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12화 (212/363)

212화 푸드뱅크

“당장 저녁부터 걱정이에요. 어떻게 좀 해 봐요, 올리버.”

“나도 알아. 하지만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하루종일 알아봤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아무래도 푸드뱅크에 가 봐야 할 거 같아.”

“하아…… 푸드뱅크에서 받으려면 온종일 기다려야 한다고요. 어제도 천 명도 넘게 줄을 서 있었어요.”

“미안해. 나도. 여하튼 지금이라도 나가서 줄을 서는 수밖에…….”

한 집안의 가장인 올리버는 축 늘어진 어깨로 집을 나와 가까운 푸드뱅크로 걸어갔다.

일자리를 잃은 지 한 달. 저축해 놓은 돈도 전부 떨어져 버렸고, 실업수당만으로는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에 어림도 없다.

당장 네 식구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지금으로서는 몇 시간을 기다려서라도 푸드뱅크에서 며칠 치의 음식이라도 받아 와야 했다.

“맙소사! 이건 몇 시간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닌데!”

하나 막상 푸드뱅크에 도착한 올리버는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행렬을 보고 완전히 질려 버렸다.

대체 천 명인지, 만 명인지 알 수 없는 줄이 끝을 모르고 늘어서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에 직격당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러하듯 서민들이다.

코로나로 인해 사업체들이 문을 닫으면서 실업자가 급증하고, 한국과 달리 저축 문화가 없는 미국의 서민들은 실업이 곧 굶주림과 직결되기 마련이었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미국인 40%가 비상금으로 쓸 현금 400달러도 없다고 할 정도이니, 한 달만 실업 상황에 처해도 가계에 큰 위기가 오게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수많은 자선 단체들이 마련한 푸드뱅크 덕분에 적지 않은 시민들이 굶주림을 모면할 수 있었다.

“올리버! 자네도 왔나?”

어쩔 수 없이 그 길고 긴 줄의 끝에 서 있는데, 함께 직장에서 잘린 동료가 다가와 아는 체를 한다.

“자네도 왔나? 파블로?”

“뭐, 어쩔 수 없지.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하하.”

“줄이 정말 끔찍하게 기네.”

“시카고에 사는 사람의 절반은 온 거 같아.”

“절반은 몰라도 지독하게 많은 건 틀림없군.”

올리버는 어디가 끝인지 모를 행렬을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 버릴 지경이었다.

“자네는 처음이지?”

“어. 뭐, 그렇지.”

“그렇게 난처해할 거 없어. 요즘은 누구나 다 비슷하니까. 하하.”

문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푸드뱅크의 신세를 지지 않았던 중산층조차도 이번 코로나 사태로 실업자가 되며 푸드뱅크로 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해 3월의 2주 동안만 미국에서 1,0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들의 가족까지 생각하면 수천만 명에 달하는 굶주리는 시민들이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시카고뿐 아니라 미국 전역 어디서나 푸드뱅크 앞에는 장사진의 줄이 늘어서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한 푸드뱅크 앞 도로는 줄을 선 자동차가 몇 킬로미터에 달한다는 보도가 미디어에 나올 정도였다.

“이러다가 음식을 못 받는 거 아니야?”

난생처음으로 푸드뱅크에 줄을 서는 탓에 조금은 긴장한 올리버는 이렇게 줄을 서고서도 아무런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닐지 걱정부터 되었다.

그런 그의 우려가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뉴스에서 푸드뱅크에 줄을 서고도 음식을 배급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었다.

사실 코로나 사태로 미국의 푸드뱅크 시스템은 큰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푸드뱅크는 기업체들의 후원으로 유통기간이 길지만 시장에서 유통하기 어려운 식품을 기부받아 무료로 나누어 주는 일을 한다.

그리고 작금의 코로나 사태에선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원하는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공급은 원활하지 않았다.

바로 그 푸드뱅크에 자선을 해 오던 많은 기업들 식당들이 문을 닫고, 공급망에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많은 푸드뱅크가 자금 부족에 허덕이고 있다는 보고가 속속 올라오고 있었다.

더군다나 푸드뱅크에서 봉사하는 자원자들마저 부족한 형편이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에 걸렸고, 혹은 감염될까 무서워 나서지 않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농장에서 기껏 정성 들여 생산해 낸 작물들을 폐기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었다.

식당과 기업이 문을 닫으며 수요가 줄어들었기에, 농산물이 썩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애써 기른 작물을 트랙터로 밀어 버려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 내의 식량 사정은 공급과 수요, 그리고 유통 모든 면에서 불협화음을 내며 망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괜찮아. 푸드뱅크에 충분한 물량이 들어왔다네.”

“어? 정말인가?”

용기를 내어 푸드뱅크에 줄을 선 올리버는 파블로의 말에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듣자니 굉장한 자선가가 나타난 모양이야.”

“자선가?”

“그래. 그 뉴욕에 동양인 말이야.”

“유진 칸?”

이즈음 미국인들 사이에서 뉴욕의 동양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한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동양의 어느 나라에서인가 왔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가진 사나이.

물론 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지만, 대다수의 미국인에게는 딱 그 정도의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 그 ‘칸’ 말이야. 뉴욕의 칸.”

하필이면 성이 ‘강’인 탓에 조금만 세게 부르면 ‘캉’이나 ‘칸’이 되었고, 서쪽에서 유서 깊은 동양의 제왕이 칭기즈 칸인 덕분에 유진은 그저 ‘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뉴욕의 동양인’이라는 별명만큼이나 ‘뉴욕의 칸’이라는 별명 또한 많이 불리게 되었다.

“며칠 전 그가 피딩아메리카에 10억 달러의 기부를 했다더군.”

“뭐? 10억 달러를 한 번에? 하긴, 세계 제일의 부자라니 그럴 만도 하네.”

“그렇지? 피딩아메리카에서 올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전부 내놓았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당분간은 줄만 서면 굶을 걱정은 없을 거야.”

“휘유. 다행이네. 이거라도 안 가져가면 당장 오늘부터 굶어야 하나 걱정했는데 말이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올리버의 어깨를 두드리며 파블로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는다.

“나도 그래. 이거 못 받으면 트레이딩 카드를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니까?”

“자네의 그 보물 말인가? 민트급 모랄레스?”

“어. 지금이면 800달러는 받을 수 있을 거야. 하하.”

“그거…… 팔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네.”

올리버는 파블로가 자국 출신 메이저리거인 모랄레스의 카드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말이지. 그래서 지금 칸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흐흐.”

“아…… 맞아. 나도 그래. 오늘 저녁 이거라도 가져가지 못했다면 뭐라도 팔아야 했을 테니까.”

올리버는 여기 줄을 서기 전까지 당장 급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무얼 팔아야 할지 고민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그가 일자리를 구하는 데 꼭 필요한 맥북도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그날 밤. 올리브와 파블로 두 가장은 자신들이 아끼는 보물을 팔지 않아도 되었고, 가장 소중한 가족들을 굶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시기에 굶주림을 면하게 해 준 뉴욕의 칸은 그들 모두에게 조금 더 깊이 각인될 수 있었다.

* * *

“대체 돈이 얼마나 많다는 거야? 미국 내 푸드뱅크 사업에만 올해 100억 달러가 넘게 쓰겠다는 건가?”

“그런 모양입니다. 단순히 푸드뱅크 단체에 대한 기부뿐 아니라, 경제적 위협을 겪고 있는 농장에 대한 지원도 병행한다는 모양입니다. 수급처가 없어 농작물을 갈아엎어야 하는 농장의 작물을 구매하고, 경영난에 처한 식품 공장에 원료를 주고 푸드를 생산하게 해서 푸드뱅크에 공급하는 것까지 한 번에 해결하겠답니다.”

“굉장하군. 그게 이 짧은 시간 동안에 가능했다는 말인가?”

뉴욕 타임스의 편집국에서는 코로나와 푸드뱅크에 대한 기사를 내기 위한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예. 이미 2년 전부터 자선사업에 힘을 쏟기 시작해서, 지금은 벌써 미국 최대의 자선 조직을 만들어 놓은 모양입니다. 그것도 그저 평범한 자원봉사자의 모임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이나 정부 부처의 유능한 사람들은 잔뜩 긁어모은 엘리트 조직이라고 하더군요.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마자 그쪽으로 방침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어 실업자가 늘어날 경우 지원할 방법을 준비하도록 했답니다. 그게 이미 1월의 일입니다. 시간은 오히려 충분했지요.”

“대단하군. 그때 백악관에서는 뭘 하고 있었지?”

“아무 일도 없었지요. 아니, 상원하고 싸우고 있었던가요?”

“민주당에서는 뭘 하고 있었고?”

“트럼프 욕하느라 바빴지요.”

“하…… 대체…….”

기자가 취재해 온 내용이 밝혀질 때마다 어디에선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자선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고, 자선의 방식이 합리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무엇보다 이걸 내다본 그 통찰력에는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근데 정말 재미있는 게 뭔지 아십니까?”

“뭔데?”

“이번 코로나 판데믹 사태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이 바로 그 유진 칸 본인이라는 사실이지요.”

기자의 말에 편집장이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응? 아! 맞군! 그래. 이번 주가 하락으로 크게 수익을 냈다고 했지?”

“추산으로는 적어도 수천억 달러라고 합니다.”

“수천억?”

“최소치로 잡은 게 그 정도입니다. 국내 증시에서만요. 해외 증시와 다른 파생상품까지 더하면 1조 달러가 넘을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1조 달러? 겨우 두 달 만에?”

“솔직히 누구도 모르는 거 같습니다. 여하튼 범상치 않은 규모인 것은 확실합니다.”

잠시 놀란 빛을 띠던 편집장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 푸드뱅크에 지원하는 과정을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야. 남들과 똑같은 사건을 보면서, 그자는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거잖아? 하물며 자기 사업이라면 어쩌겠나?”

“그렇지요.”

“끄응…… 아쉽네.”

“뭐가 아쉽다는 겁니까?”

“미국인…… 아니, 미국 출생의 백인이었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아! 하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기업가가 백악관에 가는 건…… 지금도 그 결과물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기자는 편집장의 의도를 금세 알아차렸다.

“기업가라고 해도 같은 선상에 놓는 건 무리지.”

“여하튼 택도 없습니다. 미국 출생이 아니면 안 된다고요.”

“그래. 하여튼 알았어. 이 기사 제대로 써 봐.”

“물론이지요.”

다음날 뉴욕 타임스에서는 푸드뱅크 기사를 실으며 유진의 역할과 그 자선 규모에 대해 지면을 대폭 할애했다.

물론 이번에는 그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는 이야기는 생략했다.

기왕 띄워 주기로 한 것, 굳이 흠집까지 올릴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거의 모든 매체에서 유진의 푸드뱅크 사업에 대해 작든 크든 기사를 올리기 시작했다.

[뉴욕의 칸, 미국인을 먹여살리다.]

[뉴욕의 동양인 재벌, 푸드뱅크에 100억 달러 기부.]

[유진 칸, 100억 명 분의 식품을 내놓다.]

[100억 명을 먹여 살리는 부자. 뉴욕의 제왕.]

물론 그런 대부분의 기사 뒤에는 적지 않은 광고비가 책정되어 있었던 것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코로나 팬데믹은 언론 시장에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당장 줄어드는 광고에 허덕이던 미디어들은 끝이 어디인지 모를 만큼 흘러드는 유진의 자금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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