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슈퍼팩과 3선
어떤 의미에서 유진의 인기는 이미 대통령인 트럼프를 넘어서고 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의 완성판인 미국에서 인기라는 것은 들어간 홍보비에 비례하는 게 당연했다.
“남부 지역 유세에 자네도 참여해 주었으면 좋겠군.”
트럼프는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아쉽지만 요즘 몸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런 행사는 무리일 것 같군요. 몸이 약한 사람은 코로나에 걸리기 쉽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유진은 트럼프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더군다나 코로나에 취약한 트럼프 캠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트럼프 그 자신조차 선거를 겨우 한 달 남겨 두고 코로나가 확진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행여라도 그와 만날 생각은 없다.
“도널드도 너무 무리할 거 없어요. 이번에도 좋은 결과가 나올 거라 믿고 있습니다.”
유진은 거절을 표하면서도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곁들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이번에는 조금 위험해.”
도널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침중했다.
“빌어먹을 코로나!”
도널드 트럼프가 온갖 기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은 유명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명백하게도 도널드는 자신의 악명까지도 사업에 이용할 만큼 총명한 사람이다.
자신의 재선이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모를 사람도 아니다.
“빌어먹을 칭크 놈들! 멍청한 언론들이 날 헐뜯고 있어.”
언제나처럼 트럼프는 사태의 원인을 외부에게로 돌렸다.
늘 그랬다. 자신의 승리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가 잘났기 때문이지만, 실패의 원인은 누군가 멍청한 놈들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여전히 트럼프는 자신의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선거 비용이 물 쓰듯 사라지고 있어. 빌어먹을 언론들이 전부 저쪽 편이니, 지난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해.”
사실 트럼프가 직접 전화를 한 가장 큰 이유는 선거 유세에 함께 나서 달라는 것도 있지만, 선거 비용을 징징거리기 위함이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 소비되는 자금은 임기가 넘어갈수록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적어도 150억 달러에 달하는 선거 비용이 사용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거기다 트럼프보다 당선 가능성이 크고, 인기도 많은 바이든이 트럼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금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 자리에 있으면서 그다지 대단한 업적을 이루어 내지 못한 트럼프는 이제 지난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몇몇 공화당 계통의 거부들에게마저 손절당한 상태였다.
“돈은 충분하지 않던가요?”
유진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요 몇 년 사이 도널드의 재산이 몇 배나 늘어나지 않았어요?”
물론 전부 유진 덕분이다. 요안나가 운용하는 펀드에서도 트럼프의 재산이 포함된 펀드는 가장 상위에 놓여 있다.
“그야 물론이지. 하하…….”
처음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와 지금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도널드는 자신이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유진에게 맡기는 쪽이 월등하게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백악관에 입성한 뒤로 각국의 정치권을 통해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에 이런저런 이권을 얻어 내려 노력했지만, 실제로 그를 통해 벌어들인 돈은 그다지 대단치 않다.
그동안 유진은 트럼프 오가니제이션에 대해 몇 번이나 경고해 왔다.
당연히 납부해야 할 세금을 줄이기 위한 행동이나, 증권법에 어긋나는 투자금 모집 따위에 연루되지 말라는 말을 이방카나 쿠슈너를 통해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정말 그들의 욕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출이 너무 커. 슈퍼팩도 상대보다 훨씬 적고.”
트럼프가 원하는 것은 역시 슈퍼팩이다.
슈퍼팩이란, 자본주의의 끝판왕인 미국답게 선거에서도 정치자금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상당히 독특한 제도이다.
후보자 개인을 지원할 수는 없고, 특정 정책이나 사상에 대해 제한 없이 광고할 수 있는 것인데, 실질적으로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오늘날 미국 선거판이 자금력에 의해 결론이 날 정도로 왜곡되어 버린 것에는 이 슈퍼팩이 가장 큰 원흉이라 할 수 있다.
도널드를 지지하는 대신 도널드의 정책 일부에 대한 지지를 표방하는 TV 광고를 종일 틀어 대면 효과가 없을 수 없다.
그 때문에 미국에서도 이 슈퍼팩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훨씬 더 많다.
지난 대통령인 오바마나 도널드 트럼프 또한 슈퍼팩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은 자신의 선거에 슈퍼팩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슈퍼팩으로 수십억 달러를 사용하는데, 자기만 사용하지 않으면 선거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런 슈퍼팩에 후원하는 단체나 기업주의 입김은 선거를 거듭할수록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다.
후원을 받은 쪽에서 선거에 승리하게 되면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으니.
그리고 지금 도널드 트럼프 선거 캠프의 상황은 그런 슈퍼팩을 유치하는 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요. 어쩌면 이번 선거는 양보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유진은 트럼프가 원하는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당연히 도널드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진다. 도널드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는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진의 대답은 그 두 가지가 모두 섞여 있었으니, 도널드로서는 발끈할 수밖에 없다.
“도널드. 이번 코로나 사태가 언제까지 갈 것으로 생각해요?”
유진은 트럼프의 분노 섞인 목소리를 무시하고 물었다.
“……적어도 1년?”
잠시 고민하던 트럼프가 대답한다. 이미 빈정이 상했지만, 유진과의 통화를 끊어 버릴 생각은 없다는 의미이다.
도널드 자신조차 다음 선거에서의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진과 척을 지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과연 1년 안에 사태가 진정될 수 있을까요?”
도널드의 입장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유진은 그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갔다.
“아니면 2년?”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아도, 도널드는 다시 대답한다.
“정확히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도널드가 생각하고 있는 이상으로 오래 갈 겁니다.”
“정말인가? 하기는 재난관리청의 그 노인네가 뭐라고 하기는 했었는데 말이야.”
“적어도 2, 3년은 코로나로 모두가 힘들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게 진정이 되고 나서도 세계 경제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려워질 테고요. 그러니까 다음 대통령은 임기 내내 코로나라는 무시무시한 괴물과 싸워야 하지요. 그 와중에 경제는 파탄이 나고, 4년 내내 욕만 먹을 거예요.”
“음…….”
그제야 도널드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진다.
“차라리 이번 선거를 내어주고 다시 찾아오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요. 그때는 훨씬 쉬워질 겁니다. 코로나로 지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을 그리워할 거고 말이죠.”
“과연 그렇게 되겠나?”
“다행히 이번 상대는 4년 이상 버티기 힘든 노인이 아닌가요?”
“하하! 맞아. 그 노인네, 간신히 서 있기조차 힘들어한단 말이지.”
사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사이지만, 트럼프는 바이든을 중늙은이로 치부한다.
이미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가장 고령의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대통령은 그 기록을 또다시 경신할 것이다.
“다음 선거에서 당선되면, 마음 놓고 재선을 노려볼 수도 있고 말이지요.”
“흐음…….”
트럼프는 유진이 말한 3임 대통령이라는 말에 조금 끌리는 모양이다.
물론 미국 수정헌법 22조에 따라 미국 대통령은 임기를 두 번 초과할 수 없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이 된 이후 내내 자신은 3선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어 왔다.
미국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규율인 헌법마저도 우습게 여길 만큼 도널드 트럼프의 에고는 강했다.
“3선이라…… 3선 대통령이란 말이지.”
미국의 유일한 3선 이상의 대통령인 루스벨트에 이어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트럼프의 일생은 자신의 능력을 외부에 자랑하기 위한 것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3선 대통령은 그 결정적 트로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도널드에게 중요한 건 슈퍼팩이나 선거의 승리가 아니에요.”
“그럼 뭔가?”
“당연히 도널드를 지지해 줄 사람들이지요.”
“흐음…….”
“도널드는 지금 억울하게 밀려나는 겁니다.”
“맞는 말이야. 그놈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물론 음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위대한 도널드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세력이 강대하다는 주장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잘 먹혀들어 갈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경멸받는 대통령이지만, 놀랍게도 동시에 공화당 출신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수많은 지지자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독특한 언행과 기행은 현실 정치에 분노한 수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고, 이제는 진정으로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수많은 지지자를 갖고 있다.
“때때로 영웅은 무척 심각한 곤경에 처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그 곤경이 심각할수록 빛이 나는 법이에요. 그래야만 모든 곤경을 물리치고 제자리에 섰을 때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될 겁니다.”
“흠…….”
물론 도널드는 멍청이가 아니다. 유진이 에둘러 슈퍼팩에 지원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더군다나 유진이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바이든에게 거액의 후원을 해 왔고, 지금도 바이든과 깊은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비밀이 아니다.
바이든이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를 결심했을 때, 그 아들의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 수 있도록 엄청난 액수의 후원을 하고, 그가 다시 정치계에서 목소리를 내게 만든 사람이 유진이라는 것은 이제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유진은 트럼프는 물론이고 바이든에게까지 손을 내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바이든이나 트럼프가 그 사실에 대해 불쾌감을 표현할 수는 없다.
둘 다 유진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아 왔고, 만일 유진이 자신에게 등을 돌려 상대에게 붙어 버리면 손해를 보는 쪽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 될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니 지금 유진이 슈퍼팩에 지원을 해 주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오히려 유진이 바이든을 위한 슈퍼팩을 후원하지 않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다.
이 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이 마음대로 자본가를 억압할 수 있는 권위주의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언제나 돈이 있는 자본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만일 어떤 기업가가 대통령과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고 해서 섣불리 보복에 나섰다가는 상상도 하지 못할 반발에 당장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나라이다.
그러니 그 성질 급한 트럼프도 화를 누르고 유진과 평화로운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영웅이라…….”
그리고 유진의 말에는 제법 나쁘지 않은 제안이 담겨 있었다.
코로나로 몇 년이나 고생하는 자리는 차라리 넘겨주고, 다음번을 노린다.
물론 다음번 공화당 후보 자리가 자신에게 오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유진의 말처럼 그의 인기는 꽤 유의미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