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17화 (217/363)

217화 신경전

에이미 굿윈이 출연 중인 리얼리티 쇼는 다양한 배경을 지닌 젊은 여자들이 나와 게임을 하고, 게임에서 진 팀에서 한 명이 탈락하는 전형적인 서바이벌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쇼가 으레 그러하듯, 게임 그 자체보다는 게임에 임하기 전 팀원들 사이에 오가는 정치 싸움에 훨씬 더 포커스가 맞춰진 형식이었다.

변호사나 사업가 혹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아름다운 여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게임에서 패배할 경우 탈락할 사람으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공동의 적으로 만들어 가는 필사적인 모습이 쇼의 인기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쇼는 첫 방영에서부터 제법 인기를 얻으며 순항하고 있었다.

유진은 미국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를 위해서라도 이 쇼가 성공하고, 에이미 굿윈이 방송계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길 바라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쇼가 방송되는 날이면 모니카 등과 함께 TV 앞에 함께 모여 시청하고는 했다.

“코로나에 걸려 굉장히 고생했다고 들었어. 지금은 완전히 회복된 거지?”

캘리포니아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붉은 머리 백인 여자가 처음에는 아주 사교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정말 힘들었어. 온몸이 쑤시고 열이 나는데 약은 없고, 밖에 나갈 수도 없으니 그저 얼음주머니 하나에 의지해야 했었지.”

에이미 굿윈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고 당시를 회상하며 대답했다.

“저런, 많이 힘들었겠구나. 외지에서 그런 큰 병에 걸리는 건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지.”

시민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던 그 캘리포니아 대학원생은 무척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에이미를 위로했다.

“그래. 만일 그분한테서 코로나를 이겨 내기 위한 지원품을 지원받지 못했다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니까.”

“그분? 아! 맞다. 너 그 유진이라는 사람과 친분이 있다고 했었지?”

“친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힘들 때 도움을 받았을 뿐이지.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이미가 살짝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정말로 고마워하는 게 느껴지네요. 연기를 잘하는 걸까요?”

“그렇군. 확실히 감정이 전달되네.”

리얼리티 쇼라고 하지만, 쇼의 성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참여자들이 얼마나 제대로 자신의 장점을 보여 줄 수 있는지, 그러니까 제대로 연기를 하는 지다. 그런 면에서 에이미는 합격점을 줄 만했다.

“나쁘지 않네요. 눈이 반짝이는 게 촬영도 제대로 했어요. 제작진이 에이미를 밀어주는 게 보여요.”

“그런 것 같지?”

확실히 에이미가 속한 팀이 상대팀보다 조금 더 자주 카메라에 잡히고, 그중에서도 에이미가 도드라지게 나오는 편이다.

제작진 입장에서야 논란거리를 만들어 줄 만한 사람에게 훨씬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것은 당연하다.

“약이나 지원품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안도감이 소중했었어. 난 그 순간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해 아주 커다란 사랑을 행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에이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맙소사! 정말 고리타분한 대사예요.”

“그런데 진심인 거 같네.”

모니카도 유진도, 그리고 그 순간 TV를 시청하던 많은 사람들도, 그녀가 어떤 영적인 순간에 사로잡혀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보스한테 도움이 되겠어요. 에이미가 저 쇼에 나간 게 다행이로군요.”

“흠…… 과연 그럴까?”

“물론이죠. 아무래도 저기 한 번 연락을 해 봐야겠어요. 에이미는 쇼의 끝까지 남아 있을 필요가 있어요.”

여유 있게 TV를 시청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실 모니카에게는 일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유진의 홍보를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이 쇼는 잘하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쇼의 마지막까지 에이미가 남게 되는 것은 운의 영역 따위가 아니라 제작진의 의지라는 사실을 모니카는 잘 알고 있다. 아마 전화 한 통화면 충분하리라.

딱 좋은 기회였다.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재앙이 덮친 미국에서 유진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져 가고 있었다.

이해에만 푸드 뱅크를 통해 수백억 달러의 현금이 지원되었고, 수천만 명에 달하는 궁핍한 사람들이 굶주림을 모면할 수 있었다.

물론 미 정부에서도 엄청난 액수의 지원금을 풀었지만, 상당수는 기업에 대한 대출이나 세금 감면 등으로 사용되어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지원은 아직 충분치 못한 수준이다.

이때까지 이루어진 직접적인 지원은 1인당 최대 1,200달러가 전부였다.

그나마 행정력의 미비로 아직 지원받지 못한 사람이 3,500만 명에 달한다는 보고가 나오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하기엔 미국은 여러모로 허점이 많았다.

더군다나 이후로 얼마나 많은 재정을 지출해 시민들을 도와줄 것인지에 관한 국회와 행정부의 연일 거듭되는 다툼으로 지원금 규모가 좀처럼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

연말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 때문에 각 당의 계산이 아주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굶주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고,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인 것은 유진이었다.

유진의 자선 재단은 짧은 시간 동안 농장에서 원재료를 주문하고 식품 공장들에 식료품 생산을 의뢰하며 전국에 퍼져 있는 수많은 푸드뱅크에 대한 공급망까지 구축해 냈다.

더군다나 기존 푸드뱅크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이 유통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폐기 직전의 것들이었던 데 비해, 유진이 공급하는 식료품은 하나같이 바로 전날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신선한 식품들이었다.

그 때문에 여유가 있는 중산층 시민 중에서도 구태여 줄을 서면서까지 푸드 뱅크에서 나누어 주는 무료 음식을 타 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푸드 뱅크에서 시민들이 받아 가는 음식물 꾸러미에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진의 사진이 떡하니 박혀 있고, 지역 신문에는 거의 매일같이 유진 덕분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는지 빠지지 않고 보도되고 있었다.

유진은 절대 자신의 선행을 숨기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최대한 자신의 선행을 다양한 경로로 홍보하는 쪽이다.

덕분에 적지 않은 미국인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직장을 잃은 많은 이들이 유진 덕분에 적어도 끼니를 거르는 일은 면했다며 고마워하고 있었다.

“오! 월스트리트의 부자에게 호감을 받아 좋겠네?”

캘리포니아 대학의 예술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그녀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에이미를 비웃었고, 에이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가 한 말에 가시가 잔뜩 나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두 여자의 주변에 서 있던 다른 여자들은 때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때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보스한테 반감이 많은 모양이네요.”

모니카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로 반감이 있는 건지, 그녀의 역할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뭐. 그런 성향이 있으니 저런 대사가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기는 하겠네요.”

유진도 모니카도 모든 미국인이 유진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유진에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진에 대한 호감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빠르게 유진에 대해 반감을 지니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었다.

그 원인을 찾자면 많은 이유가 나올 것이다.

그가 미국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 백인이 아니라는 사실, 혹은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아니라는 점 따위가 반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그를 싫어할 이유는 사실 아주 잔뜩 있었다.

유진과 모니카는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쇼를 시청한다. 이제 그 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부자? 유진은 단순히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에이미가 반발했다.

“아니라고? 그럼 월스트리트에서 제일 가는 부자? 아니면 할리우드 최고의 바람둥이라고 할까?”

여자가 다시 쏘아붙이듯 말했다.

“어? 저건 좀 선을 넘었는데?”

유진이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로 유진에 대한 소문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요.”

모니카가 웃으며 말했다.

“이 저택으로 들어오는 길에 파파라치들이 열 명도 넘게 숨어 있는 거 알죠? 전부 여기 방문하는 여배우 사진을 찍기 위해서예요. 지금까지 보스랑 관계가 있다고 찍힌 여배우가 서른은 넘을걸요?”

“아니. 그건 전부 공식적인 방문이잖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일반인들이 접하는 거라고는 이 집으로 들어오는 여배우의 사진뿐인데요. 그리고 다들 돌아갈 때면 활짝 웃고 있잖아요.”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유진의 저택을 찾는 것은 대개 새로운 영화 촬영과 관련된 때문이거나, 이런저런 사교 파티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파파라치가 찍는 사진에 그런 이유가 달릴 이유는 없었다.

그녀들이 방문하는 사진에는 늘 ‘할리우드의 제왕, 이번에는 누구누구를 만나다.’라는 제목만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리고 할리우드 주변에는 그런 사진을 비싸게 사 줄 타블로이드 신문사가 잔뜩 있다.

심지어 여배우들조차 그런 기사에 딱히 반박을 내놓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진과의 스캔들이라면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에이미의 얼굴은 그녀가 TV에 나오고 처음일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청률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네요.”

모니카가 웃고 있다. 유진도 조금 어이없어하다 웃고 만다.

어차피 그런 가십성 기사에 대해 어떠한 반박도 내놓지 않는 것은 유진 스스로의 결정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제 할리우드의 바람둥이니 호색한이니 하는 말은 유진에게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되어 버렸다.

“중국 정부의 어리석은 대응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무너트리고 있어.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유진이라는 자는 혼자서 수천억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하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어 가고, 일자리를 잃고 굶주림에 고통받는 동안 말이야. 그래놓고는 겨우 음식물 조금 지원해 준 걸로 생색을 내고 있어. 그런데도 그 동양인을 존경한단 말이야?”

그녀가 정확하게 말한 단어는 칭크였다. 동양인들의 국적을 구별하지 못하는 미국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단어이다.

물론 방송에는 묵음 처리되고 자막은 동양인으로 나왔지만, 그녀의 입술은 명백하게 칭크라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두 손가락으로 눈 끝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중국인이라니! 그는 코리안이야!”

에이미가 반발하며 내뱉은 단어도 칭크였지만, 역시 묵음 처리되고 자막은 중국인으로 나온다.

“칭크든 코리안이든 무슨 상관이야? 코로나의 원인은 동양인이라고!”

명백하게 인종 차별적인 단어들이 거침없이 던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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