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인플레이션의 조짐
가을로 들어서며 뉴욕에서 요안나와 데이비드를 비롯한 자산 운용에 관련된 주요 인사들이 각기 전용기를 타고 LA로 건너왔다.
휴가라는 핑계였지만, 실제로는 이해 하반기와 내년의 전략을 결정짓기 위해서였다.
“전용기는 어때?”
요안나와 데이비드에게는 각기 새로운 전용기 한 대씩을 보너스 형식으로 수여했다.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데이비드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비드가 뭐가 어때서요? 월 스트리트 5대 자산운용사 대표라면 전용기 한 대쯤은 당연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수익률로는 최고인데?”
요안나가 웃으며 물었다.
데이비드의 자산운용사 규모는 이미 10년 넘게 부동의 월가 1위를 지키고 있는 블랙록과 뱅가드 그룹, 그리고 스테이트 스트리트와 피델리티의 뒤를 잇고 있었다.
“수익률이나 운용 금액이나 제 능력이라기보다 전적으로 보스의 전략에 의존한 거라 솔직히 과분하다고 생각해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데이비드가 얼마나 훌륭하게 운영하고 있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요. 데이비드가 지금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존경받는 금융가 2위인 거 알고 계시죠?”
“하하. 보스는 빼고 순위를 매긴 거니 의미 없지 않나요? 1위 씨?”
요안나와 데이비드는 서로 경쟁 상대가 아니다. 유진이 결정한 전략을 가지고 서로 협조해서 최선의 수익을 만들어 내는 동료이다.
물론 외부에는 유진의 전략 따위는 노출되지 않아 유진이 아주 훌륭한 경영자를 뽑아 그렇게 대단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나저나, 역시 이 시기에는 캘리포니아가 좋군요.”
“맞아요. 뉴욕은 여전히 흉흉해요. 길을 나서기가 무섭다니까요.”
여전히 팬데믹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특히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뉴욕은 황폐하다는 느낌마저 받을 정도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는 게 일과에요.”
“빨리 뭔가 제대로 된 대책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우리 회사는 괜찮지만, 다른 곳에서는 매일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더군요.”
그렇게 한동안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코로나에 관한 이야기로 풀 수밖에 없는 것이 미국의 현실이었다.
마치 세계 대전이라도 일어난 듯, 화제라고는 이 지긋지긋한 전염병에 대한 것뿐이다.
“유가가 언제까지 오를까요?”
그렇게 한동안 이어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의 끝은 역시 업무로 귀결되는 것은 모두가 일벌레인 탓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로나로 전 세계의 경제 흐름이 동맥 경화가 온 것처럼 꽉 막혀 버린 상황에서 사우디와 러시아의 증산 경쟁으로 지난 4월 초유의 마이너스 유가를 기록했었지만, 그 뒤로 경각심을 가진 사우디가 기존의 생산량에서 무려 40%에 달하는 감산을 하며 점차 회복을 시작했다.
“이제 어느 정도 회복을 했는데, 앞을 알 수 없네요.”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사태로 인해 경제학자나 애널리스트나 모두가 당장 다음 달의 경제 상황조차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가 오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생산 활동이나 물류가 줄어든 것은 하락 요인이고, 사우디와 러시아가 더 이상 증산 경쟁을 벌이지 않는 것을 상승 요인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상승세에는 한계가 있다는 예측을 내놓고 있었다.
코로나가 장기화하게 된다면 비행기의 운항은 계속 멈춰 있을 것이고, 중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공장의 운영을 멈추고 코로나의 확산 저지를 최우선하게 될 것이다.
“난 앞으로 1년 이상 유가가 상승할 것 같아. 목표가는 적어도 100달러는 될 거 같고.”
“100달러나요?”
모니카가 살짝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유진이 모두의 생각과 다른 예측을 내어놓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결과는 유진의 선견지명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각국 정부에서 적지 않은 돈을 풀 모양이니까. 적어도 1년 동안은 엄청난 액수가 경기 부양을 위해 쏟아질 거야.”
“1년이나요? 앞으로도 1년이나 이런 상황이 계속될 거란 말이지요…….”
요안나가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때 즈음의 미국인 누구에게라도 그런 말을 하면 백이면 백 똑같은 표정을 지을 것이다.
제발 이번 겨울만 넘기고 사그라들었으면 하는 것이 모두의 바람이었다.
“어쩌면 세계 규모로 보아서는 1년으로도 모자랄 수도 있고.”
“아찔하네요.”
“1년 동안 보조금을 풀어서 경기를 부양한다면 엄청난 인플레가 오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트럼프가 백악관에 남아 있든 바이든이 당선되든 이런 기조는 멈출 수 없을 거야.”
“트럼프가 말한 것처럼 3조 달러 말이지요?”
“어쩌면 그걸로도 어림없을 수도 있어. 두 배 이상 쏟아붓지 않을까 싶어.”
“와우!”
요안나와 데이비드 모두 눈을 빛냈다. 천문학적 규모의 보조금이 의미하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량이 그렇게나 늘어나면 현물의 가치가 폭등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증권이나 다른 상품도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그래. 아마도 전례 없는 단기 폭등이 오고 있는 걸 수도 있어. 내 생각에는 적어도 1년은 오를 거야.”
실업이나 경기 불황으로 고통받는 서민과 자영업자, 그리고 기업에 아낌없이 퍼부어지는 막대한 지원금은 결국 돌고 돌아 금융권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애플이든 구글이든 규모 있는 곳은 적어도 두 배까지는 여유 있게 오를 거야.”
“흠…….”
“음…….”
요안나도 데이비드도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다른 사람의 예측이었다면 단순히 참고 자료로 삼을 정도겠지만, 유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에게 절대적이다.
당연히 앞으로 1년 동안 모든 투자의 방향은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지금도 두 사람이 운용하는 회사에서는 양측을 합해 대형 IT 기업 지분을 적지 않게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방향을 알고 있다면 부지런히 사고팔며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그걸 위해 월스트리트 최고의 엘리트들을 잔뜩 긁어모아 둔 것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번 코로나 사태가 시작될 당시에 유진이 발 빠르게 방역 대책을 내리고, 최우선 순위로 삼은 탓에 다른 금융기관에 비해 확진자도 적었고, 혹여 있어도 최선의 의료를 지원한 탓에 사망자는 전무하다.
덕분에 직원들의 유진에 대한 존경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투자에 대한 최고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거액의 급여를 주고, 코로나라는 재앙에서도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은 보스에 대한 충성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듯 유진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보상을 주는 것이다.
미래 정보를 알고 있는 유진이지만, 그걸 토대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잔뜩 필요했다.
“한국 내에서 코로나 때문에 준비가 끝나고도 미국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사람이 벌써 4만 명에 달합니다.”
물론 유진이 자신의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은 뉴욕의 직원들만은 아니다.
아직 유진의 본진은 대한민국,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와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포들이라 할 수 있다.
유진은 미국 내에 좀 더 많은 한국인이 정착하기를 원했다.
물론 처음부터 대단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은 경제계에서부터, 그리고 차츰 자리를 넓혀가야 한다.
그를 위해 한국에 몇 개나 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한국의 인재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또한 도널드 트럼프를 통해 충분한 비자까지 확보했다.
유진이 트럼프 일가에게 지금까지 쓴 선심의 대가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해외의 인재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워졌지만, 유독 한국인에 대해서만은 아주 넓은 문을 열어 주었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들어와야지.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대체 이 상황이 언제쯤에나 진정될지 모르겠군요.”
요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코로나로 고통받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이다.
통제에 익숙한 동양 사람들은 미국이나 서유럽에 비해 감염병 예방을 위한 국가 시책에 적극적으로 따라 주었기 때문에 훨씬 더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약 없이 이어지는 팬데믹 상황에 적응한 것은 아니다.
“백신이 개발되면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거야.”
유진은 이미 미국 정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자금을 몇몇 제약회사에 지원하고 있었다.
백신 개발로 인한 수익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빠르고 안전한 백신의 개발에 공헌했다는 이름이 따라붙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요.”
새로운 교육기관에서 미국에 진출하겠다는 희망을 품고 노력하던 수만 명이 좌절하고 있었다.
“기존 수료생들이 미국에 입국조차 할 수 없으니, 새로운 학습자들 사이에도 사기에 문제가 있었고, 신입생의 경쟁률마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냅둬. 어차피 미국으로 건너오면 훨씬 더 지독한 현실에 부딪혀야 하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하게 몇 달 혹은 몇 년 단위의 수업으로 다른 문화권에서의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수십 년을 자란 사람이 미국으로 건너와 성공하기 위해서는 현지인들보다 월등히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한다.
어느 나라이든 성공으로 가는 길은 절대 순탄하지 않다.
유진은 고국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더욱 많이 성공하기 원했지만, 그렇다고 자질도, 호승심도 모자란 사람이 유행에 휩쓸려 바다를 건너와 좌절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유진의 지원이 있다고 해도, 미국에 건너와 현지인들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고국에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는 이들에 국한될 것이다.
코로나로 1, 2년 정도 진출이 미뤄진다고 좌절 이야기가 나온다면 차라리 오지 않는 편이 낫다.
“맞는 말입니다. 한국인이 교육 수준이나 일에 대한 열정이 높다지만, 해외에서 성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고, 문화적 요인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엄청난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물론 교육 과정에서 이런 부분을 강조하고, 교육생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단순히 미국으로 가기만 하면 별천지가 펼쳐질 거라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꿈이 크면 좌절도 크기 마련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시련은 그런 꿈만 지닌 이들을 거르기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앞으로 한국 쪽 역시 상당한 인플레이션이 생길 거야.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지.”
물론 한국 측에도 코로나로 인해 금융과 현물 시장이 오히려 확충되는 것에 대해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에 비하면 적은 규모이지만, 한국 또한 적지 않은 보조금이 풀리고 세계 경제의 인플레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벌어들일 기회가 있는데 놓칠 이유는 없다.
“금융 교육에 대한 지원을 좀 더 늘리도록 하지. 미국 외에도 여타 국가로 나갈 사람들이 필요해.”
“여타 국가라면?”
“유럽의 경제 대국들과 중국, 싱가폴, 브라질 같은 지역의 경제 중심지들 말이야.”
유진은 코로나를 기회로 삼아 다시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미국을 넘어서서 전 세계에 자신의 숭배자를 퍼트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