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04화 (204/363)

204화 작은 실험

유진이 믿는 것은 그보다는 피터의 책임감이었다.

피터는 이미 유진으로부터 다른 어떤 기업에서도 제안받지 못한 투자를 받았다.

그리고 그게 결코 공짜는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안다.

피터는 결코 다른 사람의 기대를 배신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믿고 뉴욕까지 따라와 준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미 피터가 유진에게 지분을 넘기며 받은 대가 중 상당 부분을 직원들에게 그동안의 노고에 부합하고도 남을 만큼 지불했음에도, 피터는 그들의 인생에 대한 부채를 느끼고 있었다.

피터는 그런 남자였다. 동시에 몇 년을 함께 살아온 자신을 버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유력한 부동산 부호와 허니문을 가질 오랜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파할 만큼 여린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기도 했다.

여러모로 유진이 알고 있는 다른 사업가들과는 다른 섬세한 청년이다.

일론 머스크, 저커버그, 잡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거대한 기업을 이룩한 위대한 창업자들 중 상당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공격적이고, 독선적이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지지하는 일이 드물다.

어찌 보면 소시오패스나 반사회성 성격장애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성공에만 몰두한다.

때로는 어려운 시절을 함께 동고동락한 공동 창업자를 매몰차게 내쫓거나, 회사의 성장에서 얻는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에 조금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물론 외부의 경쟁자를 누르기 위해서는 그 어떤 방법도 서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차고에서 시작해 수백억, 혹은 수천억 달러 규모의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냉혹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은 사교 생활에서나 필요하지, 패배자에게는 파산이란 현실만이 남겨지는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그저 약점에 불과하다.

어떤 의미에서 기업의 경영은 피만 보이지 않을 뿐, 무차별하게 서로 싸우는 전국시대의 전쟁터나 다름없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성공한 창업가의 냉혹한 모습은 한 국가를 건국하는 건국 군주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가 그러했다.

그리고 피터 헤이웍스는 그런 예외적인 사람 중 하나이다.

피터 헤이웍스는 인간적인, 사실 너무나도 인간적인 남자였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에 버금갈 만큼 거대한 IT 기업을 겨우 서른 초반의 나이에 이룩했고, 그가 만들어 낸 AI는 세계 금융계를 뒤흔들어 놓을 만큼 강력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함께 일해 온 창업 동료들의 대부분과 함께 수십 년을 일하며 그들 모두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고, 흔하디흔한 동업자의 배신이나 불협화음 같은 것도 없었다.

한편으로 피터는 어린 시절을 함께해 온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할 만큼 여린 마음씨를 가진 사내이기도 하다.

마흔 살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미혼의 거부였고 당연하게도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여자가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그만한 조건에서라면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스캔들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

피터가 드디어 가정을 이루고 안착한 것은 거의 50이 다되어가는 무렵의 일이다.

그때까지 피터는 1조 달러가 훌쩍 넘어서는 거대한 IT 기업의 창업자이며 늘 부자 순위에서 세 손가락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음에도, 사소한 잡음조차 나오지 않는 조용한 사생활을 이어 갔을 뿐이다.

적어도 유진이 알고 있는 피터의 미래는 그러했다.

그의 늦은 결혼은 세간에 꽤 큰 화제가 되었고, 그 세기의 결혼이 있고 몇 년 뒤 피터의 성공 신화와 그의 사생활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넷플릭스에 방영되어 다시 한번 잔잔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진 또한 피터 헤이웍스와 사만다 헤이웍스가 직접 출연하는 다큐를 보았고, 피터 헤이웍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헬기가 오고 있네요?”

피터가 손을 들어 배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헬리콥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도착했나 보군. 마침 오늘 약속이 있었는데, 장소를 여기로 바꿔서 말이야.”

“제가 바쁜 시간을 빼앗은 것 같네요.”

피터도 유진이 자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나도 가끔은 시원한 걸 보고 싶을 때가 있어서 말이야.”

“유진은 참 이상해요. 그렇게 대단한 부자 같지 않아요.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사람을 편하게 해 주고…….”

“아니야. 전부 술책이라고. 이렇게 해야 자네가 날 더 의지할 게 아닌가?”

“그런 게 술책이라면 얼마든지 좋아요. 아무리 나라고 해도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렇게 받아들여 준다면 좋지. 어서 와요, 사만다.”

헬기에서 내려 메인 갑판으로 걸어오는 붉은 머리의 여인을 향해 유진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멋진 배로군요. 이런 곳에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은 피터 헤이웍스. 세계에서 제일 낭만적인 남자지요.”

“반갑습니다. 사만다 웨스트우드에요. 맨해튼에서 가장 로맨틱한 여자라고 소개하고 싶네요.”

사교성 있는 그녀가 먼저 피터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우울한 피터입니다.”

“어머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오늘 피터의 옛 여자친구 결혼식이 있다는군.”

유진은 일부러 주책맞게 말해 본다.

“정말이에요? 그럼 여기서 두 분이 아주 엄청난 복수 계획이라도 세우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나도 끼워 줘요. 사실은 나도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요.”

“복수라…… 재미있겠네요.”

“사실 여기 유진처럼 복수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도 없죠.”

사만다가 웃으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모르고 있었어요? 유진이 한 일 말이에요. 한국에서 제일 커다란 기업을 복수를 위해 무너트렸는데.”

“진짜예요?”

피터뿐 아니라 사실 많은 미국인에게 유진은 여전히 낯선 나라에서 온 큰 부자일 따름이다.

미국의 언론들은 그의 해외에서의 세세한 행적까지 들추며 보도하지 않았고, 미국인들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철저하게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유진이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와 파티에서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지만, 한국 대기업과의 관계 같은 것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에 관해서라면 조금은 관심을 둘지도 모르겠지만.

유진은 스스로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많았다.

“사만다는 이번에 새롭게 만들어질 자선 재단에서 일하고 있지. 그쪽으로는 사만다만큼 유능한 사람도 없거든.”

“그렇게까지 띄워 주시지 않아도 돼요. 유진의 재단에 들어가게 된 것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아! 자선 재단을 만든다고 했었죠? 규모가 엄청나더군요.”

그 소식은 그도 익히 들어 보았는지, 피터가 관심을 보인다.

“전 주로 제3세계의 빈곤을 해소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요.”

“정말 멋진 일이로군요. 솔직히 미국은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면서 너무나 무책임하게 행동하고 있어요.”

“맞아요.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인류를 위협하면서도 탄소 배출을 줄이자는 협력안조차 거부하고 있지요.”

유진이 무언가 행동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잠깐 사이에 둘은 정신없이 대화에 빠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유진의 작은 실험은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내놓을 것 같았다.

원래였다면 앞으로 20년도 더 지나서 처음 만나게 되었을 두 사람이다.

“미국에서 낭비되는 물자만으로 아프리카의 모든 굶주림을 해결하고도 남아요.”

“당장 미국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두 사람은 금세 사회적 이슈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사만다야 법대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사람이라 그런 성향인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고 피터가 유달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그는 미국 내 좌파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 그것도 실리콘밸리 출신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실리콘밸리의 사업가들 상당수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사회적 공정에 대해 긍정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당장 MAGA 또는 FANNG으로 불리는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의 거대 IT 기업들의 창업주들 대부분이 민주당 지지자이며, 매년 엄청난 규모의 정치 자금을 후원하고 있다.

한국과는 다르게 이들은 사업에서는 늑대처럼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사회에 대해서는 좌파적인 정책을 지원한다는 점이 처음 미국 사회에 들어간 유진에게는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사회 전체의 균형 있는 성장이 자신들에게도 이롭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여유가 생겨야 컴퓨터를 사용하고, SNS 서비스를 이용하고, 광고를 볼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단순한 자선 활동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같아요. 각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꼭 그렇게 볼 수만도 없어요. 저소득은 구조적인 문제이니 경제적 자립에도 한계가 있어요. 그렇다고 외부에서 사회 구조를 바꿀 수도 없는 거고요.”

유진은 어느덧 열띤 토론에 들어간 두 사람을 지켜보며 자신의 실험이 시작된 것을 자축했다.

이건 세상에서 오직 유진 단 한 사람만이 해 볼 수 있는 실험이다.

앞으로 수많은 일을 겪고 인생의 황혼기에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될 연인이, 정열로 가득한 20대에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못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 잔혹한 일이다. 그냥 두면 언제고 서로의 안식처가 되어줄 두 사람이, 너무나 이른 만남으로 인해 파국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비극적 결과가 일어날 것에 대해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이번 삶에서 유진은 세상에 수많은 영향력을 끼칠 것이다.

때로 누군가는 유진 덕분에 원래의 그것보다 나은 삶을 이룰 테고, 누군가는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유진의 행위가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을 두려워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유진은 벌써 한 나라의 지도자에 못지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

그가 지닌 부와 영향력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든 바꾸어 갈 것이다.

더불어 유진은 세상을 바꾸어 놓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게 잠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데, 또다시 한 대의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친구들을 몇 명 더 불렀는데, 괜찮겠지?”

유진이 피터에게 물었다.

“물론이죠. 이건 유진의 요트잖아요? 유진의 시간이기도 하고.”

“다행이로군. 저기들 오네.”

“어? 해리? 마틴? 뭣들 하는 거야?”

피터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에게 소리쳤다.

“피터가 잔뜩 쳐져 있다고 해서 놀려 주러 왔지.”

“우울해하는 모습 보이기 싫어 도망갔다고 해서 아쉬웠는데, 유진이 우리를 초대했더라고. 감사합니다, 유진. 멋진 요트네요.”

“울면서 찌질거리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피터의 동료들은 단순하게 함께 일을 같이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모양이다.

모두들 격의 없이 그들의 사장을 놀리고 있었다.

“다들…… 고마워.”

피터는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바다를 날아 여기까지 와 준 동료들과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유진을 번갈아 바라보며 감동받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좋은 동료들 같네요.”

사만다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유진에게 말했다.

“신뢰와 우정이 있는 조직만큼 탄탄한 것도 없지.”

“그러게요.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모르지만, 다들 좋은 사람들 같아요.”

“사만다의 조직도 그랬으면 좋겠군.”

“하아…… 그러게 말이에요.”

사만다가 쌀짝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막 생겨난 단체를 조직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시작부터 세계에서 가장 큰 자금을 보유한 자선 단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니, 이제 겨우 20대의 젊은 리더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감이 생길 것이다.

브라이언 디즈라는 명성 높은 총괄 디렉터 아래에서 큼직한 부서를 맡기에는 사만다는 아직 너무 어리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난 그쪽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으니 전적으로 사만다를 믿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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