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10화 (210/363)

210화 마이너스

“최대한 공격적으로 숏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WTI(서부 텍사스 중질유) 5월 인도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도록.”

3월 하순의 어느 날, 오전 오일 선물 분야 수석 시장전략가인 휴고 워싱턴이 트레이더들에게 지침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내려간 것 같은데요?”

오일 선물 가격은 2018년 78달러 선에서 꾸준히 하락해 이 시점에서 이미 35달러를 오가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이 정도가 마지노선이라 여기는 분위기다.

지금도 이미 기름값이 이보다 더 떨어지면 생산하는 쪽에서도 더는 기름을 퍼 올려야 할 이유가 없을 정도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이 시장의 예상과는 꽤 동떨어져 있으니,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코로나 쇼크로 각국에서 경제 활동이 위축되고, 관광 산업은 올스톱 되었지. 항공사들이 비행기를 띄울 이유가 사라져 버렸어. 당분간 기름이 남아돌게 될 거라는 분석이야.”

휴고 워싱턴은 동양 출신의 신입 트레이더의 질문에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보고 있는 건가요?”

질문을 던진 트레이더도 위쪽의 판단에는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진 지침이 크게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지 상황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신입이라 해도 무려 1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을 움직이는 만큼 해당 상품은 물론이고, 제반 사항에 대해 최대한 많이 알고 있을수록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마이너스로 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번 코로나 사태가 모두의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모양이야.”

“맙소사…….”

시장전략가의 입에서 나오는 비관적인 말에 여기저기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오일 가격이 마이너스가 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WTI가 마이너스라고요?”

“그래. WTI가 말이야.”

원유 가격이 마이너스로 떨어지는 일이 전례 없는 것은 아니다.

석유나 가스의 경우 생산해서 보관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사 가는 사람에게 오히려 비용을 지불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단지 그런 경우는 극도로 품질이 낮은 원유이거나, 송유관에 문제가 생기는 아주 특이한 경우에만 두어 차례 발생한 적이 있을 뿐이다.

하나 미국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WTI의 거래가가 마이너스까지 가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경제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는데, 사우디와 러시아는 이번에도 감산 협상에 실패했다. 결국엔 생산된 원유는 늘어나고, 소비는 극도로 위축될 테니 지금 가격이 바닥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렇다고 해도 마이너스까지 바라보고 공략을 하는 것은 꽤 위험하지 않은가요?”

“물론 위험성은 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고 있다.”

휴고 워싱턴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트레이더들 대부분이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다시 한번 시장에서 예측하지 못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려는 모양이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치고 도박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라면 혼자서 1억 달러를 굴리는 무시무시한 트레이딩 시장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시장전략가의 가이드라인 발표가 끝나자, 트레이더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바쁘게 포지션을 잡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온 기준을 근거로 각자의 전략에 따라 선물과 옵션을 섞어 최선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포지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지만 모두들 희망에 부풀어 있다. 이번 공략이 끝나면 아마 일반인들이 평생을 벌어야 만질 수 있는 수익을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온 가이드라인은 이번에도 그 정확성을 입증했다.

4월 10일로 들어서면서 오일 선물 가격은 20달러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이때쯤 벌써 오일 선물 팀은 기록적인 수익을 보이고 있었다.

* * *

“그래. 정신없이 바빴지. 넌 어때?”

4월 하순의 어느 날, 언제나처럼 샌드위치로 가볍게 점심을 마친 김현철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국의 지인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다.

한국의 증권사에 근무하는 옛 동료가 잠이 오지 않는다며 전화를 해 왔기에, 잠시 휴식 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거기도 그러냐? 하기는…… 요즘은 뉴욕 다음으로 큰 시장이 한국이라고 하더라.”

김현철이 통화하고 있는 상대 또한 비슷한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의 개미들이 전보다 더 해외 파생상품에 대한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작년 한 해 동안에만 무려 4,000조 원이 넘는 금액이 거래되었다고 하니, 실로 열풍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만큼 손실 규모도 크다. 개미들은 많게는 매년 1조 원에 달하는 손해를 보고 있었다.

- 그게 다 너희 강 회장님 때문이야.

“그게 왜 우리 보스 때문이냐?”

- 당연한 거 아냐? 강 회장님이 처음 대박을 터트린 게 오일 선물이었잖아? 그걸 보고 사람들이 오일 선물이 진짜 대박이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올해는 작년이랑 또 달라. 기름값이 엄청나게 떨어졌잖아. 그래서 다들 이쯤에서 들어가면 크게 벌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어? 어어…….”

상대의 말에 김현철은 잠시 주춤했다. 지금 오일 가격이 바닥이라 생각하고 매수에 들어가면 틀림없이 피를 보게 된다.

더군다나 파생상품은 주식같이 전액이 아니라 소액의 증거금만으로 투자할 수 있어, 자칫 판단을 잘못하면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오일 선물 1계약 물량은 1,000배럴. 현재가로 하면 대략 2만 달러 부근이지만, 위탁증거금 200만 원으로 1계약을 투자할 수 있다.

또 레버리지까지 사용하면 다시 그 1/10의 비용으로도 투자가 가능하다.

물론 그런 레버리지를 사용하면 단지 1%의 반등으로 증거금을 전부 날려 버린다.

위에서 내려온 지침처럼 정말로 유가가 마이너스에 근접한다면 한국의 개미들은 대부분 투자한 금액을 전부 날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김현철은 내색하지 못한다. 회사의 기밀을 말할 이유도 없고, 개미들이 그렇게 손해만 보고 나가 떨어지는 것은 하루 이틀 사이의 일도 아니다.

- 우리 쪽에서는 아직 확신을 못 하고 있어. 대체 어디가 바닥인지 누가 알겠어? 그런데 개미들은 엄청 과감하다니까. 뭔가 한 번 꽂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투자하니 말이야.

“그러게 말이야. 파생상품이 절대 쉽지 않은데.”

- 솔직히 우리 같은 사람들도 절반은 손해를 보는데 말이야.

증권사나 자산관리사에 소속된 트레이너라고 손실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일반인과 별다르지 않은 수준의 승산이 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전문 트레이더들은 손해를 최소화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 어때? 뉴욕은 살기 좋지?

“뭐. 그럭저럭.”

서울증권에서 근무하던 김현철이 뉴욕으로 건너온 것은 일 년 전의 일이다.

세계적인 투자자 강유진이 경영하는 투자회사에서 한국인 직원을 확충한다는 말에 누구보다 빠르게 지원했고, 경력 덕분에 큰 무리 없이 합류할 수 있었다.

뉴욕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주거비나 생활 물가가 서울보다 비싼 거야 익히 알고 있던 일이었지만, 급여가 두 배 이상 올랐고 성과급은 기본 보수보다도 컸으니 경제적으로 전보다 훨씬 더 풍족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옛 동료에게는 그럭저럭이라 말했지만, 사실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삶을 즐길 수 있었다.

- 그럭저럭은 무슨. 아주 신이 났더구만. SNS에 올린 사진 봤어. 멋진 백인 여자들이 네 곁에 잔뜩 있더라.

“하하. 술집에 가면 내가 좀 인기가 있는 편이기는 하지.”

- 인기는 무슨. 너 거기서 회사 자랑하는 거지? 그래서 여자들이 그렇게 잔뜩 모인 거잖아.

“아니, 뭐. 그렇다고 다니는 거 안 다닌다고 할 수도 없고 말이야. 흐흐, 사실 말이야. 우리 회사 다니면서 한국 출신이라고 하면 다들 끔뻑 넘어간단 말이야. 보스랑 같은 나라 출신이면 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나 참. 그러면 그렇지. 니가 무슨.

옛 동료의 반응에 김현철이 발끈한다. 물론 진심으로 발끈한 것은 아니고, 반쯤은 웃음 섞인 것이었다.

“내가 뭐가 어때서? 인간 김현철, 한국에서도 인기 많았어.”

- 인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 웃기네. 미국에서 한국 사람이라는 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러니까 너도 한 번 생각해 봐.”

- 뉴욕 물가 비싸다던데…… 가서 집세 내고 나면 남는 게 있을까 모르겠다.

“쓸데없는 소리야. 여기서 받는 돈이면 집세 같은 거 걱정도 안 해.”

- 하긴. 너도 꽤 많이 받는 편이지?

“거기 있을 때보다야 낫지. 운용 금액부터가 틀리니까.”

- 얼마? 지난번에 1억이라고 했었지?

“올해부터 2억 달러로 늘었어. 작년 성과를 고스란히 인정받았으니까.”

서울에서 프랍 트레이더로 근무하고 있을 때 김현철의 운용 금액은 200억 원. 그리고 월 목표 수익은 7,000만 원에 손실 한도는 월 2억 원, 연 5억 원 수준이었다.

하지만 뉴욕으로 건너와 그에게 맡겨진 액수는 처음부터 1억 달러였다.

서울에서 고참, 차장급 트레이더가 굴리는 액수가 500억 원 수준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액수이다.

- 2억 달러? 와! 그럼 인센티브도 장난 아니겠네?

“그렇지. 여하튼 여기 있는 사람은 아무도 급여 따위 신경 안 쓰니까.”

모든 숫자가 한국에 있을 때보다 크지는 않다. 서울증권에서는 수익금의 20% 정도를 인센티브로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훨씬 더 낮은 비율의 인센티브만이 보장된다.

하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전략이 워낙 정확한 탓에 손실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수익의 규모가 상당한 덕에 실제로 손에 쥐는 돈은 비교할 수조차 없다.

- 아, 진짜. 나도 갈까? 휴우…… 우리 애들만 아니면 나도 너 갈 때 같이 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아무래도 가정이 있는 사람은 싱글에 비해 몸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너만이라도 먼저 건너 와. 우선 자리 잡고 가족들은 천천히 건너오면 되잖아?”

- 그렇기는 한데. 근데 내가 하는 일도 괜찮아?

“그럼. 그쪽도 능력만 되면 엄청 수월해.”

김현철이 맡은 분야인 전략 트레이딩이 해당 상품의 만기일까지의 포지션을 확보하고 중장기적 전략을 사용하는 데에 반해, 통화 상대인 오주원은 단기적인 운용을 위주로 하는 데이 트레이더로 서로 분야가 사뭇 다르다.

자금이 풍부하지 않은 소규모 오피스의 경우라면 위험도가 낮은 데이 트레이더의 비중이 높지만, 김현철이 근무하는 곳은 데이 트레이더의 한계 때문에 전략 트레이더들에 비해 훨씬 더 작은 규모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데이 트레이더가 없는 것은 아니다.

- 너희 쪽은 주로 가이드라인 대로 움직이는데, 데이 트레이더는 찬밥 아니야?

“전혀. 가이드라인이 있으니 일하기 쉬운 건 마찬가지야. 얼마나 수익을 내느냐의 문제이지.”

- 그렇구나. 아무래도 고민 좀 해 봐야겠다. 어차피 갈 거라면 애들 더 커서 학교 들어가기 전에 가는 게 낫겠지?

“당연하지.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보고 올린다.”

김현철은 옛 동료가 합류하게 되는 것을 반겼다.

- 여하튼 이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져야 들어가도 들어가지.

“하긴 그렇다. 뭐, 얼마나 오래 가겠어? 조만간 풀리겠지.”

아직 사람들은 코로나로 인한 암흑기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어어? 안 되겠다. 가격이 요동친다. 전화 끊자.”

- 그래? 알았어. 일 봐라. 고생해.

김현철은 화급하게 전화를 끊고 모니터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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