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선동과 분열을 넘어서
“안 좋네요. 프로듀서가 질이 좋지 않군요.”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저렇게 분란을 일으키는 장면은 삭제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쇼의 제작진은 오히려 분란을 조장하기로 한 모양이다.
“똑똑한 사람이로군. 지금 시점에서 가장 논란이 될 장면을 넣었어. 시청률이 두 배로 뛰겠네.”
“그러겠지요. 욕을 먹는 사람은 따로 있고요.”
논란이 너무 심해지면 발언의 당사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쇼의 제작진은 그저 참가자들의 다툼을 고스란히 내보낸 잘못밖에는 없다고 발뺌할 것이다.
물론 저런 과격한 발언을 하는 여자로서도 나쁠 것은 없다. 비난이야 받겠지만, 덕분에 인지도를 잔뜩 올릴 수 있을 테니까.
야망을 지닌 사람이라면 방송이든 영화든 사람들에게 우선 이름을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유진도 모니카도 쇼의 와중에 유진에 대한 과격한 비난이 오르내리는 것에는 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유진이 미국이나 할리우드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성역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미국에 성역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진처럼 영향력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현직 대통령조차도 유머의 소재로 사용하며 모욕 주는 것에 거침없는 것이 미국의 방송가이기도 하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게 두 가지 있다고 한다. 바로 언론의 자유와 총기다.
이곳에서는 누구라도, 그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마음대로 욕할 자유가 있다.
당장 기업의 대표들이 트럼프의 정책에 반발을 표하며 머리가 나쁘다거나, 형편없는 사기꾼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나라이다.
한국에서 기업인이 정치인에 대해 그런 말을 했다면 당장 기업의 존망이 위태로울 터이지만, 미국에서는 당연한 의사의 표현일 뿐이다.
단순히 비판이나 비난의 수준을 넘어서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비난이나 모욕을 해도 상관없다.
오히려 그걸 다시 법정으로 끌고 가는 쪽이 자유의 방해자로 지탄받기 쉽다.
미국은 자유지상주의의 나라이다. 누구라도 다른 누구를 비난할 권리가 있다.
설령 대통령이라 해도 자신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기업을 망가트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과거로 돌아온 유진이 미래의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보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활동의 본거지를 미국으로 삼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비난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대신 그 자신도 원하는 말을 마음대로 내뱉을 수 있고, 누구라도 비난할 수 있다.
“잘 들어둬. 코로나의 원인은 중국이고, 코리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나라야. 마치 미국하고 멕시코가 전혀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말이야. 물론 네 자그마한 머리로는 구별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뭐?”
“그리고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버는 부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아. 하지만 그중에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수백억 달러를 쓰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야. 넌 수백억 달러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계산도 안 되겠지? 10달러만 넘어가도 계산이 안 되잖아?”
에이미는 결코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물론 저기에는 시나리오의 역할도 있겠지만,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 실린 감정을 보면 틀림없이 그녀 스스로도 충분히 저렇게 사람을 깔아뭉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억은 십이 10억 개가 있어야 하는 큰돈이야. 아! 십억이 얼마나 큰 숫자인지도 모르겠구나? 미국 사람이 겨우 3억 명이 넘는다고.”
쉬지 않고 튀어나오는 에이미의 발언에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한다는, 숫자에 약한 여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세상 그 어떤 부자도 수백억 달러를 아무 조건 없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내놓은 적 없어. 적어도 미국인의 30%는 그 사람 덕분에 굶주림을 피할 수 있었다고!”
“와우! 제작진이 작정한 모양이네요.”
“그런 걸까?”
“음…… 어쩌면 에이미 자신이 진심인 것도 같고요.”
“그렇게도 보이는군.”
유진과 모니카는 아주 흥미롭게 쇼를 지켜보았다.
한동안 두 여자가 아웅다웅하며 쇼의 클라이막스를 이끌어 갔고, 덕분에 이 쇼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외우지 말라고 해도 유진이 얼마나 큰돈을 코로나로 고통받는 미국인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지 뇌리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차에서 에이미의 팀은 게임에서 패배했고, 에이미에게 시비를 걸었던 여자는 팀원들의 투표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탈락했다.
그렇다고 탈락한 여자에게 마냥 손해는 아닐 것이다.
인과응보의 느낌을 주기 위해 그녀의 분량이 잔뜩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터였다.
“아무래도 신경을 써 줘야겠어요. 저 정도로 노골적으로 구애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에이미를 쇼의 끝까지 남겨 둘 생각인 모양이네.”
그런데 유진이 신경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에이미 굿윈의 태도였다.
그녀는 유진을 옹호하는 발언을 할 때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었다.
물론 전체를 시나리오라 보면 그녀의 행동도 연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리얼리티 쇼의 시나리오라는 것이 담당 배역의 성향을 아예 배제하고 이루어지진 않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태도 또한 진심에 가깝다 느껴졌다.
더군다나 모니카의 보고에 따르면 그녀는 결코 연기가 뛰어난 배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유진은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지난 삶에서 에이미 포레스트는 남부의 정신이라던 남편의 뒤를 이어 극우의 화신으로 등장해 미국을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그 운명을 대신해 무언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당분간 에이미에게 꽃다발 같은 것은 더 보내지 않는 게 낫겠어요.”
모니카도 뭔가 위험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편이 낫겠어.”
“지금도 거의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오고 있어요. 그건…… 답장은 하는 게 낫겠죠?”
“적당하게.”
“알았어요. 선을 넘지 않도록 하지요.”
어쩌면 그녀가 다시 정치계로 뛰어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이다. 하나 이번에는 지난번에 유진이 보았던 것처럼 비극적인 결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유진은 그녀의 죽음이 미국에 가져온 충격을 기억한다.
기후변화에 대한 대책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그녀의 지지자들은 그때부터 훨씬 더 공격적이 되었다.
유색인종에 대한 지원책에 반대하던 백인들 또한 전보다 더욱 차별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링컨의 죽음이 오히려 국가의 분열을 봉합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과는 반대로, 그녀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던 미국 사회를 완전히 두 동강 내어 버렸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잘하면 쓸 만한 패가 되겠어.’
TV쇼가 진행되는 동안 유진의 마음은 점점 굳어져 갔다.
그녀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단순히 호의나 존중을 넘어선 어떤 단계에 가깝다는 것은 화면을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정치적 능력을 유진이 활용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유진은 그녀의 선동 능력이 얼마나 탁월한지 잘 기억한다.
그녀가 죽고 나서 10년이 넘도록 그녀의 지지자들은 그녀를 추모하고, 그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과격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생길 분열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어느 나라이든 모든 국민이 한마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개는 둘, 혹은 셋이나 넷, 때로는 수도 없이 많은 갈래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는 것은 제대로 된 사회라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유진은 오히려 아무 분열도 없는 사회가 훨씬 더 무섭고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었다.
내부적으로 분열된 사회는 적어도 외부에 과도한 폭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유진이 겪어 본 미국 내 사회적 분열의 책임을 전부 에이미 포레스터에게 묻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평가일지도 모른다.
이미 미국은 내재적으로 사실상 나뉘어 있다 보아야 하고, 도널드 트럼프나 에이미 포레스터는 그런 분열의 한 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에이미 굿윈은 유진의 구상에서 한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응? 이 번호는?”
그때, 모니카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관리하는 몇 개의 휴대폰 중 하나를 들고 전화번호를 살펴본다.
“네. 유진 강의 전화입니다.”
유진은 몇 개의 전화번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유진 자신이 아닌 모니카가 관리한다.
유진이 직통으로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여전히 가족들과 소수의 측근뿐이다.
그리고 지금 모니카가 받고 있는 전화는 유진의 중요한 고객들에게만 알려준 직통 전화번호이다.
이 번호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몇 안 되고, 그들은 모두 적어도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네. 그렇습니까? 어디요? 알겠습니다. 바로 조처하겠습니다.”
모니카는 그리 길지 않은 통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예 서기입니다. LA에 있는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도움이 필요하다는군요.”
‘중앙군사위원회 기율검사위원회’라는 길고 무서워 보이는 기관의 서기로 있는 사람의 부탁이라면 거절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현 중국 지도자의 총애를 잔뜩 받는 사람이며, 차기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아들? 예 서기 아들이 스탠포드에 다니고 있다고 했었지? 어떤 일인데?”
그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사 사항이나, 가족관계 정도는 머릿속에 넣고 있다.
사실 지금의 유진에게야 그런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지만, 이미 수십 년 동안을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어지간하면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잊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약물 문제 같습니다.”
“흠. 그러면 역시 존 브레넌에게 연락을 해야겠군.”
대충 짐작이 갔다. 중국은 한국보다 훨씬 마약 중독자가 많은 나라이다. 아마 국가의 규모가 큰 때문이리라.
미국으로 유학 온 권력자의 자식이 마약에 손을 대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째서 자국의 요원이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는 외부인에 이런 중요한 문제를 요청하는가 하는 것이다.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비밀리에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진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모니카가 존 브레넌에게 연락을 넣는다.
존 브레넌은 단순히 세계 각국의 정보기관에 연줄을 가졌을 뿐 아니라, 국내에도 아주 넓은 인적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정도 문제는 그리 큰 문제 없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조처하겠다고 합니다. 바로 사람을 보냈고, 익명으로 입원 처리할 수 있답니다.”
그리고 존 브레넌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많은 일을 처리하는 방법을 여럿 알고 있는 모양이다.
모니카가 전화를 받고 일이 해결되었다는 보고를 받기까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