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리얼리티 쇼
“에이미 굿윈이라…… 굉장히 낯이 익은 이름인데…….”
모니카에게 받은 편지를 펼친 유진은 상념에 잠겼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 확실하다.
하지만 도통 어디서 들었던 것인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생각해 보면 유진이 살아 온 시간은 어느덧 70년이 훌쩍 넘는다. 그리고 두 번의 삶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이번의 삶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번의 삶에서 역시 숱한 역경을 겪어 가면서도 유진은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선택했었다.
비극적으로 끝나고 만 결혼 생활 뒤로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 후 미국에서 아주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연을 맺었다.
그렇다 보니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름의 숫자가 적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고 미디어나 SNS 따위를 통해서 알게 된 이들은 그보다 더 많다.
물론 유진은 사람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사소한 인적 사항들을 기억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꽤 나이가 들어서도 한 번 만나 본 사람을 잊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런 그이기에 에이미 굿윈이라는 이름이 귓가를 맴도는 일은 어쩐지 생경하면서도 독특한 기분이었다.
단역 배우라고 하는데, 그쪽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영화광이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영화는 놓치지 않았던 유진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걸 보면 틀림없다.
그렇다고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특별히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루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럼 대체 무얼까?
그녀의 사진을 자세히 보고 있자니 조금은 낯이 익은 것도 같다. 그렇다면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던 사람일까?
거의 하루 가까이 유진은 그 이름을 기억 속 어디에서인가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이름이 낯익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런 소득도 얻어 내지 못했다.
“에이미 굿윈 양에게 코로나로 고생한 것에 대해 위로의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
다음날, 유진은 모니카에게 평상적인 업무를 하나 전달했다.
어쩐지 그녀가 자신과 어떤 인연이 있을 것만 같아, 이 작은 인연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쾌차한 것에 대한 축하와 고생한 것에 대한 위로, 그리고 약간의 위로금 정도면 될까요?”
“음…… 위로금은 빼기로 하지.”
후원을 해 주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문의 의사를 표시할 때면, 작은 액수라도 첨부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의 표시는 현금으로’라는 것이 유진의 모토였고, 그런 모토는 늘 어김없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는 한다.
적든 많든 돈을 받는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없기 마련이다. 다른 어떤 종류의 선물보다 확실하게 좋은 것이 돈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꽃다발로 하지. 병에서 나았다면 꽃을 받는 쪽이 더 기분이 좋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모니카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미 굿윈이 꽤 화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으니 관심이 생겼다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유진의 이런 결정은 그녀의 외모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어쩐지 그녀에게는 약간의 위로금보다 화사한 꽃 한 다발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좀처럼 감으로 행동하는 일은 없는 유진이지만, 이번엔 어쩐지 그의 감이 가리키는 대로 행동하기로 한다.
“오! 세상에! 이렇게 화려한 꽃다발은 처음 받아 봤어!”
에이미 굿윈은 자신의 두 팔로도 안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꽃다발을 바라보며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어디에서든 눈에 띄는 미인이었던 굿윈은 지금까지 숫한 남자들의 구애를 받아 왔고, 그중에는 이 커다란 꽃다발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선물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꽃다발로 한정해서 본다면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진의 의도를 잘못 해석한 모니카의 잘못이다.
유진은 단순히 쾌차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평범한 꽃다발을 보내기를 원했을 뿐이지만, 모니카는 그녀의 보스가 에이미 굿윈에게 반했다 생각하고 장문의 편지에 곁들여 누구라도 놀랄 만한 화려한 꽃다발을 보낸 것이다.
“뭐야? 유진 칸? 진짜?”
꽃다발 속에 꽃혀 있던 편지를 발견한 에이미 굿윈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보낸 사람이 전혀 상상하지 못할 상대였기 때문이다.
“굉장하네…… 역시 헐리우드의 제왕은 스케일이 다르구나.”
그녀의 작은 스튜디오가 가득차 버릴 것 같은 커다란 꽃다발 옆에 서서 에이미는 사진을 찍어 언제나처럼 SNS에 올렸다.
물론 유진에게 받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대단한 이벤트는 그녀의 삶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에이미 굿윈?”
할리우드의 수많은 에이전시 중 한 곳인 테레사&윌리엄스의 파트너인 케이지는 요사이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진 하나를 발견하고 화려한 꽃다발과 아주 잘 어울리는 여자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꽤 멋진 페이스이다. 이번에 기획 중인 TV쇼에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더군다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내기에도 좋은 소재를 지니고 있었다.
코로나에 확진되어 죽을 만큼 고생하다 회복했다. 그 와중에 요사이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남자의 후원을 받았고, 이번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선물까지 받았다.
방송계라는 곳은 또 영화판과 달라, 출연자들의 이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곳이다.
콧대 높은 무비스타들과 달리 방송에 나오려는 수많은 예비 셀럽들은 각자가 지닌 아주 작은 사연이라도 크게 과장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 사용하고는 한다.
그런 면에서 에이미 굿윈은 충분한 상품성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세계 제일의 부자에게 꽃다발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어도 수십만의 시청자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에이미 굿윈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지인들에게 그녀에 관해 물어 보기 시작했다.
“에이미? 그 금발? 어. 한 번 같이 일해 본 적이 있어.”
다행히 그리 어렵지 않게 그녀에 대해 말해 줄 사람을 찾았다.
“외모가 상당히 괜찮은데, 지금껏 두각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어?”
물론 할리우드에는 미인이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단순하게 얼굴이 이쁘다는 것만으로는 결코 성공한 배우가 될 수 없다.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은 것이 필요했다.
“혹시 연기가 엉망인가?”
“딱히 대단한 연기자는 아니었을 거야. 그렇다고 쓰레기도 아니고. 그냥 뭐, 딱히 이슈를 내지 못했을 뿐이지. 아! 생각해 보니까 꽤 철벽이었던 모양이야.”
“아!”
케이지는 금세 이해했다. 21세기로 들어서며 예전에 비해선 훨씬 더 공정해졌다고는 하지만, 연예계에서 캐스팅을 둘러싸고 비상식적 요구를 하는 이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에이미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배역의 대가로 특별한 것을 원하는 경우가 여전히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다.
배우의 캐스팅을 담당하는 사람이나, 감독, 제작자, 그리고 쇼나 영화의 주역에 이르기까지 아직 이렇다 할 커리어를 쌓지 못한 이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잔뜩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투 운동의 열풍이 거세어진 가운데에도 그런 거래를 은근하게 건네는 것은 여전하다.
그리고 에이미라는 여인은 그녀의 대단한 외모 때문에 적지 않은 권력을 지닌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 왔을 것이 틀림없다.
물론 선택은 에이미에게 있다. 요구를 받아들이고 좋은 배역을 얻어 내거나, 더러운 거래에 응하지 않고 침을 뱉어 주고 끝내거나.
이곳에도 그런 사람들은 충분히 많이 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사람들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루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었다.
“까다롭다는 말이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
“성격이 모나지는 않았고?”
“아니. 전혀. 꽤 명랑하고 씩씩했던 거 같아. 남부 아가씨들 특유의 낙천성도 있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을 거 같았어.”
대체로 평가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케이지는 그녀를 쇼에 밀어 넣을 생각을 굳혔다.
제작사 쪽에서도 거절하지는 않을 게 틀림없다. 배우만큼이나 이슈에 목이 말라 있는 이들이 제작사이니 오히려 반길 것이다.
만일 그녀에게 있는 문제가 단순하게 상납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아니, 오히려 반길 만한 일이다. 혹시라도 그녀와 할리우드의 제왕 사이에 어떤 교감이라도 있는 거라면, 감히 그녀에게 집적거릴 미친놈이 달리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침례교였었나? 꽤 독실한 신자였던 게 기억나네.”
“흠. 그래?”
요즘 세상에서 독실한 신자 출신 배우라는 것이 조금 독특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나쁠 것도 없다.
아니, 오히려 써먹기에 따라서는 이용할 만한 이슈가 하나 늘어나게 생겼다.
* * *
“에이미 굿윈이 새로 방송되는 리얼리티 쇼에 참여하기로 했다네요.”
모니카는 유진이 정말로 그녀에게 인간적으로 반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근황을 알아내 보고해 왔다.
그러고 보면 유진과 가장 오랜 시간을 가까이 하고 있는 모니카야말로 유진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틀렸다. 유진은 그녀에게 어떤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꾸 껄끄럽게 걸리는 것이 있을 뿐이다.
“리얼리티 쇼?”
“여자들이 잔뜩 나와 자기의 매력을 자랑하는 종류의 프로그램인 모양이에요.”
“아아.”
그다지 어울린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왠지 그녀에게 걸맞은 자리가 아닐 것 같다.
“아무래도 지난번 꽃다발이 영향을 미친 모양이에요. SNS에 올린 모양인데, 꽤 화제가 되었어요. 리얼리티 쇼 쪽에서 시선을 끌기 적당하다고 생각해서 바로 그녀를 낚아챈 모양이에요.”
“흐음. 나 때문이라는 건가?”
유진은 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작은 행동 때문에 원래라면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을 역할이 간 모양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의 삶 자체가 바뀌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유진은 그녀가 원래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인지 전혀 짐작도 못 하게 되어 버린 셈이다.
“버터플라이 이펙트인가?”
그의 사소한 행위가 그녀를 바꾸어 놓았다. 과연 그건 좋은 방향일까? 아니면 좋지 않은 쪽일까? 꽤 신경이 쓰인다.
그 때문인지 유진은 그녀가 출연한다는 리얼리티 쇼를 챙겨 보고야 말았다.
사실 영화는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런 쇼는 좀처럼 눈여겨보는 일이 없는데,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전 남부에서 자랐어요. 우리 부모님은 무척 커다란 목장을 운영하셨죠. 아침에 일어나면 말을 타고 목장을 도는 것이 일과였어요.”
쇼의 처음에는 언제나 그러하듯 출연자들의 배경이 나오고는 한다. 에이미는 할리우드에 오기 전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무척 독실한 신자들이셨어요. 저도 그랬었고요. 하나님의 은총을 매일 아침 느낄 수 있었지요.”
그리고 그녀의 독백이 흘러나오는 순간, 유진은 비로소 그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어! 그 미친…… 에이미 포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