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전쟁과 채권
“정말 하룻밤 사이의 일이네…….”
플라자 호텔 레지던스 거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던 유성이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암호화폐의 제왕이라 불리는 유성은 요즘 들어 부쩍 형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유진이 요트를 타고 미 동해안을 내려갔다 올라올 때도 함께 있다가, 뉴욕으로 돌아온 뒤에도 플라자 호텔에 자리를 틀어 버렸다.
백여 개에 달하는 암호화폐 거래소의 상당 부분을 분양한 뒤, 이제 겨우 몇 개의 거래소를 운영하고 있다 보니 업무의 부담이 확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남아 있는 거래소도 대개의 업무는 이제 직원들이 처리하고 있었다.
사실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한 번 궤도에 오른 뒤에는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러네. 하룻밤 사이에 30%가 떨어져 버린 건가?”
유진도 수십 개의 모니터 중, 유달리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는 몇 개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 주요 암호화폐의 가격과 등락 그래프가 표시되고 있었다.
여전히 암호화폐의 대장주인 비트코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순간부터 무섭게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겨우 몇 시간 만에 30%나 떨어져 버렸다.
비트코인이 그 정도이니 이더리움이나 다른 암호화폐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모니터에 표시되지는 않지만, 일부 암호화폐의 경우는 80%까지 떨어진 모양이다.
“형 말대로 처분해 버리길 다행이네.”
2018년의 폭락 이후 3년여에 걸쳐 차분하게 매수해 오던 암호화폐는 이미 지난해 말에 대부분 팔아 버렸다.
비트코인이 10만 달러를 막 넘어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걸 전부 매도하고 난 뒤도 잠시 암호화폐 가격은 상승세를 이어 갔다.
10만 달러라는 벽을 돌파했다는 상징 때문에 모두가 암호화폐의 미래에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반 투자자는 물론이고 월가의 투자은행들조차 당분간 암호화폐의 상승세는 굳건하게 유지될 거라는 망상에 빠져 너도나도 암호화폐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피터 틸을 비롯한 페이팔 마피아들의 활약이었다.
그들은 암호화폐 시장의 활황에 힘입어 다수의 기관 투자자들에게 거액의 투자를 유치해 다양한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다.
노무라 증권을 비롯한 몇몇 대형 투자은행이 유성이 보유하던 사업체의 지분을 거액에 인수해 갔고, 그 와중에 유성은 페이팔 마피아들이 지금까지 일구어 놓은 알짜배기 사업체들의 지분을 만족스러운 가격에 넘겨받을 수 있었다.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거래였다. 그들은 암호화폐 시장의 성장성이 자신들이 개척해 놓은 기업들의 가치에 비해 월등하다 여겼고, 유성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그 뒤로 몇 달 동안의 행복한 시절이 흘러 왔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비트코인 가격은 무려 12만 달러에 근접했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것도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소식과 함께, 암호화폐 시장은 갑작스러운 붕괴를 맞이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려오는 거 같네.”
다시 거대한 음봉이 생성되는 것을 보며 유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수천억 달러를 챙긴 형제에게 코인 가격의 폭락은 그저 남의 일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유성은 암호화폐 파생상품에 다시 거액을 집어넣은 뒤이다.
수십 개의 암호화폐 거래소에 열 배에서 다섯 배 사이의 레버리지로 숏 포지션에 걸어 놓았으니, 가격이 하락할수록 돈이 들어올 것이다. 그 외에도 투자은행 등을 통해 풋옵션까지 계약해 놓았다.
이번 폭락은 수많은 희생자를 나을 테지만,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다시 새로운 기회가 되기 마련이다.
“형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면 돈이 돈을 버는 게 너무 쉽구나.”
실시간으로 자산이 불어나는 것을 보면서 즐거운 한편으로 어이없어지는 것은, 그 무지막지한 액수 때문이다.
다섯 배의 레버리지로 숏 포지션에 투자했다면 30%의 시세 하락으로 투자한 돈의 150%의 수익이 생긴다.
더군다나 풋옵션은 적게는 몇 배에서, 크게는 수십 배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저 가능성의 조합에 베팅하는 것뿐이지.”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은 사실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정말로 전쟁이 일어날지 확신하지 못했고, 또 확신하는 이가 있어도 과연 언제 그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다.
유진으로서도 전쟁의 발발은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너무 큰 레버리지를 사용하지는 못했다.
하나 그 정도의 베팅도 하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언제든 자신의 예측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해.”
“맞아. 이번에도 가용 자산의 겨우 20%만 사용했으니까. 하락세가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유성은 과연 이번 폭락이 얼마나 큰 수익이 되어 돌아올지 궁금했다.
“당분간은 계속 이어질 거야. 정말 많은 사람이 피눈물을 흘리겠지.”
“아침이나 먹자. 이제 슬슬 배고프네. 이상하다. 하룻밤 사이에 천억 달러를 벌었는데 아무렇지도 않네. 너무 엄청나서 아직도 현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야.”
“계속해서 너무 큰 숫자를 접해서 그런 모양이야.”
“그런가?”
유성은 조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시아 국채 가격이 계속 내려가고 있어요. 예상대로예요.”
전쟁의 발발로 여기저기 비상이 걸렸다. 물론 유진의 직원들은 이미 전쟁의 발생을 상수로 보고 투자를 이어 왔기 때문에 큰 혼란은 없었다.
이미 상정해 둔 시나리오에 따라 투자를 집행하거나 정리하는 수순에 들어갈 뿐이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일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특히 유진이 중점을 둔 것은 채권과 통화 부분이었다.
2월 24일 러시아 탱크가 우크라이나에 진입한 지 불과 몇 시간 후 러시아 정부는 채권과 주식 시장을 닫아 버렸다.
러시아 정부 측에서도 전쟁이 증권과 채권 시장에 충격을 줄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계 금융 시장에서는 러시아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 타격을 입고, 궁극적으로는 디폴트에 이를 가능성을 크게 보며 보유하고 있던 채권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하루 만에 러시아 채권은 50%까지 떨어졌다.
액면가 1만 달러짜리 채권을 5,000달러에 내놓아도 사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슬슬 매입을 시작할까요?”
“아직은 더 기다려보도록 하지.”
“어느 정도까지 보시는 건가요?”
“떨어지는 속도가 가파른 걸 보면 당분간 하락이 계속될 거 같아.”
브레이크도 없이 떨어지는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하면 하락세가 멈출 가능성이 크다. 더 떨어질 것을 알면서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과연 유진의 말대로 러시아 국채는 연일 신저가를 갱신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투자등급이던 러시아 채권을 들고 있던 기관들은 비명을 지르며 채권을 던지기에 바빴다.
유진의 말대로 채권 가격은 달러당 50센트에서 40센트로, 그리고 다시 30센트를 넘어서면서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어이 10센트까지 내려왔네요.”
1달러당 10센트. 액면가의 10%에라도 팔겠다는 사람이 넘쳐났다. 이 가격에라도 팔 수만 있다면 휴짓조각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 때문이다.
유진의 채권 팀에서는 20센트 부근에서부터 매입을 시작해, 10센트 부근에서 시장에 나오는 물량을 제한 없이 거둬들이고 있었다.
“위험하지는 않을까요? 정말로 디폴트가 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의견이 많아요.”
유진의 공격적인 투자는 늘 그렇듯 주위의 우려를 사고는 한다. 러시아는 잘못된 전쟁에 발을 디뎠고, 미국과 유럽 각국 정부는 연일 러시아를 비난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걸린 전쟁이니까 상관없어. 얼마든지 매입해도 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은 오랜 경제난으로 지쳐 있던 러시아 국민들에게 과거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위엄을 떨치던 위대한 대 소비에트 연방의 추억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허황된 추억에 빠져 있는 러시아 국민들과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디폴트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원유와 가스 공급망이다.
연일 비난에 나서고 있는 유럽 정부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결의했지만, 러시아로부터 들어오는 가스를 막는 일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석유 금수 조치를 실행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는 있지만, 말뿐이다.
유럽 시민들의 전기와 난방을 책임지는 것은 러시아에서 들어오는 가스와 석유이고,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공급을 끊어 버린다면 유럽 시민들은 이해 겨울 꼼짝없이 추위에 떨어야만 한다.
러시아는 자원을 쥔 자가 확실히 갑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루블화의 추락 또한 거칠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쟁 당일 1달러당 78루블에서 보름 만에 150루블까지 올랐다. 러시아 돈의 가치가 절반으로 하락한 것이다.
유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루블화의 상승에 다시 공격적으로 베팅을 시작했다.
“채권이 그렇게 하락했는데, 사도 괜찮은 거야?”
공격적인 채권 매입을 지켜보던 유성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물론이지.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니까 최대한 이익을 봐야지.”
“그렇구나. 확실히 전쟁이 누군가에게는 큰돈이 되나 보다.”
“원래 금융계와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서구 국가들에서 국채를 발행하는 목적도 사실은 전쟁 때문이었어.”
“그래?”
이건 또 처음 접하는 지식인 듯, 유성이 호기심을 보였다.
“어.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비용이 필요하잖아. 그걸 위해서는 금융가에게 돈을 빌려와야 했지. 그리고 전쟁에 승리하면 패전국에게 받아 낸 대가로 채권을 갚는 거야.”
“패배하면?”
“채권이 쓰레기가 되는 거지.”
“완전히 도박이네.”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런 도박 속에서 수많은 희비가 갈리는 거야. 로스차일드 가문이 흥하게 된 것도 나폴레옹 전쟁에 사용될 영국 정부의 채권 덕분이었고, 그보다 이전에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금융이 발달한 계기도 도시국가 사이의 전쟁 덕분이었으니까. 남북전쟁에서 남부군이 패배한 원인도 사실 따지고 보면 국채를 제 때에 팔지 못했기 때문이야. 은행가들이야말로 전쟁의 승패를 지배한다 해도 틀리지 않을 거야.”
“은행가들이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게 이유가 있네.”
“그렇지.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전쟁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어. 사실 전쟁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는 것은 무기를 만드는 군수업자가 아니라 금융가들이지.”
지금도 야심에 찬 금융가들은 유진처럼 러시아 채권을 헐값에 매입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번에도 역시 정말 러시아가 디폴트라도 선언한다면 쓰레기를 돈 주고 사 버린 결과가 될 테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도박에 나서는 이들은 언제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