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스테이블 코인
“쿨럭! 쿨럭! 빌어먹을…… 냉장고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어쩌란 말이야?”
며칠전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에이미 굿윈은 자가격리 상태로 그녀의 작은 스튜디오 방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아직 죽을 만큼 힘들지는 않지만, 조금만 더 힘들어지면 입원을 고려해 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솔직히 에이미의 형편으로 쉬운 결정은 아니다.
스타가 되겠다는 꿈만으로 할리우드에 온 지 3년, 그녀는 지금까지 몇 곳의 임시직에서 간간이 생활비를 벌어들이고 있을 뿐 의료보험이 보장된 번듯한 직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매주 몇 번씩 오디션에 참가하고, 몇 달에 한 번 있는 촬영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카페의 종업원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미국의 의료체제에서는 의료보험을 지니지 않은 코로나 확진자에게 무료 치료 따윈 지원해 주지 않고 있다.
완치까지 적어도 수만 달러, 많게는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청구되는 상황이니, 보험이 없는 사람에게 코로나는 버티다가 죽거나 살아나거나 할 수밖에 없다.
사실 보험이 있다 해도 평균 4만 달러 가까이를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니, 에이미처럼 저축이 없는 처지에서는 애초에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가격리 중에 지원되는 돈도 제 때에 들어오지 않고 있어, 이미 계좌에 몇 달러도 남아 있지 않은 에이미의 경우는 당장 죽느냐 사느냐 하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지인들이 에이미의 집 현관 앞에 가져다준 음식들로 그동안 연명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나마도 똑 떨어져 버렸다.
“이대로 죽어 버리는 거야? 흑!”
비참한 상황이 일주일 넘게 계속되니, 돌처럼 단단하던 에이미의 굳건한 마음도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코로나를 극복하고 일어날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이미는 침대에 머리를 묻고 훌쩍이며 이 끔찍한 시간이 어떻게든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이젠 더 버틸 여력이 없다. 어쩌면 코로나에서 낫고 나면 배우의 꿈도 벗어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레이하운드 표를 끊으러 갈지도 모르겠다.
그곳에는 적어도 가족이 있고, 안정된 일자리 하나쯤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쾅! 쾅!
“에이미! 에이미 굿윈!”
그렇게 힘겹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현관을 쾅쾅 내리치며 에이미의 이름을 부른다.
“누구지?”
에이미는 힘겹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가 온 걸까? 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지난달에 헤어진 찰리? 아니. 그의 목소리는 아니다.
“에이미 굿윈! 집에 있지요?”
“누구세요?”
“할리우드 배우 조합 SAG(Screen Actors Guild)입니다.”
“배우 조합에서는 왜요?”
“에이미 굿윈 본인 맞지요? 최근 코로나 확진된 거 알고 있습니다. 조합에서 지원 차 나왔습니다. 문 열어 주세요.”
“네?”
당황한 에이미가 문을 열자, 그곳에는 흰색 보호복으로 얼굴과 전신을 완벽하게 무장한 사람 두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조합에서?”
“코로나로 고통을 받는 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전…… 배우 조합에 가입하지 않았는데요?”
미국 배우 조합 SAG(Screen Actors Guild)는 배우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조성되었고, 조합에 가입한 배우들의 단체 협약이나 의료보험 지원 등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하지만 배우 조합에 가입하기 위한 문턱은 생각보다 높아 간신히 카메라에 한두 번 잡히는 게 전부인 단역 배우들이 배우 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조합에 가입하지 않아도 배우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면 이번 코로나로 고통받는 분들을 최대한 지원해 드리고 있습니다. 아직 병원에 입원이 필요한 정도는 아니군요. 젊으셔서 그런지 자가격리로 버티실 수 있겠어요.”
배우 조합에서 나왔다는 두 명의 요원 중 한 명이 에이미의 상태를 확인하고 무언가 꾸러미를 잔뜩 안겨 주었다. 안에는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라도 버틸 만한 식료품이 가득하다.
“혹시라도 상태가 좋지 않다면 바로 연락 주세요. 병원으로 이송해 드리지요.”
“보험…… 없는데요?”
“괜찮습니다. 이번에 지원받은 게 상당해서 보험 없이도 치료 가능합니다.”
“네? 정말인가요?”
“예. 할리우드의 제왕이 돌아왔습니다. 흐흐.”
“할리우드의 제왕? 유진?”
“예. 뉴욕에서 얼마 전에 돌아왔다가 여기서 코로나로 고통받는 배우들이 많다는 말을 전해 듣고 거액을 내놓았어요.”
“아! 정말요?”
할리우드에서 유진의 명성은 뉴욕 월가에서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했다.
월 스트리트에는 아주 많은 억만장자 투자자들이 있었기에 유진은 그런 투자자 중 제일가는 부자로 알려져 있을 뿐이지만, 할리우드에서는 그의 말 한마디로 무엇이든 해결되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제왕과 다름없다.
당연히 배우나 영화에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칸이라 불리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타격을 입지 않은 분야가 어디 있겠느냐만,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들만 한 곳도 또 없을 것이다.
아직 그들 자신은 잘 모르고 있겠지만, 앞으로 2년 이상 영화 개봉은 물 건너간 상황이다.
당연히 영화 관련자들은 그 긴 시간을 실업보험 따위로 버텨야 한다.
유진이 내놓은 거액의 자금은 그렇게 캘리포니아 곳곳의 불우한 배우들과 영화 관련 사업자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길고 긴 터널이 끝나면 그들은 그 고통의 시기를 도와준 유진에게 고마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가 한창인 가운데 유진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할리우드로 건너왔다.
아무래도 복작거리고 매일 확진자가 잔뜩 나오는 뉴욕보다는 캘리포니아 쪽이 안전하다.
이번에는 오랜만에 동생인 유성도 불러들였다. 역시 위기의 시기에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 제일이다.
“계속해서 매수에 나서고 있으니까 시장이 영향을 받는 것 같아.”
2018년 상반기 35,000달러까지 치솟았던 비트코인은 폭락을 시작해 2019년 여름에는 5,000달러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유성은 그때 즈음 다시 암호화폐의 매수에 나섰다.
암호화폐의 폭등이 오기 전 헐값에 구매한 비트코인, 이더리움, 리플 등으로 1,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벌어들였으니, 그 많은 돈을 전부 암호화폐에 투자하기에는 시장이 작다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은 그때 벌어들인 돈의 일부만을 사용해서 차분하게 코인의 매입에 나섰고, 코인의 가격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 지금에는 벌써 2018년의 수익 이상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당분간 계속해서 매입하는 게 나을 거야. 이번에는 지난번 상승장 이상으로 오를 가능성이 있어.”
“그럴 거 같아. 지난번에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새롭게 투자에 나서고 있는 것이 눈에 보여.”
암호화폐 거래소 시장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유성은 가장 정확한 데이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또다시 투자의 밑바탕이 되었다.
“적어도 두 배는 가지 않을까 하는 예측이 나오고 있어. 물론 형이 말한 것보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누구의 예측도 확신하지는 마.”
“그러고 있어. 예측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지나지 않은 거지.”
유성은 암호화폐로 벌어들인 돈의 절반 이상은 다른 금융 상품으로 돌려놓았다.
암호화폐 시장의 불안정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만큼, 언제고 암호화폐 시장 자체가 완전히 붕괴해 버리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그것도 유진의 자산관리 회사를 제외한 다른 금융기관을 통해 운용하고 있었다.
물론 유진의 의사였다. 유진은 자신의 경영이 언제까지고 무조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지금 뉴욕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었다.
그러니 동생인 유성이 암호화폐로 벌어들인 자산은 최후의 보루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암호화폐로 얻은 자금은 세계 각국의 투자회사를 통해 유진과 유성 두 형제가 7대 3으로 지분을 나누어 갖고 있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 해도 암호화폐로 벌어들인 자산은 유진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남게 할 것이다.
거기다 암호화폐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단순히 암호화폐의 거래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쪽이 오히려 더 적다 할 수 있다.
“얼라이언스 코인 발행량이 거의 2천억 달러에 육박하고 있어.”
얼라이언스 코인은 미국 달러와 1대 1로 대응되는 소위 스테이블 코인으로, 발행 수량만큼의 달러를 공신력 있는 금융기관에 예치하고 마찬가지로 공신력 높은 회계법인을 통해 정기적으로 회계감사를 받아 공표하는 것으로 통화로서의 신뢰성을 인증한다.
반면 비슷한 종류의 스테이블 코인들은 이러한 공인 절차를 통과하고 있지 못하고 있어 신뢰도에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스테이블 코인은 주로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다른 암호화폐를 사고파는 기준 화폐로 이용되는데, 이런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를 신뢰할 수 없다면 해당 암호화폐 거래소 또한 투자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받게 없다.
이러한 이유로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얼라이언스 코인을 사용하지 않는 코인 거래소에 대해서는 신뢰를 주지 않는다.
유성이 장악하고 있는 코인 거래소 집단인 얼라이언스에 포함되지 않는 거래소들도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얼라이언스 코인을 채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시점에서 코인 거래소들의 기준 화폐는 얼라이언스 코인으로 통일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객들이 유치한 현지 화폐는 모두 얼라이언스 코인으로 환전되고, 해당 액수만큼 새롭게 발행된다.
그렇게 적립된 돈은 대부분 뉴욕의 금융기관에 그리 낮지 않은 이율로 예치되거나, 블랙록이나 뱅가드 그룹들의 안정적인 자산관리사 펀드에 들어가 있다.
그 결과 이제 유성은 얼라이언스 코인의 예치금만으로 뉴욕에서 손꼽히는 투자자 대접을 받고 있다.
더군다나 암호화폐 거래소 시장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있으니, 실질적으로 형인 유진에 이어 세계 제2의 부자라는 소리가 월스트리트에서 흘러나오고 있을 정도이다.
유진의 지난 삶에서 세계 1위의 거래소인 바이낸스 한 곳의 시장 가치만 1천억 달러를 훌쩍 넘어섰던 것을 생각하면, 유성의 코인 거래소 얼라이언스의 가치는 그에 비할 수도 없을 정도라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나 커지니 아무래도 탐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어.”
“당연하지. 처음부터 말했잖아. 시장을 전부 장악하는 것은 초기에만 가능하다고.”
특히나 코인은 각국 정부의 규제에 민감하기에 각국 권력자들의 눈총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항상 주지하고 있었다.
“알아. 시장의 확장을 위해서도 그편이 낫다는 걸 말이야.”
유성도 아쉽지만 때로 내려놓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코인 거래소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많다. 이미 유성은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의 유입이 많은 거래소 몇 곳을 장시웨이와 알렉세이 표도르프에게 좋은 가격으로 넘겼다.
그리고 다시 코인 가격의 상승이 눈앞에 보이자 비슷한 압박을 받고 있다.
“그래도 제값은 받을 수 있을 거 같아.”
“최대한 늦춰 봐. 가격을 흥정하면서 말이야.”
아직 두 번째 상승기는 시작에 불과하다. 가격을 제대로 받으려면 적어도 1년은 필요하다.
“알았어. 이번에는 절반 정도 팔아 버리면 되지?”
“5만 달러가 넘어가면 대부분 넘긴다고 생각해. 최대한 가격을 받고 말이지.”
유진은 슬슬 거래소 시장에서 엑시트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