 술잔을 건네주었다.

“평일 낮부터 알콜이라니…….”

피터가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받아 들었다.

“샤샤의 결혼식이 오늘이라고 했었나?”

지금까지 모르는 척하던 유진이 민감한 주제를 꺼냈다.

“알고 있으셨어요?”

피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우거지상을 하고 있으니 궁금해서 조금 알아보았지. 실례였다면 미안하군.”

언제나처럼 유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자리에 서게 되면, 그 어떤 경우라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무례가 되지는 않는다.

“아뇨. 어차피 우리 사무실 사람들도 다들 알고 있는데요. 뭐.”

피터는 말을 하다말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반쯤 비운다. 알콜에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그에게는 꽤 많은 양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왔던 모양이에요. 견디기가 어렵더군요.”

“당연한 일이지.”

유진도 자신의 잔을 비우고, 테이블을 떠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덱으로 걸어갔다.

피터가 조용히 따라 걸어와 유진의 곁에 선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근데 막상 닥치니 더 힘드네요.”

“나라도 몇 년이나 함께한 사람이 결혼하는 날이라면 그러겠지.”

“뉴욕에 오면 그녀를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으로 눈길을 주며 피터가 말을 이었다.

“동쪽으로 멀리 떠나오면 더는 그녀를 마주치지 않아도 될 터이고, 그녀와 같은 도시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었죠.”

피터 헤이웍스의 목소리는 우울함으로 가득했다.

“같이 일하던 친구들을 설득해 여기로 옮겨온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죠. 괜히 미안해지네요. 팰로앨토에 남아 있는 녀석들한테나, 날 따라 이곳까지 와 준 동료들한테나 모두 말이에요.”

“모두들 각자의 판단으로 결정을 내린 거야.”

“알아요. 하지만 리더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은 내게 있는 거죠.”

“물론 그건 자네가 리더로서 안고 가야 할 숙명 같은 거지. 절대 외면할 수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될. 너한테 아주 많은 사람의 삶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항상 잊어서는 안 돼. 버겁나?”

“잘 모르겠어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네요.”

피터는 손을 뻗어 난간 위에 올려놓은 잔을 들었다. 황금빛 샴페인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잔을 입으로 가져가 깨끗하게 비워 버렸다.

“향이 굉장히 좋네요. 틀림없이 무척 비싼 술이겠군요.”

“아마도 그럴 테지.”

“이런 술을 가격 따윈 생각하지 않고 마음껏 마실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원했었죠.”

곁에서 대기하던 소믈리에가 피터의 빈 잔에 다시 한번 술을 채워 주었다. 하지만 피터는 잔에 손을 대는 대신, 바다를 바라보았다.

“유진 덕분에 생각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그런 능력이 생겨 버렸네요.”

고맙다는 의미라고 보기에는 너무 처져 있었다.

“버거우면 잠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내가 여기서 멈추면 블랙볼트의 앞날은 큰 타격을 입겠죠.”

“너무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거 아닌가? 블랙볼트에는 자네 말고도 뛰어난 개발자가 잔뜩 있다고. 한두 달이나, 혹은 일 년쯤 자리를 비운다고 회사가 쓰러지지는 않을 거야.”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다. 블랙볼트에서 가장 뛰어난 개발자는 피터였고, 그가 자리를 비운다면 블랙볼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피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왔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진짜 대단한 분이세요. 수천만 달러를 투자해 놓고도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진짜 부자는 그런 건가요?”

“걱정하니까 말하는 거야. 블랙볼트의 미래는 틀림없이 피터, 자네의 손에 달려 있어. 아니, 단순히 블랙볼트뿐 아니라 세계 금융의 미래가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러니까 자네의 멘탈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를 치러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솔직히 나도 내가 잘난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날 과대평가해 주는 사람은 유진이 처음이에요.”

피터가 조금 수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군다나 그런 평가를 하는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점이 절 기쁘게 하기도 하고,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네요.”

“부담스럽다니 다행이로군. 그만큼 열심히 일할 거 아닌가?”

“맞네요. 하하, 역시 유진은 뛰어난 투자자네요.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언제까지고 축 처져 있을 수만은 없겠어요.”

대화가 이어지며 피터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물론 유진은 자신의 격려 몇 마디가 그를 아픔으로부터 구해 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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