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새옹지마
하지만 유진은 사만다가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낼 거라 믿고 있었다.
이미 그녀가 피터와 함께 적지 않은 위업을 달성해 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이 경험한 미래에서 피터와 사만다 헤이웍스 부부는 제3세계의 빈곤 문제에 있어 그때까지의 그 어떤 집단이나 개인, 혹은 정부보다 훨씬 더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노벨 평화상을 손에 쥐었다.
남편인 피터의 거대한 자본과 사만다의 리더십이 아주 훌륭하게 하모니를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유진으로서는 오늘 만남이 두 사람을 완벽하게 손에 넣을 기회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만다를 통해 세기의 천재라는 피터를 좀 더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무리의 모임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헬리콥터가 연신 배의 상갑판에 내려앉았다가 떠나길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다시 한 무리씩의 사람들이 요트에 탑승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자, 요트에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며 한바탕의 사교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대단한 준비성이네.”
유진은 이렇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만들어진 자리를 조금의 문제도 없이 해치우고 있는 모니카에게 찬사를 보냈다.
“처음부터 보스가 요구한 대로에요. 언제라도 100명 이상의 사람이 모여 즐길 수 있게 준비해 놓고 있어요.”
유진은 아랍의 한 부호에게 구입한 이 비싼 보트를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그가 투자한 기업들의 임직원 행사에 사용하게 해 주거나, 그가 직접 사교 행사를 여는 장소로 활용할 수 있기를 원했다.
100미터를 넘는 메가 요트를 보유한 부자 중 상당수는 요트를 자신만을 위한 은밀한 성처럼 사용한다.
본인이 이용하지 않을 때라도 결코 그 은밀한 곳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일은 없다.
또 소수의 부자들은 자신이 사용하지 않을 때 아주 높은 비용으로 임대해 주고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유진은 그 둘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천억 원이 넘는 요트를 항구에 정박시켜 놓고 놀리는 것도, 그걸 임대해 얼마 되지 않는 푼돈을 버는 것도 관심이 없다.
쓸데없는 낭비가 되지 않도록 그걸 잘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해,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쪽을 선택했다.
그런 면에서 자타공인 세계 제일의 부자인 유진은 때때로 자신은 아직 진짜 부자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여전히 유진의 삶은 사생활에서도, 비즈니스에서도 낭비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멋진 요트로군요. 이런 요트는 대체 얼마나 하나요?”
요트에 처음 승선한 사람은 누구라도 비슷한 인사를 하고, 비슷한 질문을 해 온다.
“반갑습니다. 느닷없이 초청했는데도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로지날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진이 부르는데 달려오지 않으면 제 손해가 아니던가요?”
이제 막 40대에 접어드는 야심만만한 젊은 하원의원이 밝은 표정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민주당 내 소수 정파인 블루독 연합에 속해 있는 로지날드는 여러모로 소수자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다.
미국에서 차지하는 인구비율에 비해 의회에서는 극히 적은 라틴계이며, 여성이고, 민주당에서는 보수적인 모임인 블루독에 속해 있으니, 늘 마이너리티만 찾아가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미국의 정치계에도 한국의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파벌이 형성되어 있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은 특정한 인물을 중심으로 파벌이 만들어지고 흩어지는 데에 비해, 미국은 코커스라는 정견에 따른 모임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로지날드가 속한 블루독은 민주당 내에 있으면서 독특하게 공화당의 담론에 일정 부분 동조하는 의원들의 모임으로, 말하자면 중도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도파라면 폭넓은 지지를 바탕으로 큰 세력을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시점 민주당의 중도파는 당내에서 가장 적은 파벌에 해당한다.
이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입장이 점차 극단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좌파적 입장인 사람들은 더욱 왼쪽으로 서고, 우파는 우파대로 극단적인 사고에 휩쓸리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로 들어서며 이러한 대립 구도는 더욱 커져, 이제 중도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호응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요즘 어떤가요?”
“죽겠어요. 정치고 경제고 완전히 엉망이에요. 나라 꼴이 이렇게까지 어지러울 수가 있나 싶어요.”
“꼭 유권자처럼 말씀하시네요.”
“지금 같아서는 차라리 평범한 유권자였으면 하는 심정이라니까요.”
유진이 웃으며 물었더니, 로지날드는 슬쩍 울상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 시점에서 쇄국정책을 펼쳐서 무얼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당연하겠지만, 공화당이 정권을 잡고 나면 민주당에서는 이렇게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로지날드의 불만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유진과 트럼프의 친분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일이고, 더군다나 정치인인 로지날드가 선을 넘어서는 일은 없다.
“사실은 동생 때문에 좀 안 좋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로펌에 들어갔는데, 거기 소문이 좀 안 좋거든요. 아무래도 지금 담당하는 소송이 꽤 불리한 모양이에요. 근데 꽤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있어 소송에서 지면 회사까지 위태로울 거 같아요. 그렇게 열심이던 아이가 실망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아요.”
“로지날드에게 동생분이 있었던가요? 모르고 있었네요. 이거 죄송하군요.”
“아! 친동생은 아니고…… 아빠가 이혼해서 엄마가 다른 동생이죠. 난 엄마 성을 쓰고, 걘 아빠 성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의 가족까지 기억하고 계셨나요?”
로지날드가 조금 기뻐하며 되물었다.
“물론이죠. 이제라도 로지날드에게 그렇게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 다행이로군요.”
만나는 사람의 행적이나, 가족관계를 머리에 넣고 있는 것은 유진이 무척 잘하는 일 중 하나이다.
오랜 시간 영업에 가까운 업무를 맡아 왔으니 당연하게 익힌 스킬이었다.
“대단하시네요. 유진 같은 거물이 기억해 주시니 고맙네요.”
“설령 동생분의 회사에 문제가 있어도, 새로 좋은 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미국에서의 변호사는 한국처럼 대단히 칭송을 받는 직업군은 아니다.
변호사 시험으로 한 해에 수만 명의 새로운 변호사가 탄생하고, 뉴욕에서만 5,000명 가까운 신규 변호사가 배출된다.
좋은 로펌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좋은 로스쿨을 나와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펌이 망한 뒤에 또다시 좋은 취직 기회를 얻는 것이 쉬울 리는 없지만, 언니가 뉴욕주의 연방하원의원이라면 이야기는 좀 다를 것이다.
미국도 사람 사는 곳이라, 가족 중에 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커리어를 쌓아 나처럼 정치계에 들어서겠다고 말하곤 했거든요. 처음부터 너무 큰 난관이 와 좌절할까 걱정이 앞서네요. 그리고 난 그 애의 취업 같은 걸 도와줄 생각은 없고요.”
로지날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야망을 위해서라도 혹시라도 훗날 약점이 될만한 일은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한편으로는 유진에게 말을 꺼내는 것이 결코 청탁 따위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유진은 그녀의 동생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말 대신 위로의 말을 꺼냈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역경이 있을 때면 동양에서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을 쓰고는 하죠.”
때때로 유진은 자신이 가진 동양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오히려 적절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미국인들에게 동양은 여전히 신비를 품은 곳으로 남아 있어, 동양의 고전적인 일화나 어구를 사용하면 상대가 좋아하고는 한다.
“새옹지마? 따라하기도 어렵네요.”
역시 생각대로 로지날드는 입술을 모아 유진이 했던 발음을 따라하려 애를 써 보고,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기다린다.
“예전 변경의 한 노인에게 아주 좋은 말이 한 마리 있었습니다. 한데 어느 날인가 이 말이 우리를 넘어 도망가고 말았죠. 사람들은 노인에게 그의 불행을 위로했지만, 노인은 오히려 이게 복이 될지 누가 알겠냐 말했어요. 물론 사람들은 그 노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한데 그 말이 한 떼의 야생마를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으니 축하한다고 말했죠. 그러자 이번엔 노인이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며 축하를 사양했습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노인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말이 도망한 것이 좋은 결과가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말이 늘어난 것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로군요?”
로지날드는 보통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총명하게 이야기의 다음을 예측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노인의 아들이 그 야생마 중 한 마리에 타다가 떨어져서는 다리를 다치고 말았거든요.”
“아! 확실히 동양의 철학에는 어떤 고상한 관념이 흐르고 있네요.”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느꼈는지, 혹은 그걸 말하는 사람이 유진이기 때문에 그렇게 감탄을 하는 것인지는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노인에게 닥친 불행을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요. 이게 또 복이 될지 누가 알겠냐고요.”
“흐음, 다리를 다친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인 경우가 있을까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건장한 젊은 남자들은 모두 징집되어서 전쟁터로 가야 했죠.”
“아! 그러면 그 다리를 다친 아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던 거군요.”
로지날드가 깨달았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네. 예전의 전쟁은 무척이나 참혹해, 전쟁터로 끌려간 사람들은 대개가 죽거나 끔찍한 장애를 갖고 살아야 했죠. 다리를 다친 정도는 정말로 다행인 거였어요.”
“멋진 일화로군요. 재앙이 때로는 축복이 되기도 하는 법이라는 말이죠?”
“세상일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좀 더 가깝겠지요?”
“맞아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고마워요. 덕분에 기운이 조금 났어요.”
빈말은 아닌 듯, 그녀의 표정은 정말로 밝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