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보조금 전쟁
2021년 1월 20일. 미국의 코로나 확진자가 3,000만 명을 돌파하고, 누적 사망자가 60만 명에 달한다는 보도가 나오던 그날, 바이든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마지막 방해 덕분에 미국은 유진이 알고 있던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아직도 코로나 방역에 대한 찬반 시위대가 여기저기서 갈등 상황을 만들고 있었고, 한편으로 미의회 역시 여태껏 코로나로 피해를 입은 국민을 위한 지원 대책을 두고 논란 중이다.
이미 3조 달러에 달하는 통화를 풀었음에도 도널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5조 달러 이상의 통 큰 지원책을 주장했다.
아무리 천조국이라 불리는 미국이라 해도 정도가 있어야 한다.
단계적인 지원을 통해 통화량을 늘려가야 했는데, 그렇게 큰돈을 한 번에 풀어놓는 것은 틀림없이 경제에 큰 문제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주장 덕분에 도널드 트럼프는 원래 자신이 얻어낼 수 있는 이상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원래부터 트럼프의 지지자였건 아니건, 수많은 미국 시민들은 5조 달러를 풀어 국민에게 거액의 보조금을 나누어 주겠다는 도널드 트럼프의 계획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 때문에 선거가 끝난 뒤 3개월 동안이나 이번 선거는 조작이며, 진정한 대통령은 트럼프라 주장하는 시위대가 워싱턴 곳곳을 누비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도널드가 남긴 문제가 너무 커서 문제요.”
취임식이 끝나고, 바이든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가장 먼저 초청한 외부인은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유진은 현 미국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다.
단순히 그가 지닌 재산이 역사상 가장 크다는 이유 외에도, 코로나의 광풍 속에서 유진이 보여 주었던 사회에 대한 헌신은 그 누구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유진 덕분에 삶이 붕괴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국민들은 내게 5조 달러의 부양책을 이어 가기를 바라고 있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힘겹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80대의 노인은 처음부터 엄청난 무게의 부채를 짊어져야 했다.
“물론 앞으로도 코로나 상황이 이렇게 이어진다면 전체적으로 5조 달러의 지원금이 들어갈 수도 있을 거요. 하지만 당장에 5조 달러를 내놓으라면 그건 불가능하지.”
“사실 5조 달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도널드가 5조 달러를 부르짖어 왔으니, 그보다 못한 수준의 보조금은 성에 차지 못할 것도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에 의해 재무부 부장관에 임명된 월리 아데예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유진이 거액의 자금을 후원해 조직한 싱크탱크인 SF재단(지속 가능한 미래 재단, Sustainable Future foundation)을 책임지고 몇 년 동안 훌륭하게 이끌어 온 월리 아데예모는 바이든의 제안을 받고 무척이나 망설였었다.
이제 겨우 마흔도 되지 않는 블랙 피플인 아데예모에게 미국의 재무를 총괄하는 자리는 굉장한 유혹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백수일 때 보람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유진을 떠나겠다는 말이 쉽사리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아데예모에게 먼저 말을 걸어 준 것 또한 유진이었다.
* * *
“월리는 훌륭한 인재입니다. SF재단에만 가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에요. 이제 잠시 머물던 둥지를 떠나 제대로 날개를 펼 시간이 왔군요. 동양의 철학자인 노자는 곤(鯤)이라는 물고기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요.”
“저도 대학에 다닐 때 들어 봤습니다. 바다에 갇혀 있던 물고기가 언젠가 변신을 해 거대한 새가 되어 세상 끝까지 날아간다는 이야기였죠? 뭐였죠? 피닉스? 그런 비슷한 신화였던 것 같은데…….”
“새의 이름은 붕(鵬)이라고 합니다. 뭐, 지금 내가 보기에는 월리라는 이름을 붙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하하. 저더러 작은 둥지를 벗어날 때가 왔다는 말씀을 하시는 거군요. 하지만 SF 재단은 결코 작은 둥지가 아닌데요. 어떤 의미에서 이 나라의 행정부 하나 정도는 당장이라도 꾸밀 정도 아닌가요?”
SF재단의 설립 목적은 다양한 견해를 지닌 석학들에게 각자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미래의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에 있다.
지난 4년 동안 재단은 그 어떤 대학이나 연구 기관 이상으로 많은 재원을 활용해 수많은 학자를 지원해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미국 정치계와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포섭해서, 그들에게 적당한 선물을 안겨 주는 것이다.
수많은 민주당, 공화당 고위 인사들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그리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 논문 몇 장을 내놓고 수십만, 혹은 수백만 달러를 받아 갔다.
지난 오바마 행정부 출신 인사 중 상당수가 재단의 지원을 받아 왔고, 이제는 백수가 되어 버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신의 인사들이 다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번 바이든 행정부가 구성될 때 백악관과 각 행정부처를 채우게 될 인사들의 상당수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재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당장 재무부의 제안을 받은 아데예모는 말할 것도 없고, 백악관 곳곳에서 활기 있게 돌아다니고 있는 인텔리의 30% 정도는 재단에서 한 번 이상의 지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당연히 지금까지 재단 운영의 총책임을 맡아 온 아데예모의 권위는 높을 수밖에 없다.
“물론 재단이 수많은 인재의 산실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난 언제까지고 월리가 후학들을 양성하고, 은퇴한 노인들의 뒤를 돌봐 주며 살아갈 사람은 아니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 저를 영입하실 때, 4년을 이야기하셨었죠? 이미 여기까지 내다보고 계셨던 건가요?”
아데예모는 빈말로라도 미남이라 할 수 있는 남자는 아니지만, 웃을 때 하얗게 빛나는 치아는 꽤 매력적이다.
“아마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도널드는 트러블메이커이지, 한 단체를 온전하게 운영할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음에 민주당에서 백악관을 되찾아오면, 반드시 날 기용하리라 생각했군요?”
그건 딱히 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유진의 지시로 지금까지 재단을 일궈 온 경험으로, 아데예모도 유진의 번뜩이는 통찰력에 대해 깊게 신뢰하고 있었다.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데예모가 심사숙고하며 입을 열었다.
“뭐든지요.”
“재단을 떠나 백악관에 들어가면, 더는 보스의 사람이 아닙니다.”
월리는 맺고 끊는 것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난 백악관에 스파이 같은 것은 필요 없습니다. 아! 백악관이 아니라 재무부였죠.”
재무부 쪽으로는 오히려 백악관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미국 재무부는 월 스트리트 출신 인사들에 의해 좌우되기 마련이고, 유진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발휘될 수 있는 곳이 바로 월 스트리트이다.
“혹시라도 내가 월리에게 무슨 부탁을 할 거라고 우려하고 있다면 서운하군요.”
“물론 그럴 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은 꼭 필요하니까요.”
물론 월리는 정말 유진이 어떤 요구를 해 온다면 자신이 과연 거절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유진에게 받은 수많은 지원 때문에도 그렇지만, 유진이 지닌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냐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사실 월리 그 자신이 아니더라도, 백악관이나 새로운 행정부에 유진의 사소한 부탁을 거절할 만큼 담대한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유진에게 지금 자신의 심정을 밝힌 것만으로 월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 낼 수 있었다.
적어도 재무부에 입성하기 전에 유진의 청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어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월리는 유진을 떠나, 미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재무를 담당하는 기관의 실세 부장관 자리에 설 수 있었다.
* * *
“그래도 5조 달러의 보조금 발행은 불가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업무 첫날부터 골치 아픈 상황에 놓여 있었다.
전임 대통령이 백악관에 싸 두고 간 거대한 똥 덩어리 탓에 미국 시민사회는 완전히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대통령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새로운 보조금에 대한 정책을 내어놓는 것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다.
“첫날부터 걱정이 크시군요.”
유진은 설혹 누군가가 저 자리를 자신에게 준다 해도 결코 맡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나라, 그것도 세계 최강대국의 지도자는 그 권한만큼이나 책임질 것이 넘쳤다.
“당신의 옛 친구 덕분이에요.”
바이든은 책망이라기보다는 하소연에 가까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두가 알고 있던 일이지요. 도널드는 언제나 남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좋아하니까요.”
도널드 트럼프는 생애에 몇 번이나 사업에 실패했고, 그때마다 파산의 처리를 동업자나 지역 사회에 떠넘기고 자신은 슬쩍 빠져나가는 짓을 반복해 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도널드는 유유히 자신의 책임을 벗어나 밖에서부터 비난의 수위를 높이고 있었다.
“때로 난 유진 당신이 미워질 때가 있소이다.”
“오. 아무리 생각해도 조에게 실례한 적은 없는데요?”
“외부에 있는 동안 난 종종 도널드가 지난번 선거에서 당선된 것이 유진 때문은 아닐까 생각하고는 했소.”
“하하. 그럴 리가요. 당시 난 그저 평범한 월가의 투자자에 불과했을 뿐인데요.”
“그랬죠. 하지만 그동안 지켜보니 당신과 친분을 유지한다는 것만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일들이 상당히 많더군요. 어쩌면 당신은 아주 큰 행운을 몰고 다니는 풍운아 같아요.”
“와우! 그건 제가 들어 본 가장 멋진 찬사로군요.”
“물론 나도 알아요. 어째서 도널드가 대통령이 되었던 건지. 시대의 부름이었지.”
바이든은 말끝에 대통령이라면 입에 올리기 곤란할 속어를 덧붙였다.
“미국인들이 세계화에 신물이 난 게 요 몇 년 사이의 일은 아니니 말이오.”
“그렇죠.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은 이미 21세기로 들어오며 무너지기 시작했죠.”
“맞아요. 우리 앞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놓여 있지요. 난 가끔 그게 무섭다오. 내가 이번 선거에 나서기로 한 것은 물론 내 좋은 친구인 유진 당신의 조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가오고 있는 미래가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오.”
세계화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미국만이 유달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유럽도 아시아도 지금까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이어 온 아름다운 거짓된 평화가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듯 내셔널리즘이 부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그런 내셔널리즘의 끝에는 거대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아주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겁니다, 조. 그리고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 끔찍한 미래 역시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만들어 낸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조의 세대가 그나마 마지막으로 어렴풋이나마 그 비참한 시절에 대해 언뜻언뜻 알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