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황금률
“월가의 은행가들은 언제나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면서도 자신들에게 조금만 손해가 생기면 국가에 천문학적 지원을 요구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작 국가에 큰 위기가 왔을 때는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할 뿐입니다. 오히려 내 계획에 반대만 하고 있지요.”
트럼프는 언제나 자신 대신 욕을 먹을 사람을 지명하는 것에 굉장한 재능이 있었다.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대체로 금융가들이란 늘 욕을 먹어 왔으니까.
지난 선거에서 트럼프는 월가의 금융계를 비난하며 아주 큰 인기를 얻었다.
정작 트럼프 일가가 바로 그 월가의 금융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수많은 사업을 벌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시민들은 월가를 욕하고 나선 트럼프에 환호했었다.
이번에도 도널드가 월가에서 적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월가에 대한 적나라한 비난을 연신 입에 올리는 것에 환영하고 있었다.
“내 친구 유진은 자신이 벌어들인 대부분을 굶주리고 있는 미국 시민들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이번 해에만 적어도 5,000억 달러를 내놓아 수천만 명의 시민들을 살렸습니다. 대체 유진 말고 이렇게 위대한 행위를 한 은행가가 누가 있습니까?”
유진은 트럼프의 유세에 나서는 것을 거절했지만, 트럼프는 유진의 이름을 마음껏 팔고 있었다.
“5,000억 달러입니다! 한 위대한 시민이 전 재산을 미국인들의 삶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월가의 은행가들은 그 대신 수십억 달러를 내놓아 바이든을 지원하는 슈퍼팩을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로 참담하기 그지없군요.”
물론 5,000억 달러라는 말도 진실과는 꽤 거리가 있고, 전 재산이라는 말도 전혀 사실과 먼 이야기이지만, 트럼프는 자기 편한 대로 숫자를 사용한다.
2,000억 달러보다 3,000억이 훨씬 더 자극적이고, 자산 일부라는 말보다 전 재산이라는 말이 훨씬 더 감동적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사람은 아니었고, 그때그때 편한 대로 내뱉으며 진실을 호도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래서 그의 말에는 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후속 기사가 따르기 마련이었지만, 그의 언행이 늘 그랬기에 사람들은 이제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도널드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요.”
유세를 지켜보던 모니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비록 도널드로서는 유진의 친구라는 사실을 앞세워 자기 자신을 높이고, 반대로 월가를 욕하며 자기보다 월등히 많은 슈퍼팩 지원을 받고 있는 바이든을 엿 먹이려는 것뿐이지만 결과적으로 트럼프의 그런 유세 발언은 유진에게도 결코 나쁠 것이 없었다.
“트럼프가 유세에서 발언하는 말은 전국으로 퍼져 매번 수천만 명의 시청자가 듣고 있어요. 오늘 그가 유세에서 보스를 칭찬한 것만 홍보비로 측정해도 최소한 수억 달러는 충분하겠네요. 나 참…….”
모니카는 명백하게 민주당 지지자였다. 사실 유진 사무실 대부분이 민주당의 지지자이다.
좀 더 넓히면 월가나 실리콘밸리 종사자 중 상당수가 민주당을 지지한다.
하지만 모두 도널드가 보스에게 유리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에요. 3조 달러가 크긴 크군요.”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일단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 발언으로 도널드는 기존 15%까지 차이 나던 여론조사에서 9% 차이까지 따라붙었다.
이에 바이든 진영에서도 더 많은 지원과 빠른 의회의 결단을 촉구하며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5년 전 아들이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우리 가족에게 다가와 위로해 주고 도움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유진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유진은 틀림없이 월 스트리트의 금융가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었다는 위대한 금융가이지요. 하지만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그렇게 큰돈을 조금의 사심도 없이 힘든 이를 위해 내놓지 못했습니다.”
바이든 또한 질세라 유진과의 인연을 꺼내놓았다.
유진이 팬데믹으로 야기된 경제 쇼크에서 벌어들인 돈이 1조 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까지 누구보다 많은 돈을 미국을 위해 내놓았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유진은 몇 년 동안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단 한 푼의 세금도 억지로 절약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수많은 국제적 기업들이 해외에 법인을 만들어 수익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지만, 유진은 단돈 1센트까지 정확하게 세무당국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모범 시민인 유진은 그렇게 모은 돈을 아낌없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이든은 유세 시간의 적지 않은 부분을 유진의 너그러운 자선을 칭찬하는 데 할애했다.
물론 뒤에 이어질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1억에 달하는 미국인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어째서 우리 위대한 미국인들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코로나라는 끔찍한 질병이 위대한 미국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하루에 20만 명이 넘는 새로운 확진자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미 2,0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이 이 질병에 걸렸습니다. 하루에도 2,000명이 이 끔찍한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입니다.”
바이든이 잠시 말을 멈추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미국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트럼프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역당국의 활동을 방해했고, 확진자가 증가하는 추세는 점차 가팔라지고 있다.
이는 유진이 기억하는 이상의 속도였다. 트럼프가 자신의 차기 선거를 위해 코로나 사태를 방치하는 것을 넘어 오히려 확산을 돕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연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법정에 소송을 걸었다.
방역당국은 이제 수시로 법원에 끌려다니며 정력을 낭비하고 있을 지경이다.
“우리의 위대한 조국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팔십 대 노인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적어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감염자가 나온 것에 대해서, 1억 명의 미국인이 굶주리는 현실에 대해서 틀림없이 잘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이든도 도움이 되네요. 역시 3억 달러 정도의 효과는 충분히 되겠어요.”
트럼프의 유세를 볼 때와 달리 옅은 미소를 띠며 모니카가 홍보 효과를 계산했다.
그녀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바이든의 지지자는 아니다. 사실 민주당 지지자 중 바이든을 지지하는 사람은 오히려 소수다.
그런 상황에서도 바이든이 안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어, 망나니 같은 트럼프를 이길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이유로 바이든이 선택되었다.
“이번 선거전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은 보스인 것 같네요. 누가 대통령이 되건 말이지요.”
매번의 유세마다 유진이 한두 번은 꼭 거론된다. 두 후보자 모두 유진을 자신의 친구라 불렀다. 물론 유진의 이미지에 자신을 덧입히기 위해서이다.
그렇다고 해도 유진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리고 유진은 여전히 자신의 이미지를 미국인들에게 심어 놓기 위해 아낌없이 돈을 쓰는 중이다.
유진이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지도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의 미국 내 영향력이나 위치가 굳건하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유진은 동양에서 온 외부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리고 외부인의 지위는 언제나 사상누각일 수밖에 없다.
그가 미국 사회에 완벽하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그걸 위해서라도 유진은 자신이 가진 유일한 힘을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마침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재앙이 미국을 덮쳤고, 지도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덕분에 유진의 자선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실 꼭 이미지 때문이 아니라도 유진은 돈을 써야 했다. 이미 유진의 관리 자산은 조 단위를 넘어선 지 오래고, 코로나를 기점으로 매년 조 단위의 수익이 예상되었다.
미래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단순히 금융 투자만으로도 그 정도의 이익을 낼 수 있다.
코로나로 인해 미국의 대형 IT 기업들이 적어도 수조 달러에 달하는 성장을 보일 것을 제외하고도 그렇다.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한 사람에게 과도한 수익이 몰리는 것이다.
이미 1년 수익만으로 세계 10위권 국가의 GDP를 능가한다. 게다가 이건 아직 벌어들일 수익의 초반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지난 5년여 동안 유진은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기업 대다수를 매점해 왔다.
이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해 수익을 내기 시작하면 다시 끔찍하리만큼 큰 수익이 생겨난다.
앞으로 한두 해만 지나도 세계 경제 규모는 100조 달러를 넘어설 것이다.
그중 1%라면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유진의 부가 덩치를 키워 가는 기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이다.
매년 지금 같은 성장세를 보인다면, 10년만 지나도 유진의 자산은 세계 경제 규모의 10%가 훌쩍 넘어갈 것이다.
그때 즈음이 되면 세계 경제 주체들은 원치 않아도 유진의 부에 대해 경각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유진이 각국 리더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에게까지 충분한 부스러기를 나누어준다 해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미 미국 사회는 20세기 초에 과도한 부를 소유한 기업가들에게 독과점 금지 따위를 포함한 다양한 방법으로 부의 집중을 막아 왔다.
유진에게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당시까지만 해도 재계의 거물들은 감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과점 금지 따위로 자신들의 기업을 분할시키리라 생각지도 못했다.
유진은 지금까지 없던 일이 앞으로도 당연히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젠가는 유례없는 상황이 발생하리라 생각하고, 미리 그에 대비하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유진으로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벌어들이는 규모를 스스로 제한하거나, 혹은 벌어들이는 만큼을 써 버리거나.
유진은 후자를 선택했다. 차라리 더 많이 벌고, 그걸 사회에 환원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규모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유진의 지출 자체가 사회 구조 일부분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진의 위기는 세계의 위기로 연결될 수밖에 없게 만들 생각이다.
마치 미국에 경제 위기가 오면 세계 경제에 위기가 따르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의 영향력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트럼프든 바이든이든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이용해 줄 생각이다.
물론 그들도 자신이 유진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모름지기 최선의 거래는 양방이 모두 이득을 볼 때이다.
일방적으로 한쪽만 이익을 보는 거래는 필연적으로 갈등을 야기하고, 파국을 몰고 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