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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19화 (219/363)

219화 슝띠(兄弟)

“해결되었습니다. 안전한 곳에서 회복 중입니다.”

그날 오후 바로 존 브레넌에게 직접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스탠포드에 다니는 예 서기의 막내아들이 친구들과 조금 방종한 파티를 즐기다가 약물을 과도하게 복용했다고 한다.

안전한, 그러니까 신분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병원에서 치료 중이며 회복이 되면 조용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굳이 우리 쪽으로 도움을 요청한 이유가 있을 텐데요?”

내친김에 궁금한 걸 물어본다.

중앙군사위원회 기율검사위원회는 중국 인민해방군을 감독하는 군 감사기관이며, 동시에 국가 감찰 기관이다.

명칭으로만 보면 군에 관련된 감찰을 맡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군과 공산당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위법 행위를 감찰하는 무시무시한 권력을 지닌 곳이다.

당연히 국가 지도자의 총애를 받는 최측근이 담당하는 기관이다.

비록 미국 내에서의 일이라지만, 그런 막강한 권력을 지닌 사람이 자국 외교관이나 외교부에 속해 있는 정보원들 대신 미국의 민간인인 유진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특이한 일이다.

“최근 국가안전부 부장으로 임명된 임 부장이 예 서기와는 꽤 사이가 멀다고 하더군요.”

바로 해답이 나온다. 국가안전부는 중국의 정보기관으로, 기율검사위원회 못지않은 권력을 가진 곳이며 이곳의 부장도 지도자의 최측근이 맡는다.

존 브레넌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국가의 중요한 자리인 감찰, 정보기관 두 곳의 장을 서로 다른 파벌에 넘겨주어 서로 견제하도록 한 모양이다.

리더로서는 적절한 결정이지만, 문제는 기율검사위원회와 국가안전부의 수장들이 각기 차기 지도자를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서로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여 주는 일은 최악의 선택이었고, 그 때문에 차라리 제3자인 유진에게 도움을 청한 듯했다.

미국 내 중국 정보망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안전부의 눈을 피하려면 중국인을 동원하는 것은 좋지 못한 판단이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정적에게 아들의 치부를 보여 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미국인인 유진에게 밝히는 것보다 좋지 못하다 여길 정도라는 의미이다.

한편으로는 유진을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하긴 그동안 유진이 중국 내에서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 서기장이니 그럴 만도 하다.

지난번 이방카 트럼프 패션을 사 가 한몫 제대로 잡은 쪽도 예 서기장 계열이고, 암호화폐 거래소도 그쪽을 통해 넘겼다.

좋은 거래였다. 그쪽은 이모저모로 큰 이익을 남겼고, 유진은 중국 내 쓸 만한 투자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몇 건의 큰 거래에 예 서기장을 끼워 주고 있다.

이쯤 되니 예 서기장으로서는 유진과 경제 공동체라 여길 만도 하다. 예 서기장이 실각하면 유진에게도 중국 시장에서 적지 않은 손실이 발생할 것이다.

유진으로서야 예 서기장의 미래를 잘 알고 있으니 당연한 결정이다.

“고생 많았습니다.”

“천만에요. 전화 몇 통화 돌린 게 전부인걸요.”

“그런 것치고는 성과가 좋네요.”

사실 이번 일은 예 서기장 측에 대단한 은혜를 끼쳤다 할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는 상대가 유진에게 자신의 목덜미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

예 서기장이 유진에게 너를 이만큼이나 믿고 있다는 정치적 제스쳐를 보여 준 셈이니, 아마도 예 서기장과의 인연은 이를 기점으로 더욱 깊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유진의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사실로 확인되었다.

“코로나의 여파로 애로가 많겠군요.”

팬데믹으로 인해 온 세계가 봉쇄되어 버린 상황이지만, LA에 머무는 사이에도 유진의 사교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아직 해외를 드나드는 비행이 어려운 탓에 외국에서 찾아오는 손님은 거의 없지만, 내국에도 만나 볼 사람이 충분히 많았다.

물론 전처럼 화려한 사교 파티를 주최해 손님들을 잔뜩 모으는 일은 없다.

대신 조금 더 비중 있는 이들을 초청해 긴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아무래도 투자가 전처럼 쉽지는 않군요. 내부 상황이 엉망이라 이쪽으로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도 있고요.”

이날 찾아온 손님은 퍼시픽 인터내셔널이라는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장시웨이였다.

“지난번에 말씀하신 투자 문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내부 상황이 조금 안정된 이후에나 가능할 거 같습니다.”

“모두 우려가 큽니다. 모쪼록 이 사태가 빨리 진정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모든 사태의 근원을 중국으로 돌리는 몰지각한 시각 때문에 해외의 동포들이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요. 중국 인민들뿐 아니라 모든 동양인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도 이거 하나 샀습니다.”

장시웨이가 웃으며 슈츠에 꽂혀 있는 배지를 가리켰다.

“아! 그건…… 하하.”

유진은 장시웨이의 배지에 새겨진 자기 사진을 보고 멋쩍게 웃고 말았다.

코로나 사태로 중국인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미국의 한인들은 유진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를 달고 다니거나 아예 그의 얼굴이 크게 인쇄된 셔츠를 입고 다니는 일도 생겼다.

이제 유진의 얼굴은 미국인이라면 대충은 알아볼 정도이니, 그의 얼굴을 보고도 물리적 습격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단다.

그러자 한국 출신이 아니라도 동양인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유진에 관련된 패션을 두르는 것이 유행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특히 중국인들이 더욱 열심히 그런 셔츠를 제작해 입고 다니는 모양이다.

물론 그런 상품들은 전부 유진과 상의 없이 제작되는 것이라 유진에게 한 푼의 저작권 수익도 들어오지는 않지만, 그걸 꼭 받아 낼 생각도 없다.

덕분에 유진에 대한 호감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로서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 쥔산 군에게 생긴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꽤 중요한 비밀인 예 서기의 아들에 대해 거침없이 입을 여는 것을 보면, 장시웨이는 예 서기의 측근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예 서기께서 강 슝띠(兄弟)와 뵙게 될 날을 고대하고 계신다고 전해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장시웨이의 방문은 예 서기의 전언을 위해서였다. 전화를 통해 전달하기보다 사람을 직접 보내 의사를 전하는 것이 훨씬 더 정성스럽게 보이는 것은 지금 시대에도 통하는 예절이다.

“형제라. 정말 고마운 말씀이로군요.”

장시웨이의 말에서 유진은 예 서기가 자신과 좀 더 깊은 관계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꽌시(关系) 관계가 더욱 깊어진 셈이다.

중국 영화에서는 늘 형제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리고 나이 차이가 한 살만 나도 서로 형, 동생으로 부르곤 하는 한국인들은 그 단어에 아주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 형제라는 호칭은 단순히 나이가 많고 적음을 통해 서열을 나누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여기서 형이나 동생이라는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나이를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보다 형제라는 단어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중국인들에게 있어 사회적으로 맺는 관계는 호칭에 있어 몇 개의 단계를 거치며 깊어진다.

조금 친하면 펑요우(朋友), 즉 친구. 좀 더 깊은 관계라면 라오펑요우(老朋友), 오랜 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슝띠(兄弟)에 이르면 서로가 혈육처럼 서로를 돌봐 주는 단계가 된다.

그러니까 펑요우에 대해서는 이해득실을 차리며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이로 한정되지만, 슝띠가 되면 가족처럼 배신하지 않고 최대한의 도움을 주는 관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예 서기는 자신의 정적에게서 제 아들을, 좀 더 넘어서는 그 자신을 도와준 유진에게 형제와 다름없는 호의를 느끼고 있다는 말을 전하는 셈이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서와 달리 현실 세계에서의 이런 꽌시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계이다.

유진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을 알고 있고, 자신도 유진을 크게 도울 수 있으니 형제처럼 잘 돕고 살아가자는 의미였다.

유진은 중국 지도자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권력의 중심에 다가설 수 있다.

예 서기가 현재 지도자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자신의 부친 덕분에 중국 중앙 정치의 중심부에 서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에 올라서기 위해서 적지 않은 냉정한 결단이 필요했다.

앞으로 그가 중국 정치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중국이나 세계의 평화를 위해 예 서기가 미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인지는 유진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예 서기가 아닌 다른 경쟁자의 손을 들어준다 해서 더 낫다는 보장도 없다.

어느 쪽이건 정적에 대해 냉혹한 사람들인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유진이 이미 알고 있는 미래보다 훨씬 더 참혹한 선택도 주저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 또한 명확하다.

물론 유진 스스로가 중국의 지도자를 결정할 수 있는 킹 메이커의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

특히 폐쇄적인 정치체제를 갖춘 나라에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아주 많다.

그래서 유진은 자신이 지닌 부가 그만한 영향력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구상에는 민주주의 국가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재국가, 혹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경직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들도 잔뜩 있다.

독재국가나 소수의 상류층에 의해 지배되는 이런 나라들의 경우 유진이 지닌 부는 그 나라의 지배층에 호의를 보내는 이상의 의미가 되기 어렵다.

유진이 앞으로 얼마나 큰 돈을 더 벌어들이건, 그런 나라들에서는 제한된 영향력을 지닐 뿐이다.

물론 해당 국가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리는 등의 과격한 수단을 통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라도 국가의 지도자가 지닌 영향력을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권을 쥐고 있는 리더, 또는 집단은 국가의 손해보다 자신이 가진 권력에 훨씬 더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다.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조차도 적대적인 국가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유진은 틀림없이 지구 역사상 그 누구보다 많은 자산을 지닌 부자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가 지금 보유한 자산 이상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까지의 세계적 부자들이 지닌 부가 현금화할 수 없는 기업의 지분을 시장가치로 환산한 것이기에 실질적인 부라 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유진이 운용하는 자산의 상당수는 주식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가 어떤 특정 회사의 지배력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없는 이상 언제라도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 현금화 가능한 자산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대단한 부를 지니고서도, 유진이 가진 영향력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한계를 넘어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진은 조금씩 조금씩 그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가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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