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어떤 맺음
“오늘은 피터가 온다고 했었나?”
“피터와 노무라 쪽 사람들이 함께 올 모양이야.”
유진이 요트에 머무르는 사이 다양한 인사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유진이 아니라 동생인 유성을 만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다.
유진의 명성에 비한다면 유성은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준이지만, 적어도 암호화폐 관련 인사들에게는 어떤 면에선 유진 이상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암호화폐의 준동기에 경쟁자들과 기술적인 면에서, 또 소비자 친화적인 면에서 현격히 차별되는 거래소를 만들어 독주 체제를 만들고, 암호화폐 거래소의 표준을 제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성은 암호화폐의 제왕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 뒤로는 다시 얼라이언스 코인으로 암호화폐 거래의 기준 화폐를 만들어 거래소나 투자자들 사이에 안정적인 자금 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거래소 연합체인 얼라이언스를 두 번의 활황기 동안 잘 이끌어 왔다.
2017년의 첫 번째 폭발적인 상승 이래로 암호화폐 거래 시장에서 유성의 리더십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인되었다.
또한, 2021년의 두 번째 폭발적인 상승세에 유성은 유례없는 결단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거래소들을 여러 주체에 넘겨 탈중앙화라는 암호화폐 본연의 모토에 충실한 행보를 이어 나가면서 투자자들과 개발자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향후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미래 가치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거래소를 분산시킨 것이 암호화폐의 미래를 위한 결단이라는 것에 대다수가 수긍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 소유의 암호거래소 상당수를 팔아치운 유성은 이제 넘쳐나는 시간을 즐기기로 하고, 유진의 요트에 올라타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확실히 요트가 좋기는 하네.”
유진보다도 유성이 이 새로운 호화 요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맘에 들면 너도 하나 사.”
유진은 동생이 자신처럼 소비하는 습관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유진은 여유 있는 사람은 그에 걸맞은 소비를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번이 유성에게 소비의 취미를 만들어 줄 기회인지도 모른다.
“얼마가 들었다고?”
“처음엔 20억이었는데, 건조하는 과정에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니 30억까지 올라가더구나.”
“휘유! 30억 달러? 그 돈이면 한국에서 어지간한 대기업 하나를 인수할 돈이잖아?”
“3조 원으로 무슨 대기업을 사? 그 열 배로도 모자란다.”
“아닌가? 난 그 정도면 되는 줄 알았지.”
“요즘 한국 기업들 주가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올랐는지 모르지?”
유진의 개입으로 한국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당연히 주가도 하루가 다르게 상승하고 있었고, 덕분에 유진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 가치도 그에 상응하게 올랐다.
그가 한국 경제에 5천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이후로 지금까지 투자한 돈보다 시장의 상승에 따른 수익이 훨씬 더 클 정도이다.
이래저래 한국 경제에 있어서나 유진에게 있어서나 상호 이득이 확실하다.
“그렇구나. 그래도 말도 안 되는 가격이네. 물론 크기는 하지만…….”
“30억 달러면 네 용돈으로도 살 수 있을 거다.”
“굳이 살 필요 있나? 어차피 형 혼자 쓰기에는 너무 크잖아?”
“그래도 네게 있으면 여자들 잔뜩 불러 방탕하게 놀 수 있지 않겠어?”
“행여나?”
그렇게 두 형제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손님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피터 틸이 원하는 게 뭐지?”
“얼마 전에 인수한 거래소에 대한 투자 문제인 거 같아. 굉장한 야심가잖아?”
“하기는 그렇지.”
피터 틸은 이미 90년대에 페이팔을 창업해 두각을 보였고, 그 뒤로는 다수의 벤처 기업에 투자하는가 하면 다시 팔란티어 테크놀로지를 창업해 빅데이터 분석 분야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는 대단한 기업가이다.
자유지상주의자이며, 국가의 통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피터는 암호화폐야말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로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암호화폐 시장을 장악한 유진과 유성 형제에게 접근해 이미 몇 년 전부터 다양한 사업을 펼치는 중이다.
하지만 피터에게는 아쉽게도 암호화폐 시장은 그의 예측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사업을 막 시작한 2018년에는 암호화폐 시장의 대침체를 겪어야만 했고, 덕분에 투자한 비용의 상당 부분을 날려야 했다.
피터 틸과 함께 페이팔을 창업하고, 그 뒤로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올려온 기업가들의 모임인 페이팔 마피아의 인사들 역시 이번에도 피터를 따라 암호화폐 시장에서 의욕적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올린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지성을 지닌 유능한 기업가들이었지만, 암호화폐 시장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사업 아이템과도 다른 종잡을 수 없는 분야였다.
그들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대안 화폐나 새로운 금융 상품으로 접근했다면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해도 될 것이다.
암호화폐는 사실 금융도, 화폐도 그리고 심지어 상품도 아니다. 오직 수많은 사람의 수익에 대한 욕망이 모여 구성된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피터 틸을 비롯한 페이팔 마피아의 인사들은 지금까지 적어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금을 날려 버렸다.
차라리 그 돈을 그대로 암호화폐 그 자체나 혹은 평범한 암호화폐 거래소에 투자했다면 적어도 열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강박적으로 남들을 앞서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인생은 늘 새로운 아이템으로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분야에 뛰어들어 놀라운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점철되어 왔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남들보다 빠르게 암호화폐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상품을 내놓아 시장을 창출해 내고, 새로운 분야를 손아귀에 넣으려 한 것이다.
암호화폐 기반의 대출, 신용 평가 같은 다양한 종류의 금융 상품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하지만 2018년 비트코인의 추락과 함께 그들의 멋진 계획 또한 바닥을 모르고 추락해야만 했다.
페이팔 마피아의 구성원들은 모두가 성공의 신화를 써 본 훌륭한 창업주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역경을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런 창업자의 기질이 그들의 실패를 더욱 진창으로 밀어 넣었던 모양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암호화폐의 활황과 함께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그들은 더욱더 많은 돈을 조달해 암호화폐 시장에 집어 넣었다.
그들은 그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진에게 손을 벌렸고, 유진은 그들이 창업한 기업들의 지분을 대가로 충분하게 빌려줘 왔다.
다행스럽게도 2021년이 되며 암호화폐 시장은 다시 활황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것은 피터 틸을 비롯한 페이팔 마피아의 선구자들은 여전히 암호화폐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각자가 겨우 수백만 달러 정도에서 많아도 1억 달러를 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은 늘 그래 왔듯 긍정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찾아온 암호화폐의 활황이 그들이 구상해 온 사업 아이템에도 단비를 내려 줄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다.
슬픈 일은 다시 제대로 사업을 벌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자금이 투자되었고, 지금까지의 형편없는 실적으로는 새로운 투자를 받아 내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추진하는 사업 때문에 월스트리트 쪽 투자를 받아 내려는 모양이야.”
“나쁘지 않지. 월스트리트에서도 이제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적극적이니까.”
“그렇지? 근데 우리 쪽 지분이 꽤 되니까, 다른 추가 투자가 있어도 크게 지분을 나누기 어려운 거지. 자신들의 지분을 떼어 주면 막상 사업이 궤도에 오른 다음에 누릴 과실이 부족하고.”
“흠.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가능성이 있을 거 같아?”
이제 암호화폐 시장에 대해서만큼은 유성이 훨씬 더 전문적이다. 새롭게 투자를 늘리던, 혹은 줄이던 유성이 판단할 문제라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페이팔 마피아로부터 받아 낼 수 있는 것은 충분히 받아 냈다.
암호화폐의 활성화 과정에서 유성은 페이팔 마피아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적지 않은 효과를 얻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의 새로운 사업에 투자하며 적지 않은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그들이 창업한 여러 기업은 장래성 면에서 지금 열중하고 있는 암호화폐를 이용한 새로운 아이템보다도 훨씬 더 뛰어나다.
사실 그들의 사업이 대개 그러했다. 프론티어로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시작하는 것은 대단하지만, 다른 이름난 창업가들처럼 자신의 기업을 지켜 내는 것에는 다들 취약했다.
피터 틸이 처음 창업한 페이팔은 이베이를 거쳐 독립한 뒤로 현재는 1,000억 달러가 넘는 대형 금융기업이 되어 있지만, 그들은 모두 겨우 15억 달러의 대가를 받는 것으로 끝났다.
그 뒤 피터 틸은 다시 초기 페이스북에 투자했지만, 역시 초기 투자자치고는 그렇게 엄청난 수익을 올리지는 못했다.
“솔직히 모르겠어. 완전히 탈중앙화된 거래소라니. 명분이야 그럴듯하지만, 기술적으로나 실질적인 가치로 보나 크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여전히 피터 틸은 암호화폐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들이 암호화폐에 투자하는 것은 탈중앙화니 공정한 거래니 하는 명분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그게 돈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이 탈중앙화한 화폐라든지, 혹은 블록체인 기술이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든지 하는 것엔 하등의 관심도 없다.
만일 가치의 상승이 보장된다면 비트코인이 중국이나 러시아의 중앙정부에서 통제하는 화폐라고 해도 조금의 거리낌 없이 투자에 나설 것이다.
“그렇다면 슬슬 물러서는 편이 낫겠구나?”
“그럴 거 같아.”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
“괜찮아. 이 정도는 혼자 처리할 수 있어. 형이 말한 것처럼 맺고 끊는 것은 확실하게 해야지.”
여유 시간에 잡담하고 있을 때와 달리, 일 이야기로 들어서며 유성은 금세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 수백억 달러가 걸린 일을 분석하고 차분하게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지금의 유성은 암호화폐의 제왕이라는 명성에 맞게 훌륭한 사업가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예정된 시간, 요트의 헬리패드에 두 대의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멋진 요트로군요. 위에서 내려다보니 무슨 항공모함인 줄 알았습니다.”
피터 틸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소형 항공모함에 버금갈 정도로 커다란 요트인 덕분에 헬리콥터 두 대가 한 번에 뜨고 내려앉아도 무관할 정도였다.
“환영합니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요트의 주인으로서 유진은 막 도착한 손님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가 오늘 다른 손님들이 있어, 함께하지는 못하겠군요.”
그리고 잠깐의 환대 후에는 바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피터 틸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피터에게 투자하기 위해 함께한 노무라 증권 측 인사들은 유진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울 정도로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여유 있게 미소짓고 있는 유성을 보고는 다시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들은 오늘 유성에게 제안할 아주 멋진 계획을 들고 온 모양이다.
하나 그들은 유성이 이미 결론을 내렸음을 알지 못했다.
유성은 더 이상 피터의 새로운 사업에 투자할 용의도, 그렇다고 지금까지 투자한 것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아 내지도 않고 노무라나 다른 월스트리트 자본에 헐값에 넘길 계획도 없다.
충분한 대가를 받고 지금까지의 지분을 넘겨줄 것이고, 아마도 피터 틸이나 다른 동료들이 보유하고 있는 각자의 기업들의 지분이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유진은 동생이 훌륭하게 그 일을 해낼 것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다.
아마도 그들이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요트를 떠날 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