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위험한 여인
“어린 시절 저는 주님 곁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쇼에 등장한 여러 여자 중, 에이미 굿윈은 조용하면서도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자신의 배경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융 위기 때문에 부모님의 목장은 파산하고 말았어요. 어째서 월가의 금융가들이 만들어 낸 사태로 우리가 그런 고난에 처해야 했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죠. 하지만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아주 멋진 길을 마련해 두셨다는 사실을 잊은 적은 없어요.”
“에이미 포레스터…….”
그리고 유진은 그 순간 미국 정치사에 지독한 문제를 남겨 주었던 한 여자를 떠올릴 수 있었다.
켄터키주의 하원의원으로 열화와 같은 인기를 모으며 한때 미국 대통령 자리까지 넘보던 정치인.
겨우 서른 남짓한 나이에 정치계에 뛰어들었지만, 그 화려한 외모 덕분에 큰 이슈를 만들어 내었고, 외모와는 반대로 지독하게 보수적인 주장을 내뱉어 공화당은 물론이고 근본주의자들의 희망이라 불리던 여자이다.
“포레스터가 아마 남편의 성이었었지?”
유진이 선뜻 그녀를 기억해 내지 못한 건 에이미 굿윈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정치인이 된 이후로 그녀는 포레스터 하원의원으로 불리었고, 굿윈이라는 성이 거론되는 일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무엘 포레스터가 미래의 남편이 되는 건가?”
유진은 현재 켄터키주의 하원의원으로 재임하고 있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이번 삶에서 유진은 미국의 유력 정치인들은 거의 다 한두 번씩은 만나 봤다.
저 멀리 남부의 정치인들도 때때로 뉴욕에 들르는 일은 있었고, 그럴 때면 유진이 주최하는 사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유진은 워싱턴 정계에서도 무척 통이 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현역 정치가나 공무직에 있는 사람들에겐 이런저런 법적 문제로 크게 기부금을 주지 못하지만, 이미 암호화폐라는 수단으로 이미 수많은 정치인에게 평생 받아 보기 힘들만큼의 거액을 선물했고, 정계에서 은퇴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로 후원을 이어 오고 있다.
단지 유진과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정계나 행정 각부의 중요 인사들은 여생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공화당이나 민주당 같은 정파에 상관없이, 그리고 그들의 성향에도 아무런 관계없이 유진의 후원은 공평하게 이루어진다.
“그 남자도 꽤 꼴통이었지.”
유진은 뉴욕의 팰리스 호텔에서 한두 번 만남을 가졌던 공화당 의원을 떠올렸다.
남부 지역의 정치인답게 공격적이고, 차별적인 사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는 하던 사람이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사무엘 포레스터는 사십대 후반에 들어서는 중년의 노숙한 신사이고, 에이미 굿윈은 이제 한창때의 할리우드 여배우이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결혼하게 되는지는 유진도 잘 알지 못한다.
알고 있는 것은 에이미 굿윈이 남편의 사망으로 그의 지역구에 출마해서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된다는 사실뿐이다.
어쩌면 코로나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진의 후원이 있기 전에 그녀는 코로나로 심하게 고생했다고 들었다.
배우로서의 제대로 된 커리어를 잡지 못한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 우연히 사무엘 포레스터와 만나게 되어, 아내와 사별한 중년의 정치인과 결혼하게 되었으리라는 추측에 이르렀다.
어쩌면 보수적인 에이미가 사무엘의 선거 사무실에 자원봉사로 나섰다가 인연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향에 돌아가 카페테리아에서 일하던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하원의원이 먼저 들이댔을지도 모르고.
어디까지나 전부 추측에 불과하다. 어쩌면 유진이 생각한 추측 중 하나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인연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인생이란 어떤 사소한 계기로 인해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기도 하니까.
다만 이번 삶에서 에이미의 삶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만은 틀림없는 듯했다.
“배우가 되기 위해 할리우드에 와서 몇 년 동안은 무척 힘이 들었죠.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라면 어떠한 고난도 두렵지 않아요.”
리얼리티 쇼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앙 고백에 가까울 만큼 파격적인 내용이 이어졌다.
하지만 특별히 이상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쇼의 제작진으로서는 이런 점이 그녀를 부각시켜 줄 거라 여긴 모양이다.
그리고 그런 예상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에이미 포레스터가 꽤 인기를 얻고 있어요. 그런 미인이 보수적인 사고를 조금도 감추지 않는 게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는 모양이에요. 요즘 시대의 여자들과 전혀 다르다는 게 포인트였죠.”
여전히 유진이 에이미에 대해 관심 있다고 여긴 모니카가 쇼의 첫 회가 끝난 뒤 꼼꼼하게 모니터링해서 보고를 올렸다.
“제작진이 영리한 모양이야.”
“그렇죠. 마치 50년대나 60년대 가족 드라마의 주인공이 튀어나온 것 같다니까요. 사람들이 열광할 만해요.”
하긴 생각해 보면 에이미 포레스터가 정치인으로 성공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무기도 그런 것이었다.
워싱턴의 정치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는데, 그녀의 주장은 80대 노인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이었으니까.
명백하게 시대를 역행하는 수많은 주장을 그 아름다운 얼굴로 욕설과 함께 내뱉는 모습에 그녀의 지지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모양이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사회를 분열시켰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보험은 자유의 죽음이라며 반대하고, 중산층에 대한 보육 지원을 공산주의라 욕했다.
동성애에 대한 반대는 말할 것도 없다. 동성 결혼은 물론이고 고용차별을 금지하는 법안까지 폐기해야 한다고 부르짖을 정도였다.
그녀가 한때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이기는 하다.
그녀가 배우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 그런 그녀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배우로 성공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건 유진으로서는 이제 그 진실을 알 방법은 없다. 아무래도 이번 삶에서 에이미 굿윈은 그럭저럭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 듯싶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꽤 좋아요. 특히 지금까지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무시당하던 종교적이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좋은 평을 보내는 거 같아요. 자신들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리얼리티 쇼에 출연해 문란하기 짝이 없는 할리우드 여자들을 꾸짖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미국의 리얼리티 쇼는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끝을 보여 준다. 매 장면 하나하나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리얼리티 쇼에 나타난 청교도적인 미인의 등장에 열광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말끝에 습관적으로 주님이라는 말을 붙이는 게 포인트에요. 아무래도 그것도 제작진이 요구한 거 같지만요.”
리얼리티 쇼의 내용을 전부 진실이라 믿는 사람도 종종 있지만, 조금이라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쇼의 제작진은 그녀의 이미지를 청교도적이고 고전적인 미녀로 고착화하기로 한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에이미 자신의 성향이 그런 것에 맞기도 했고.
“쇼 제작한 곳을 알아 둬야겠네. 능력이 탁월한데?”
유진은 에이미의 지금 모습이 그녀에게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미래에 몇 번인가 그녀가 TV 뉴스에서 혐오스러운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에이미는 주님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지만, 정치인이 된 그녀는 늘 애국이라는 단어를 말끝에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
물론 그녀가 말하는 애국이란 자신과 같은 주장에 찬성하는 행위였고, 조금이라도 다른 주장을 한다면 공산당이나 머저리 비애국자라는 의미였다.
결과적으로 정치인으로서 그녀는 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국론을 분열시켰다.
레이디 트럼프, 혹은 베이비 트럼프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말이다.
명백하게도 그녀는 도널드 트럼프의 후계자였고, 미국의 시민 사회를 끔찍하리만큼 분열시켜 놓았다.
특히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책을 이어가기 위한 많은 이들의 노력을 폄훼하고, 방해하는 면에서 그녀만큼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정치인으로 나서게 되는 것은 이미 지금보다 온난화가 훨씬 더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고, 그때는 더 이상 온난화가 인류의 화석연료 사용 때문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던 시기인데도 그러했다.
세상 그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서 지구 온난화라는 주제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고, 그에 대한 대책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미 바닷가 도시들이 툭하면 태풍과 해일로 큰 피해를 보고, 내륙의 평원에서는 한 해 건너 흉작이 발생하고 있었지만, 온난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게 단순히 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라 주장했다.
특히 에이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며 화석연료의 재사용을 주장하고, 온난화 대책에 대한 법안에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후일 그녀가 지구의 온난화에 적어도 0.2%도 정도는 기여했다는 농 섞인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녀에게 방송 성공을 축하한다는 꽃다발을 보내면 어떨까요?”
모니카가 물어 왔을 때, 유진은 잠시 멈칫했다. 처음 꽃다발을 보낸 것은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때였는데, 지금은 상황이 무척 다르다.
“그렇게 하지.”
잠깐 고민하던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어쩐지 그녀가 방송에서 성공하는 것이, 그리고 그녀에게 약간이나마 호감을 쌓아 두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미래가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방송에서 성공한다면 미래의 리틀 트럼프가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끔찍한 비극이 재현되는 일도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에이미 포레스터가 미국 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죽음 때문이었다.
이번 삶에서는 그녀에게는 물론이고 이 사회에도 그런 암담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 * *
“에이미. 얼마 전에 칸에게 또다시 꽃다발을 받았다며?”
쇼의 녹화가 끝나고, 프로듀서가 그녀에게 물어 왔다.
“칸? 네. 칸에게서 선물을 받았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에는 SNS에도 올리지 않았는데?”
“그런 건 미리 말해 주었어야 하지 않아?”
“그걸 왜요?”
“당연하지 않아? 그런 소재를 놓치는 게 얼마나 손해인데? 오늘 쇼에 그 이야기를 넣었다면 훨씬 나았을 거야.”
“음. 전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에이미는 딱 잘라서 말했다.
“왜? 칸이 그러지 말하고 했나?”
“아뇨. 그분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요? 그저 방송 데뷔를 축하한다는 말씀뿐이셨어요.”
“그런데 왜 그 소재를 안 쓰겠단 말이야?”
질문을 던지면서도, 프로듀서는 에이미의 태도가 이전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평상시와 달리 주님을 거론할 때처럼 어딘지 경건한 태도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