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카페 킹메이커
“혼란스러운 동네예요. 여기는 늘 바쁘군요. 서울도 꽤나 혼잡스럽지만, 이곳의 공기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맨해튼 5번가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던 김환이, 테이블 옆의 커다란 유리창 밖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여기는 늘 변함이 없어.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하지. 처음 왔을 때나, 지금이나 말이야.”
유진이 생각하고 있는 ‘처음’은 지금부터 아주 먼, 그러니까 그의 기준으로는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처음 뉴욕에 발을 디뎠을 적에 느꼈던, 그리고 이 거리에서 수십 년을 살아가면서 느껴 온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이 인식하는 시간상으로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30년쯤 뒤에도 유진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카페에 드나들던 단골손님이었다.
지금 이 카페의 인테리어가 유진이 기억하는 그때의 모습과 아주 비슷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유진에게는 과거인 먼 미래를 추억하는 장소이다.
“좋네요. 여기 카페도. 커피도. 이렇게 맛있는 커피는 아주 오랜만이에요.”
“바리스타가 훌륭한 덕분이지. 지난해 챔피언십 우승자이니까 실력은 확실해.”
“부자들은 좋네요. 바리스타 챔피언을 개인 바리스타로 고용하고 말이에요.”
“개인 바리스타는 아니야. 이 카페도 나름 잘나간다고.”
“그래도 보스가 오는 날이면 손님을 받지 않잖아요. 이 유리도 방탄이죠? 부자니까 가능한 일 아니에요? 단순히 한 달에 한두 번 들르기 위해 뉴욕 5번가에서 제일 비싼 부동산에 카페 하나를 운영하는 거 말이에요.”
“나도 가끔은 일상의 향기가 그리울 때가 있으니까. 그렇다고 경호원 30명을 데리고 평범한 커피숍에 가는 것도 민폐 아니겠어?”
아직은 목숨에 위협을 받는 일 따위는 없었다. 그래도 안전이 제일이라는 생각에, 유진의 경호팀은 규모를 점점 키워 갔다. 덕분에 이제는 시크릿 서비스에서 근무하던 정예 요원으로 300여 명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유진의 근접 경호뿐 아니라, 그의 집, 사무실, 자동차, 요트, 비행기까지 전부 항시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유리 정말 괜찮은 건가요? 설마 길거리에서 총탄보다 화력이 강한 무기를 사용할 리야 없지만.”
“로켓에 직격당해도 두 발 정도는 버틴다더군. 그 정도면 몸을 숨길 시간은 충분히 벌어 줄 거라 하네. 저 뒤쪽으로는 비밀 승강기도 있는 모양이야.”
“하하. 길거리 카페에 그런 무시무시한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니 무슨 첩보 영화 같네요.”
“그렇지? 나름대로 로망이 느껴지지 않아?”
바리스타가 새로 내려 준 커피잔을 들어 향을 음미하며 유진이 웃었다.
“여기 말고도 몇 군데, 그렇게 보안 시설이 잘된 매장이 있어. 덕분에 나도 가끔은 거리로 내려와 평범한 뉴요커처럼 시간을 보낼 수 있지.”
평범하다고는 하지만, 이 카페에는 지금도 30명에 달하는 경호원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다.
“그런 유희를 위해 쓰는 금액치고는 조금 어이없을 정도로 많기는 하지. 지난해에만 3억 달러 정도 쓴 모양이야. 일주일에 한두 번 하는 산책을 위해서 말이지.”
경호 비용, 그리고 맨해튼 5번가에 몇 개의 매장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그 정도이니 남들이 보기에는 과소비라 해도 크게 할 말은 없다.
“뭐, 억만장자들은 다들 그 정도는 쓰지 않나요?”
“그렇지? 돈이라는 게 결국은 쓰기 위해 버는 거니까 말이야.”
“저커버그가 한 해에 3,000만 달러 정도를 경호 비용으로 지출한다고 하던데. 보스의 재산이 그 열 배는 훌쩍 넘는 것을 생각하면 3억도 별거 아니잖아요.”
“그러려나?”
“생각해 보면 너무 부자가 되는 것도 골치가 아프네요. 전 대충 지금 수준에서 만족하며 살아야겠어요.”
“너라고 다를 거 있어?”
유진의 대리자라는 역할 덕분에 김환은 지금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여느 재벌 그룹 회장에 못지않게 경호원이며 비서진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내년부터는 그저 경제적인 영향력뿐 아니라 더욱 많은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쪽은 뭐라고 하던가?”
잠시 그렇게 잡담을 하다가 본론으로 넘어갔다.
김환을 뉴욕까지 부른 것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만한 일이 주제라면 역시 직접 대면해 이야기를 나누어 볼 필요가 있다.
“장 의원을 밀어주겠다고 합니다.”
김환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반발은 없고?”
“없을 리가 있나요. 원래라면 자기 계파의 오 의원에게 후임을 맡길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래도 어쩔 수 있겠어요? 보스가 안 된다면 그만이지.”
“고생 많았어.”
“고생은요. 어차피 빌미로 잡아 놓은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 참 억울해하더군요. 5년 동안 잘 이끌어 왔다 생각했는데, 막판에 이런 게 터져서요. 하하.”
시베리아 유전에 관련된 일들을 마음대로 언론에 터트린 것은, 단순히 석유 공사 사장의 정치적 욕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권 측에서도 대통령의 마지막 업적을 선전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한국 경제는 아주 눈부신 성장을 해 왔다. 물론 유진이 거액을 투자한 덕분이지만, 대통령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연해주에서 엄청난 석유 개발권을 따냈다는 사실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욕심이 과했던 거지.”
“그러니까요. 어부지리로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지내와 놓고, 이제 와서 엉뚱한 욕심을 부리면 곤란하지요.”
정권 말기의 지지도에 있어서는 역대 대통령 중 수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마지막 실수로 유진에게 책을 잡혀 버린 탓에 청와대에서는 지금 한창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알려 온다.
“그래도 선물은 받겠다고 하지?”
“물론이지요. 그동안 해먹은 게 없으니, 말년을 위해서라도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미국에서처럼 한국에서도 은퇴한 정치인이나 행정부 고위직, 법관, 그리고 검사까지 골고루 챙겨 주고 있다. 이제 SS파트너스에서 출자하고 있는 기업의 수가 수백이 넘어가니, 비상근 이사나 감사 자리는 넘쳐난다.
물론 대통령 정도면 그보다 훨씬 더 좋은 자리를 주어야 한다.
현 대통령에게는 재단을 만들어 줄 생각이다.
“오 의원은 어떻게 나오고?”
“무척 자존심이 상한 모양입니다. 경선은 끝까지 달려 보겠다고 하지요. 그럴 만도 하지 않습니까? 경선 승리가 대선 승리로 직결되는 선거인데.”
한국의 정치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지난 5년 동안 경제가 잘 돌아가다 보니, 사람들은 크게 정권 교체에 대한 욕구가 없는 모양이다.
물론 양당의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각각 25%에서 30% 정도씩 존재하며, 나름 이런저런 알력이 있는 모양이지만, 정치에 큰 관심이 없는 무당층의 표심은 결정이 난 셈이다.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충분하고?”
“반반쯤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은 조직력이 중요한데, 대통령의 복심이 넘어갔으니 여당 인사들은 장 의원을 밀어줄 테니까요. 생각보다 쉽게 결판이 날 겁니다.”
“다행이로군.”
“그런데 여당 측에서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더군요. 정치색이 너무 약한 것도 있지만, 나이가 제일 문제가 되고 있어요. 내후년이면 80이에요. 역대 최고령 아닙니까? 솔직히 제가 봐도 언제 숨이 넘어가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요.”
김환 자신도 조금 의문인 모양이다.
“이제 80은 더 이상 노인이라 부르기 어렵지 않아? 미국을 봐도 그렇고 말이야.”
물론 유진은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자신이 다음 대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장 의원이 앞으로 2년 뒤면 건강 악화로 쓰러질 거라 그를 선택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게요. 그런 것까지 미국을 따라가는 셈이네요. 하하.”
김환도 유진이 속 시원한 설명을 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상관은 없다. 그는 유진의 파트너가 아니라 대행인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윤 의원과 몇 번 자리를 마련해 보았습니다. 젊은 사람이 꽤 유연하더군요. 하지만 언뜻언뜻 날카로운 면도 엿보이고요.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그렇게 정치적 감각을 갖추기도 쉽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지?”
“역시 우리 세대한테는 합리적인 파트너가 대화하기 좋지 않습니까?”
“맞아. 그런 사람인 것 같더라고.”
유진은 윤 의원이 올해 사십이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대통령 선거에 나설 수 있는 나이만 되었어도 그를 밀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개헌을 통해 2선까지 가능하게 된 뒤에 당선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굳이 나이 많은 장 의원을 선택한 것은, 어차피 장 의원은 더 이상의 욕심을 낼 수 없기에 개헌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난 세기에는 독재 정권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5년 단임제를 채택했었지만, 이제 슬슬 4년이나 5년짜리 연임제에 대해 논의해 볼 때도 되었다. 아무리 유능해도 겨우 5년이 한계라는 것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 봐.”
“그렇다면 역시 다음번에는 윤 의원의 차례인 건가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지.”
“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능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잖아요?”
흠이 전혀 없지는 않다. 윤 의원은 젊고 매력적인 남자이다. 당연히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은 편이고. 매력 있는 여자가 접근하는 것을 굳이 물리칠 만큼 도덕적이기만 한 남자도 아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진 자신이 아무런 흠도 없는 사람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대양그룹 회장이 남겨 놓은 비밀 노트에 적힌 정보, 그리고 존 브래넌이 거액의 자금을 풀어 만들어 놓은 휴민트들을 통해 모이고 있는 정보 중에는 필요한 경우 유진이 활용할 만한 내용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 매력 있는 윤 의원에 대한 아주 멋진 정보도 있다.
현직 국회의원이고, 언젠가 대통령이 될 야심 이 있는 사내가 벌거벗은 채 유명한 연예인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몇 개의 영상. 그 영상들이 공개되었을 때의 파급력은 정말 무시무시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렇게 길거리 카페에 앉아 다음번 대통령을 정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꼭 무슨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는 조직이라도 된 기분이 드네요. 하하.”
“그러게 말이다.”
공교롭게도 유진과 김환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 카페의 이름은 킹메이커였다.
유진이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미래에 그가 드나들던 바로 그 카페의 이름을 빌려 온 것일 뿐이다.
문득 유진은 그 카페의 여주인이 어떤 의미에서는 꽤나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물론 그때 그 타임라인에서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