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34화 (234/363)

234화 연해주

“오랜만에 뵙는군요.”

“어서 와요, 알렉세이. 코로나 덕분에 서로 고생이네요. 대륙을 횡단하느라 고생이었겠어요.”

“나름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보내 주신 새 비행기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유진은 러시아 대통령의 재산 관리인인 알렉세이 표도르프를 불러 만찬의 자리를 가졌다.

“그동안 유진이 보여 준 호의에 저희 상관께서 아주 흡족해하십니다.”

유진은 표도르프에게 주로 암호화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동안 적지 않은 이익을 공여해 왔다.

최근에는 암호화폐의 가격이 폭락하고 다시 상승을 시작한 뒤로 상승세가 심상치 않으니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다는 시그널을 주었다.

표도르프를 내세운 러시아 머니 세력은 처음에는 관망하다가 대략 비트코인 가격이 2만 달러 수준에 달하는 순간부터 뒤늦게 진입을 하고는 지금도 부지런히 어디에선가 끌어온 자금을 때려 박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 측에도 적지 않은 수의 암호화폐 거래소를 팔아넘겼으니 그들 역시 적지 않은 데이터를 축적해 두었을 터이지만, 워낙에 이성적인 판단이 통하지 않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단지 거래소의 데이터만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유진의 시그널이라면 그 어떤 데이터 분석이나 애널리스트의 예측보다 믿을 만한 것이기에, 마음 놓고 투자에 나선 듯했다.

덕분에 비트코인이 벌써 8만 달러가 넘어서기 시작한 지금은 마냥 즐거운 표정을 감추치 못하고 있었다.

“이번 상승장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듭니다. 솔직히 나도 어디까지 오를지 감도 잡기 어렵군요.”

유진은 솔직하게 말했다. 원래였다면 대략 6만에서 7만 사이를 오가다가 다시 화려한 추락을 시작할 것이지만, 이미 유진의 영향력이 암호화폐 시장에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다른 실물 경제와 달리 어떠한 외부 지표와도 상관없이 전적으로 투자자들의 심리에만 좌우되는 특성 때문에 암호화폐 시장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고, 또한 무의미한 일이다.

“모두들 이번에는 적어도 10만 달러는 갈 거라고 믿더군요. 우리 쪽은 잘하면 그 두 배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투자자들의 간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20만 달러를 이야기하다니, 조금은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나로서는 10만 달러 수준에서 정리하는 것을 권해 드리고 싶군요.”

“음. 알겠습니다. 유진의 충고라면 고려해 보도록 하지요.”

하지만 알렉세이 표도르프의 표정을 보면 그가 과연 순순히 충고를 따를지 의심스러웠다.

대체로 러시아 사람들은 배포가 크고 도박을 좋아해서, 꼼꼼하거나 치밀한 투자를 이어 가기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 마디로 대박 아니면 쪽박에 가까운 스타일이다.

“참! 그리고 이번에 만나자고 한 이유는 다름 아닌 한국 기업의 시베리아 진출 문제 때문입니다.”

“시베리아 진출이라면 역시 가스입니까?”

표도르프는 유진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며 물어 왔다.

사실 시베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지정학적인 위치와 지하자원이 아니라면 유진 같은 거물의 관심을 끌 만한 것은 전무하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극동 시베리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와 석유의 규모는 러시아 전체 생산량의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천연가스는 전체 생산량의 92%에 달할 정도이다.

그 석유와 천연가스가 러시아 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 역시 절대적이다.

러시아는 세계 제1의 산유국이고, 러시아 수출 품목에서 석유와 가스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70%에 달한다.

실질적으로 석유와 가스 가격이 러시아 국민들의 생계를 좌우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 보니 알렉세이 표도르프가 유진의 투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지금까지 유진은 아주 다양한 방면에 투자를 이어 왔고, 그중 실패로 남은 것은 거의 없다.

“한국의 몇몇 기업에 투자해 놓았는데, 그중 두어 곳에서 시베리아 관련으로 제법 야심 찬 기획을 하고 있더군요.”

“그렇습니까?”

“프리모르스키에 대형 농장을 세우려는 기업이 한 곳 있고, 마찬가지로 프리모르스키와 하바로프스크에서 유전을 개발하려는 곳이 있더군요. 사실 나로서는 그 두 기업의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기업의 CEO들의 열정이 상당하더군요. 농장이든 유전이든 가스든 개발에 성공하면 한국 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바로프스크라면 몰라도 프리모르스키라면…….”

표도르프가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한자로 음차해 연해주(沿海州)라고 불리는 프리모르스키는 러시아에 있어, 그리고 중국에 있어 무척 중요한 지역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분쟁은 대부분 이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도 될 정도다.

“농장은 모르겠지만 원유 시추까지 한다면…… 조금 걱정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중국과 북한이 가까우니 거기서 한국 기업이 석유를 퍼 올리면 북한 쪽의 반발이 나오지 않을까 싶군요.”

“그 정도야 알아서 처리해 주시면 고맙겠군요. 알다시피 난 정치, 특히 한국 내 정치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입장이라서 말이지요.”

“하하. 그렇군요.”

표도르프는 비로소 유진이 자신을 불러 부탁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쪽에서 농장을 만들거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시추하게 되면 결국 한국으로 보낼 것이고, 그때 북한과 관련되어 조금이라도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것에 대해 러시아에서 처리해 달라는 요구였다.

“혹시 미국의 정보기관에서 어떤 정보라도 얻어 낸 겁니까?”

표도르프는 이번에도 유진이 어떤 특별한 정보를 입수하고 투자에 나선 것은 아닌지 궁금해했다.

“아쉽게도 미국이나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석유 탐사 같은 부분에 관여하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하하! 하기는 그렇지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탐사는 몰라도 경영에는 아주 관심이 많지만요.”

러시아 출신이라고는 해도 뉴욕에서 살아온 지 10년이 넘고, 대부분 미국인을 상대로 하는 탓인지 표도르프는 자국의 정치 상황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유머의 소재로 사용하고는 한다.

러시아 경제에서 절대적 지분을 차지하는 가스프롬을 비롯한 상당수의 에너지 기업들이 대통령의 수하들, 특히 정보기관 출신 인사들로 채워진 것은 그리 비밀도 아니고, 숨길 이야기도 아니다.

“중국 측도 비슷한 모양이더군요.”

“그러니까요. 러시아나 중국이나 주요 에너지 기업들은 사실상 국영기업이나 다름없죠.”

러시아 가스프롬은 사기업이지만 국가에서 50% 이상의 지분을 쥐고 있고, 나머지 지분 중에서도 대통령의 손이 닿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알려져 있다.

중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의 유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페트로차이나도 사실상 중국 석유 천연가스 공사의 자회사이다.

그러니까 세계 에너지 업계는 미국과 영국 등을 위시로 한 몇 개의 사기업과 중국, 러시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기업 두 체제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무게 중심은 점점 후자로 기울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오일 전쟁의 시대가 끝났어도, 여전히 기름 시장은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놓여 강대국들의 세력 싸움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기업에 대한 투자가 너무 부실했던 것 같아서 말이지요. 특히 한국 정부와 관련된 기업들에 전혀 투자를 해 오지 않았었거든요. 이제 슬슬 한국에도 관여해 볼 생각입니다.”

“아! 그렇군요.”

표도르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한국의 정치에 관여하고 싶다는 뉘앙스를 보이자 이해가 간다는 표정이다.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며 한국 국적을 포기했지만, 그래도 뿌리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자신의 모국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요. 저도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모스크바를 꼭 다녀오고는 합니다.”

러시아인들의 마더 러시아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여하튼 정보기관에서 뭔가 정보를 얻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 투자하려는 회사의 대표가 꽤 실력 있는 사람이어서 말이지요. 로얄쉘에서 20여 년을 근무한 사람인데, 자기 촉으로는 시베리아 극동 지역에 엄청난 매장량이 남아 있는 게 틀림없다 하네요.”

“흠.”

표도르프는 ‘엄청난’이라는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물론 규모가 문제겠지요. 나로서도 시베리아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온다고 해서 그걸 독차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선 생산이 가능한지부터 알아보고, 수익성이 있다면 그때 가시 지분을 다시 결정하는 쪽으로 하지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표도르프가 놀란 듯 물어본다. 생산량이 많다면 지분을 양보하겠다는 소리이니 기분이 나쁠 수가 없다.

유진으로서야 그곳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원유를 사실상 독차지할 방법도 없고, 독차지해 보았자 독만 될 뿐이니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유진이 원하는 것은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원유의 존재가 밝혀지는 것이다.

물론 유진은 그곳에 얼마나 많은 원유가 감춰져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도.

무려 1,000억 베럴에 달하는 원유 매장량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에 위험한 야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양이었다.

“좋습니다. 한국 기업의 진출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표도르프는 자신이 러시아 대표라도 된 듯 큰소리를 쳤다. 물론 충분히 그럴 만한 입장이기에 하는 행동이다.

그간 유진 덕분에 얻은 수익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진이 이번에도 이익이 생긴다면 결코 혼자 독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혀 왔기 때문이다.

표도르프로서는 결코 거절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유진의 넘쳐나는 자금으로 새로운 유전을 탐색하고 적절한 비율로 지분을 나눈다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이다.

유진과의 거래는 늘 그랬었다. 적어도 세계 각국의 정상들은 언제나 유진과의 거래로 무언가 이득을 얻어 가면 얻어 갔지, 결코 손해를 보지는 않았다. 물론 이득을 얻는 것은 유진도 마찬가지이다.

“슬슬 부동산 시장에서 손을 떼야 할 것 같군요.”

며칠 뒤, 유진은 이번엔 중국 지도자의 재산 관리인을 불러 당면한 사태에 대해 논의했다.

“사실 지금 부동산 시장의 버블이 굉장하기는 하죠.”

장시웨이 또한 유진의 입장을 납득했다.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뇌관이에요.”

“그러니까 손을 떼는 것이 낫습니다.”

유진은 중국의 부동산에 적지 않은 투자를 해 왔다. 그리고 그 투자의 대부분은 장시웨이를 포함한 중국 지도부의 자본이나 명의가 포함되어 있다.

실질적으로는 중국 지도부 측에서 유진의 명성과 자본에 기대어 자국 부동산에 적지 않은 투자를 해 온 것이다.

부동산 시장이 버블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그걸 조절해야 하는 입장이면서도 지도부에서는 크게 한몫 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모순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느 사회, 어느 나라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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