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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06화 (206/363)

206화 플러싱

“그 애한테도 꼭 이야기를 해 줘야겠어요. 오랜만에 아주 좋은 이야기를 들었네요. 생각해 보면 나라고 늘 좋은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에요.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일 때문에 오히려 더욱 좋은 결과가 생기고는 했었지요.”

다행히도 로지날드는 유진의 말을 아주 잘 이해했다. 덕분에 두 사람의 대화는 아주 매끄럽게 이어졌다.

“……그래서 브롱스나 퀸즈에도 부흥이 필요해요. 다른 지역에 비해 점점 낙후되는 정도가 커져 가고 있어요.”

그녀가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된 지역은 브롱크스와 퀸스 북부를 아우르고 있어 지역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히스패닉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

한편으로는 뉴욕에서도 손꼽히는 한인 거주 지역이 있는 곳이기도 해서, 유진으로서도 꽤 신경을 쓰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플러싱의 한인 타운에는 저도 꽤 신경을 쓰고 있어요.”

로지날드가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이번에 플러싱을 좀 더 현대적으로 바꾸는 계획안이 들어왔더군요.”

정확히는 한인 타운의 개발 계획일 터이다.

“아주 멋진 계획안이에요. 청사진대로라면 낙후된 지역이 맨해튼처럼은 아니지만, 좀 더 멋진 장소가 될 수 있겠어요. 거리도 깨끗해지고, 관광객도 늘어나겠지요.”

그녀에게까지 전해진 계획은 유진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뉴욕의 변두리 지역인 플러싱의 한인 타운을 글자 그대로 멋진 장소로 바꾸려는 계획이었다.

뉴욕 중에서도 퀸즈 지역에는 맨해튼보다 많은 5만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모여 산다.

그들이 주로 몰려 있는 플러싱은 뉴욕 사람들에게는 흔히 코리아타운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많은 뉴욕 사람들은 한국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곳이 바로 플러싱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뉴욕 사람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는 플러싱의 거리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한국인들에게 중국인들이 모여 있는 몇몇 지역의 모습이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문제는 플러싱이 지금의 한국 거리와는 무척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 방문한 한국 사람들이 처음 플러싱에 들러서면 시간이 멈춰 버린 것 같은 충격을 받기도 할 정도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며 서울과 지방 도시들이 정비되고, 각종 미화 사업을 통해 깨끗해지고 화려해진 것에 반해, 플러싱은 정말로 90년대의 한국을 보는 듯한 거리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더군다나 일본인들이나 중국인들이 모여 있는 거리는 그 나라만의 특징적인 문화가 드러나는 데 비해, 한인 타운은 그저 간판에 한글이 적혀 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대단한 특색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니 한글에 익숙하지 못한 미국인에게는 괴상한 문자가 난무하는 낙후된 장소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불법 성매매 마사지 업소나 가라오케 따위가 여기저기 난무해 있어, 뉴욕 시민들이 보는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더욱 하락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유진으로서는 그 스스로의 이미지를 위해서라도 플러싱이 조금 더 고급스러운 모습이 되기를 원했다.

이제 세계적인 한류 열풍이 미국까지 상륙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벌써 틴에이지 사이에서는 한국의 아이돌이 조용하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모양이다.

곧 그 뒤를 이어 한국의 영화, 드라마, 코믹 쇼 같은 다양한 콘텐츠가 미국에 상륙해 빠르게 인기를 얻어 갈 것이다.

그러한 한국 연예인과 문화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좋은 의도로 방문한 한인 타운이 낯설고 촌스럽다면, 기껏 찾아온 사람들의 호기심을 꺾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유진으로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류 문화로 인해 한국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 미국인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그런 관심이 한국에 대한 호의로 바뀌기를 원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고 있는 유진 그 자신에게 호감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 생각이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의 건축 설계 업체들에 의뢰를 주어 플러싱 한인 타운 개조 계획을 만들었다.

물론 해당 지역 커뮤니티와 연계해서 개발 계획을 조금씩 수정해 나가며 지금의 청사진에 이르렀다.

그 거대한 계획에 필요한 자금은 건물주들과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가게 주인들의 부담이지만, 상당 부분은 유진이 대출해 주거나 보조해 줄 계획이다.

거의 몇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의 지출이 예상되고 있지만, 이미 해당 지역 메인 구역의 몇몇 부동산을 매수해 놓은 상황이라 이 지역의 개발로 인한 이익을 계산해 보면, 유진으로서도 큰 손해라 할 수는 없다.

게다가 어차피 이익을 바라보고 시작한 계획도 아니다.

하지만 부동산 개발에 따른 이익도 생기고,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영향력을 늘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유진의 이미지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여러모로 비용에 비해 효과가 큰 프로젝트이다.

“시 정부에서도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로지날드 본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지역구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다음 선거에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고 그녀는 정치인이다. 언제나 그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개발이 오로지 플러싱에서도 일부인 한인 타운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말이 많아요.”

플러싱에는 한인 타운뿐 아니라 중국인 커뮤니티도 있고,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오직 한인들에게만 편의를 봐 주면 솔직히 곤란해요.”

로지날드가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가장 큰 지지자들은 역시 히스패닉이다. 그러니까 뭐든 히스패닉을 위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물론이죠. 하지만 한인 타운이 개발되며 좀 더 많은 관광객이 유입되면, 주변의 커뮤니티도 좋은 영향을 받을 거라 예상된다고 하더군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먼 후의 일이겠지요? 아시겠지만…… 유권자들은 그렇게 먼 훗날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아요.”

민주주의의 가장 큰 단점이 그런 것이리라. 길어야 10년, 짧으면 2년마다 새로운 대표를 뽑는 민주주의에서 새로운 리더가 아주 먼 미래를 바라보고 정책을 내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권자들은 먼 미래를 바라보지 않고, 당장 내일 자신들에게 어떤 이익을 줄 것인지를 묻는다.

마치 현대 주식회사의 주주들이 장기적인 플랜보다 당장의 이익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몇몇 커뮤니티에 대해 논의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대형 건설 사업에 대해서는 시 정부의 허가와 도움이 필수적이다.

유진 스스로가 뉴욕에서 관련 업무를 수십여 년 동안이나 해 온 탓에 미국의 관행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건 유진에게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지역의 문제는 지역에서 풀어야 한다.

처음부터 예상했고, 어느 정도의 지출도 각오하고 있었다.

이번 경우라면 주로 히스패닉 커뮤니티에 어떤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가 논의의 중점이 될 것이다.

한인타운을 잡아먹으며 급속하게 커져 가고 있는 중국 커뮤니티에 대한 지원은 아마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해외 어디에서나 지극히 폐쇄적인 중국인들의 커뮤니티는 늘 해당 지역에서 경원시 되고 있었고, 그만큼 외부의 지원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질적인 협상은 물론 유진이 아닌 실무자들의 것이었다.

“제안 드릴 수 있는 것은 좀 더 많은 양질의 푸드뱅크, 의료센터, 그리고 공립학교들에 대한 지원 방안 등입니다.”

협상에 나선 것은 유진이 조성하기로 한 자선기금 측이다.

유진은 이미 1천억 달러에 달하는 기금을 만들겠다 발표했다. 그중 절반 정도는 미국 내에서 사용하겠다 했으니, 적어도 500억 달러짜리 초대형 기금이 마련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기금의 활용 방법은 전적으로 유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상당수는 푸드뱅크 사업에 투입될 예정이지만, 그 나머지 부분도 절대 적지 않은 규모가 될 것이다.

어차피 지출할 기부금이라면, 유진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적재적소에 투입되는 자산은 해당 지역 커뮤니티뿐 아니라, 로지날드 같은 정치인에게도 호감을 얻어 낼 수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듯이, 유진의 자선 사업은 저 밑바닥에서부터 그의 이미지를 차근차근 닦아 올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급조된 선상 파티는 그 뒤로도 몇 명이나 되는 주요 인사들과 만나 친분을 쌓고, 처리해야 할 협상의 자리로 이용되고 있었다.

“굉장하네요. 굉장히 많은 힘 있는 사람들이 유진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었어요.”

위로해 주러 온 동료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던 피터가 종종 찾아와 이야기를 건넨다.

“사만다가 알려 주더군요. 오늘 왔던 사람 중에 뉴욕의 정치인이 세 명이나 되고, 주 검찰이 한 명, 부동산 재벌이 두 명…… 유진이 이야기를 나눈 사람 중에 대단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 어쩐지 휴식을 하러 왔다가 평소보다 더 일한 느낌이야.”

“그런 것 치곤 꽤 즐거워 보였어요.”

“음…… 그런 것 같아. 한 명 한 명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다 중요한 것들이니까.”

전부 유진 스스로가 기획한 일들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자원을 투입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입장을 나누며 협력하고, 때로 협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한때 조직에 속한 입장에서도 그런 프로젝트를 만들고 일을 진행시키는 자체를 즐겨 왔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삶에서도 여러 문제를 겪어 왔지만, 일 자체는 늘 즐기며 살았었다.

“부러웠어요. 유진처럼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여전히 새로운 것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요.”

“사실 피터나 나나 서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거 같아.”

“그렇기도 하겠네요. 나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오늘 유진을 보고, 사만다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어쩐지 하고 싶은 일이 훨씬 더 많아진 것 같아요.”

“다행이네.”

이미 유진은 피터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얼추 예상하고 있었다.

“좋은 하루였어요.”

피터 헤이웍스는 진심으로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녀에 관한 생각도 잊고 있더라고요.”

“다행일까?”

“나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아침처럼 슬프지는 않아요. 이젠 그녀의 결혼을 축하해 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혹시 전화를 한 건 아니지?”

“사만다가 좋은 생각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하하.”

아마도 전화를 하려던 걸 말린 모양이다.

“여하튼 최악의 하루가 되지는 않았어요.”

피터는 슬쩍 저쪽에서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만다를 훔쳐 보며 말했다.

“기왕이면 최고의 하루가 되었으면 좋았겠는데.”

“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래도 피터는 자신의 전 연인의 결혼식 날, 새로운 사랑을 맞이한 모양이다.

잠시 유진의 곁에서 그날의 소감과 느낀 바에 대해 즐겁게 떠들던 피터는 사만다가 그 누군가와의 대화를 마치자 재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좋은 하루네요. 누구는 종일 숫자와 씨름하고 있는데, 보스는 수평선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군요.”

뒤늦게 헬기를 타고 날아온 요안나가 볼멘소리를 한다.

“아직 하루가 다 끝나지 않았어. 요안나한테도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네.”

그녀에게 샴페인이 들어 있는 잔을 건네며 유진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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