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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07화 (207/363)

207화 무서운 놈이 온다.

“정말 뭔가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요안나가 해군 제복을 입은 선원에게서 샴페인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 모양이네? 고향의 문제인가?”

유진은 그녀의 고민이 비즈니스와 관계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요안나라면 일 이야기를 이렇게 푸념하듯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맞아요. 요즘 매스컴에서 줄기차게 요청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녀의 말에는 누구에게, 그리고 무얼 요청하고 있는가가 빠져 있었지만, 유진은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안나가 매스컴에 나온 지도 꽤 오래됐으니까. 사람들은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지. 특히 아름다운 공주님에 대한 이야기라면 누구라도 궁금할 거야.”

요안나의 행적을 네덜란드 국민들이 궁금해할 것임을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네덜란드 국왕인 빌험 8세는 특유의 서민적 행보로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유럽에는 많은 왕가가 있지만, 네덜란드의 왕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는 독보적이었다.

국왕의 장녀인 요안나의 근황에 대해 수많은 네덜란드 언론이 궁금증을 내비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는 평범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싶다는 요안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뉴욕에서의 생활을 일절 보도하지 않았지만, 언론과 국민들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최근에 몇몇 신문에서 내 어릴 때 사진을 올리면서 이목을 끄는 모양이에요.”

지금껏 공개된 요안나의 사진은 그녀가 10대 때 가족과 함께 찍은 것들이었다.

이미 공개된 지 10년도 더 지난 사진까지 다시 찾아내서 올릴 정도라니. 요안나는 슬슬 언론의 눈을 피하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번 휴가에는 오랜만에 집에 다녀오려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궁에 드나드는 모습이 찍히는 것을 꺼리는 요안나는 고향에 휴가를 즐기러 갈 때에도 헤이그의 왕궁 대신 교외의 별장에서 가족들을 만나곤 했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 이번에는 별장까지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이 찾아올 것 같다.

“한번 매스컴에 오르기 시작하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죠.”

아무리 셀러브리티라고 해도, 보통 새로운 화제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로열 패밀리라면, 언제까지 관심이 이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특히나 요안나는 왕위에 가장 가까운 왕족이니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일반인의 삶을 즐기고 있던 요안나는 매스컴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듯했다.

“언제까지고 감추고 살아갈 수는 없잖아? 왕위 계승을 포기할 게 아닌 이상은 말이야.”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요안나도 굳이 왕위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비록 현대에는 유럽의 왕가에 어떤 실질적인 권한 같은 게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명예와 혜택을 포기할 필요는 없으니까. 더군다나 네덜란드는 적어도 법적으로 국왕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은 더 미뤘으면 좋겠어요. 한 마흔 살까지만이라도요. 하하…….”

요안나도 스스로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평범하게 살고 싶은 마음 자체를 책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한두 해라도 더 미루어 보는 수밖에 없겠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다닐 시간이 이제 1년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쯤이면 요안나도 당당하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왕궁을 드나들 수 있을 것이다.

“맞아요. 한두 해라도 지금처럼 편한 삶을 마음껏 즐겨야겠어요.”

“참!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윌리엄과 협력해서 건설사들 지분 매입에 힘을 써 줘.”

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비즈니스로 돌아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건설사들이라면, 뭔가 호재가 있는 모양이지요?”

요안나가 눈을 빛내며 물어온다. 역시 그녀는 일 얘기가 가장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10대 건설사 중에서 완전히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곳으로 두어 곳을 선정해서 매입하도록 하지. 그러고 보니 로얄 밤 그룹은 어떻게 됐지?”

로얄 밤 그룹은 19세기에 창립된 건설 회사로,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규모가 큰 건설 회사이다. 시가 총액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 오랜 역사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 글로벌 10대 건설 회사의 목록에 이름을 올려놓을 정도이다.

“FO 펀드에서 로얄 밤 그룹의 지분을 상당수 가지고 있어요.”

요안나가 운용하고 있는 펀드 중 FO펀드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위한 펀드이다. FO펀드는 다시 그 지도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별도로 나뉘어 운용되고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지도자들을 위한 별도의 펀드에서, 네덜란드와 영국 등지의 주요 기업에 대해 투자를 이어 가고 있다.

이는 그 지도자들이 자국의 기업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적어도 50%까지는 확보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기술력으로 본다면 역시 Grupo ACS나 Vinci 둘 중 하나는 필요하겠네요?”

요안나는 짧은 대화를 통해 유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건설사로 꼽히는 세 곳은 프랑스의 Vinci와 스페인의 Grupo ACS, 그리고 미국의 벡텔이다.

이중 벡텔은 벡텔 가문의 소유이니 지분을 욕심내도 소용이 없고, ACS그룹 또한 유수의 건설사인 독일 호흐티에프가 5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호흐티에프는 다시 미국의 터너사의 계열사이니 지분을 손에 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세계 10대 건설사 중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술력은 로얄 밤 그룹도 충분하니까.”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확정할게요.”

요안나는 멋진 보트에서의 여가보다, 새롭게 맡은 일거리가 훨씬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녀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는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그러고는 곧장 스마트폰으로 회사 직원들과 회의를 열고 바로 업무에 빠져 버린다.

그녀에게 일거리를 준 유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쩌다 보니 악덕 사장이 되어 버린 꼴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미안하지만은 않았다. 일 자체를, 특히 도전적인 일 자체를 즐기는 요안나기 때문이었다.

요안나는 이제 세계 10대 건설사 중에서 두 개 정도를 완전히 손에 넣을 방법을 간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당장에 그 일을 위한 팀이 구성되고 세계 곳곳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적어도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들어갈 일이다.

하지만 이 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대략 1조 달러짜리 초대형 프로젝트이니,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겠지.

[다산건설은 오늘 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에 건설 예정인 신도시인 네옴시티의 주요 건설 부문의 주 사업자로 선정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오는 2030년 완공을 목표로 모두 5,000억 달러 이상이 투입될 네옴시티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의존의 경제에서 환경과 미래 기술의 첨단에 서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기 위한 야심 찬 프로젝트의 일환입니다. 서울시의 43배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으로, 유례없는 비용이 투입될 이 사업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미래가 걸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편, 제일상사의 건설 부문 또한 해당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로써 다산건설과 제일상사 건설 부문은 최소한 각각 1천억 달러 이상의 신규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두 건설사 및 그룹 계열사의 주가 또한 연일 상승…….]

2019년 초, 한국 건설 업체들의 사우디 대형 건설 프로젝트 참여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격적으로 공개되었다.

중동 지역에서 건설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한국 건설사들의 특기이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그 규모부터가 남달랐다.

적게는 5,000억 달러, 많게는 1조 달러까지로 추산되는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한국의 대표적인 두 그룹이 참여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단순히 주식 투자자들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정확히 어떤 도시인지는 모르지만, 추산되는 금액만으로도 국가 경제에 적지 않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기뻐할 사람은 유진이다.

이번 건설 사업에서 다산그룹과 제일그룹이 참여하는 대가를 톡톡히 받아 낼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가장 핵심적인 사업 분야를 맡게 될 네덜란드의 로얄 밤 그룹과 영국의 발포어 비티, 이 두 기업을 완전히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건설사들은 건설 시행 능력에 있어서는 그 어떤 세계적 기업에 비해도 견줄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핵심적인 설계와 감리는 서구의 대형 건설사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이번 네옴시티 프로젝트에서도 핵심 부분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기업들이 맡고, 시공은 다산과 제일이 가장 큰 부분을 나누어 먹기로 했다.

한편 이 업무를 주최하는 사우디의 왕가 또한 적절한 지분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진이 확보한 로얄 밤 그룹과 영국의 발포어 비티, 그리고 다산건설과 제일상사의 지분 중 일부는 요안나가 운영하는 FO 펀드의 주요 고객 명의로 넘어갔다. 추후 사업의 성과에 따라 지분의 가치는 적절한 수익으로 사우디 왕가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것이 모든 대형 프로젝트의 본질이다. 이미 지난 삶에서부터 관련 업무에 종사해 온 유진은 이렇게 이익을 나누는 것에 익숙했다.

“다산전자의 프리 스케일 인수가 중국 정부에 의해 정상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이제 다산전자는 모두 70조 원 규모의 대형 반도체 기업으로, 제일전자에 이어 아시아 3위 규모의 반도체 회사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2010년도로 넘어오면서 전자, 반도체 기업의 인수 합병은 그전보다 훨씬 어려워졌다.

세계 각국 정부는 반도체 업체 간의 인수 합병에 대해 자국의 독점법 위반을 거론하며 승인을 해 주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도 다산 전자에서 프리스케일을 인수하기까지는 그야말로 수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특히 반도체를 통해 대국굴기의 기치를 내세우고 있는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어 내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유진이 이방카 트럼프 패션 그룹 차이나를 적절한 가격으로 넘기고, 그걸 차지한 누군가가 홍콩 증시에 상장시키며 엄청난 액수를 벌어들인 덕분에 프리스케일 인수 허가가 나올 수 있었다.

더불어 유진은 중국 증시에서 조금 더 많은 자유를 얻어 내 좀 더 과감한 중국 내 투자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아직까지 중국에서는 쓸만한 투자처가 많았다. 그렇게 여러 가지 정신없는 일들을 처리하는 사이에 거대한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중국에서 전염성 질병이 발생해 빠르게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 정부의 최상층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어떠한 언급조차 받지 못한 사실을 존 오웬 브레넌은 질병 발생 하루 만에 보고해 왔다.

아직 미국 언론은커녕 중국의 언론에서도 한 번의 보도도 내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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