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코리안 네트워크
바이든 행정부의 첫 한해는 무척이나 바빴다.
코로나로 인한 폐쇄를 빠르게 끝내기 위해 백신을 공급하고, 동맥 경화에 걸려 있는 미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각계각층에 돈을 푸는 일 등으로 워싱턴 정계 인사들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을이 지나가자 미국인들은 슬슬 길었던 폐쇄를 끝내고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 갔다. 유진도 길었던 LA 칩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주문해 놓았던 요트가 조선소에서 나왔기에, 기념 삼아 뉴욕에서부터 천천히 미국 동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며 각계 인사들을 초청해 조금씩 사교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워싱턴의 동쪽 해안에서는 다시 중요한 정치인들과의 만남을 이어 갔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는 바이든의 10조 달러짜리 미국 재건 프로젝트 통과에 도움을 주었던 몇몇 의원을 초청해 만찬회를 마련했다.
“그렇지 않아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초청을 해 주시니 당연히 찾아뵈어야죠.”
“솔직히 우리의 당선에 강 회장님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 회장님이야말로 한인. 아니, 미주 모든 아시아계 사람들의 영웅 아닙니까?”
“아시아계로 한정하면 곤란해요, 토마스.”
“그러게 말입니다. 미국의 영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하.”
다른 정치인들을 초청했을 때보다 더욱 열렬한 반응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만찬에 초대된 여섯 명 모두가 한국에 뿌리를 둔 재미 교포 의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 선거와 함께 거행된 하원 의원 선거에서 한국계 인사들은 하원에 모두 다섯 명이나 당선되었고, 그동안 재미 한국 교포들의 염원이던 상원 의원도 한 명이 나왔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재미 동포는 모두 250만 명에 이른다.
이중 시민권자는 150만 명, 그리고 영주권자나 일시적으로 거류 중인 사람은 100만 명 정도이다.
미국 선거법상 외국인의 연방 투표는 금지되어 있으니, 실질적으로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나 상하 양원 의원에 대한 투표권을 가진 것은 시민권자인 150만 명이다.
미국 시민권자의 약 0.4% 정도에 그치는 시민권자 중 하원 의원이 모두 다섯 명이나 나왔다는 사실은 그만큼 한인들의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 될 것이다.
실제로 다른 아시아계 이민자들과 달리 한국 출신 이민자들은 정치에 무척이나 열정적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사실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 제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곳은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한국인들의 문화적 DNA에 뿌리 깊게 내린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미국 내에서 한인들의 권리가 꽤나 신장되었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유진의 존재도 상당 부분 기여했을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유진이 미국 사회에 풀어 놓은 엄청난 액수의 자선 기금은, 미국 사회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제 미국인들 대다수가 그를 단순히 낯선 나라 출신의 부자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의 도움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말이다.
유진은 미국 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며, 지금까지 미국 국적을 가진 어떤 부자보다 큰 역할을 해 왔다는 사실을 정치적 스탠스와 상관없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유진이 한국 출신이라는 것은 이제 미국인이라면 얼추 알고 있는 주지의 사실이고, 덕분에 한국에 대한 관심 또한 제법 늘어났다.
이 자리에 모인 정치인들이 입을 모아 자신의 당선이 유진의 덕분이라 말하는 것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근래 미국인 사이에서는 그저 한국 출신이라 말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목을 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아시아인들조차 자신을 한국 혈통이라 우기는 사례가 점차 늘어가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과찬이십니다. 여러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드리고요. 코로나 때문에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기 모이신 여섯 분이야말로 미래에 미국 한민족의 귀감이 될 겁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쓰임이 될 사람들이다. 유진은 그들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천만의 말씀을요. 강 회장님이야말로 미주 한인들, 그리고 전 세계 한국인들의 미래이죠.”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인지, 모두 공통된 주제인 혈연에 대해 말을 꺼내기 바빴다.
“20년 전에는 딱 한 사람뿐이었죠. 겨우 20년 만에 이렇게 상황이 바뀌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죠. 앞으로가 중요해요.”
“다섯 명이 아니라 하원에서 수십 명, 그리고 상원에서도 몇 명쯤 나와 줘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유대인들은 겨우 3백만에 불과한데 하원에 수십 명씩 진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라고 못할 것 없지요.”
“그러니 강 회장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여기 미국 사람들은 강 회장 때문에 한국에 대해 알아 가고 있으니까요.”
누군가의 말처럼, 유진의 이름이 알려지며 세계적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요즘엔 한국의 아이돌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젊은 층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지난해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가 비영어권에서는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하며 미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크지요.”
“요즘에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도 난리가 났지요?”
“그러니까요. 요새는 너무 신이 나요. 어딜 가도 한국 얘기가 나오니까. 흐흐.”
인지도가 곧 생명과도 같은 정치인들에게 자신과 연관된 사회, 문화적 현상이 붐을 일으키는 것은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전부 강 회장님 덕이지요.”
“넷플릭스도 그렇고 현지 엔터테인먼트 회사들도 회장님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여느 자리에서라면 점잔을 빼고 있을 미국의 의원들이, 이 자리에서는 목을 쭉 빼고 유진을 바라보며 서로 뒤질새라 한마디씩 하고 있다.
“제가 투자하고 있는 기업이 워낙 많다 보니 어느 것이든 조금씩은 연관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특별하게 무언가를 한 것은 없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그동안 한국의 문화계가 쌓아 온 노력이 드디어 열매를 맺기 시작한 거지요.”
유진의 말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그가 한 일은 한국 출신 예술가들이 미국에 진출해 활동하는 데에 불편한 점이 없도록 약간의 편의를 보아준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팬데믹에 접어들고서는 미국에 입국하는 예술가들이 드물었으니, 방송이나 미디어 사이트에 약간의 압력을 넣어 한국 음악을 조금 더 많이 틀도록 한 정도였다.
유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각 아티스트들의 역량이 충분히 먹혀 들었다고 봐야 했다.
“역시 겸손하시군요.”
“워싱턴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강 회장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맞아요. 모두들 강 회장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들 합니다.”
워싱턴 정계 사람들과 뉴욕 월가의 투자자들은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이다. 누가 악어고 누가 악어새든, 서로가 서로의 생존에 있어 필수적이며 암묵적 공생을 이어 가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서로를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치인들은 월가의 투자자들을 이용해 먹으면서도 뒤에서는 욕하곤 했다.
하지만 유진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사적 로비도 해 본 적 없다. 오히려 워싱턴 정계와 관계 인사들에 대해 아낌없이 주머니를 풀어 왔다. 그가 직접적으로 했던 부탁이라고는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하는 미국 재건 계획에 도움을 달라는 정도였다.
물론 유진도 그 덕에 지금까지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수익을 올렸지만,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미국 시민이었다. 적어도 아직까지 유진은 세간으로부터 존경받을 기업가라 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여러분들께서 미국의 한인들을 위해, 그리고 미국 전체를 위해 큰 공헌을 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시작한 엄격한 방역도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다시 자영업자들도 영업을 시작하겠지요. 자유의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많은 한인들도 말입니다.”
“미국에 한국 식당이 늘어나겠군요.”
초청한 정치인들에게는 이미 한인 식당들의 사업에 도움이 되어 달라 부탁해 놓았다. 그동안 만 명에 달하는 한국 출신들을 모아 요식업에 진출할 준비를 끝내놓았다.
일상 회복이 시작되면 미국인들은 그동안 갇혀 있던 한을 풀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와 마음껏 소비를 시작할 것이다.
물론 2년 동안 적지 않은 자영업자들이 가게를 닫았고,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아마 일상으로 복귀한 뒤에도 적지 않은 식당들은 다시 문을 열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새롭게 한국 식당 열풍을 유도하기에는 지금이 아주 적기였다. 뉴욕에서 LA까지 미국 내 주요 도시 100여 곳과 중소 도시에까지 무수한 한국 식당들이 새롭게 개업해, 평범한 일상을 누리려는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줄 것이다.
미국에 불기 시작하는 한국 문화 열풍에 한국의 요리를 끼얹어, 미국인들이 한국을 더욱더 친숙하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를 위해서 당분간 몇억이나 몇십억 달러 수준의 적자를 보는 것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나라의 문화가 다른 문화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주 획기적인 기회, 강한 경제력,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유진에게 있어서나 한국 출신들 모두에게 있어서나, 놓쳐서는 안 될 절호의 기회인 것이 틀림없다.
“각 주에서 새로운 한인 식당들이 아무 문제 없이 영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민간인으로서는 여러모로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당연하지요. 제가 능력은 많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유진의 겸손한 도움 요청에 이 자리에 모인 정치인들 모두 열렬하게 호응했다. 모두들 유진이 그의 개인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한국 문화를 미국에 퍼트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미 유진은 세상 누구도 남부럽지 않을 부의 제국을 공고하게 쌓아 올린 것을 모를 수야 없다.
모두가 유진의 행동이 한민족으로서의 선의에서 나온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지금까지 우리 교포들은 솔직히 너무 뿔뿔이 흩어져 있었어요. 유대인이나 중국인들을 보면, 그들은 어딜 가서라도 자기들끼리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잖아요? 한국인들은 개개인은 머리가 좋은데, 힘을 합치는 게 부족해요. 지금이라도 힘을 모아 미국 내에서 끈끈한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한국 출신으로 태어난 것에 자부심을 품게 해야 합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공감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중국인이나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협력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만, 해외의 한국인들은 서로를 등치기 바쁘다는 말이 그저 농담에 지나지만은 않는다.
해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은 같은 민족끼리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공감대는 늘 있어 왔지만, 막상 구심점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오늘 우리에게는 강 회장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와인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 회장님께서 우리 한인들의 귀감이 되시고, 모두를 이끌어 주시는 한 이제 더 이상 한국 출신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들 약간씩은 술이 들어간 탓인지, 조금은 비분강개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단지 유진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심이야 어찌 되었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유진을 통해 한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에는 조금의 이견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