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위대한 희생
[극동 시베리아 경찰 당국은 오늘 무장한 중국인 게릴라들이 연해주 곳곳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특수 훈련을 받은 중국군이 노동자를 가장하여 러시아에 침투해 사보타주를 벌이고 있다며 비난의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반면 중국 정부는 러시아가 중국인 노동자를 살해하고 적반하장으로 범죄자로 몰고 있다며, 이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밝혔습니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갈등은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러시아도 중국도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가운데, 전 세계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러시아 채권은 모두 매도했습니다. 루블화의 경우 숏 포지션으로 바꾼 뒤로 벌써 10% 이상 하락하는 중입니다.”
요안나가 운용하는 회사를 비롯한 각국에 설립된 투자회사에서 부지런히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이제 이 시점에서 일어나는 투자 수익은 유진이 알고 있는 미래의 지식에 기인한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유진의 개입으로 너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까지는 유진이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중러 갈등은 없던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동안 구축해 온 정보 수집 기구와 유진이 각국의 지도층과 맺고 있는 개인적인 커넥션이 훨씬 큰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실제 투자에서도 유진 자신의 지시는 점점 줄어들고, 투자에 나서는 각 팀장의 권한과 인공지능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특히 희대의 천재인 피터 헤이웍스가 개발한 블랙볼트는 점점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원래였다면 앞으로 몇 년이나 뒤에야 간신히 상용화되었을 금융투자 AI 블랙볼트는 막대한 투자와 그동안 쌓아 온 방대한 양의 데이터,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에 버금갈 정도의 앞선 정보력에 힘입어 하루가 다르게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중이다.
“블랙볼트가 관리하는 자금이 드디어 1조 달러를 넘어서고 있어요.”
다른 금융기관 전체에서 로봇을 통해 운용하는 자산이 작년 기준으로 1조 달러를 조금 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겨우 한 투자사에서 아직 개발 단계인 AI 시스템에 맡긴 자금으로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금액이다.
그만큼 요안나나 다른 경영진들이 AI 블랙볼트를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블랙볼트의 투자 성적은 전체 매니저 성적의 상위 5% 이내에 들고 있습니다. 덕분에 매니저들이 아주 곤란해 하고 있어요.”
유진으로서도 놀라울 만한 성적이었다.
아직 그 정도의 성능을 내는 AI는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투자 AI는 어디까지나 투자자의 판단에 도움을 주고 수많은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수준이 전부다.
“아마 2년 정도 뒤에는 인건비가 훨씬 줄어들 거 같아요.”
비용이 줄어든다는 보고를 하면서도 요안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못하다.
“그때쯤이면 우리가 올리는 수익이 월스트리트 투자금융 전체의 30% 이상이 될 거에요. 지금까지는 우리가 월스트리트로 몰려드는 수많은 인재를 빨아들여 왔는데, 그때부터는 똑똑한 인재들이 남아돌겠죠.”
남이 들었다면 기겁을 했을 말이 요안나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남들보다 영리한 사람은 동쪽의 월스트리트로 오거나, 서쪽의 실리콘밸리로 가는 것이 당연한 코스였다.
하지만 이제 AI가 그러한 엘리트들을 대신하게 되면, 그만큼 뛰어난 인재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는 어이없는 일이 생겨난다는 의미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유진의 투자사가 올리는 수익의 규모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세상이 변해가는 만큼 모두들 적응하는 수밖에.”
지금부터 다시 수십 년이 지난 뒤의 일들도 기억하고 있는 유성으로서야, 지금까지의 변화는 그저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겨우 일자리 몇천 개가 없어지는 정도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리라.
심지어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러시아와 중국의 전쟁도 유진이 기억하는 그 많은 일에 비한다면 그저 거쳐 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 * *
“언제까지 도망쳐야 하는 거지?”
광활한 시베리아의 벌판에서 왕샤오쥔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쉴 시간 없어. 어뤄쓰(러시아) 경찰들이 잔뜩 깔려 있으니 빨리 움직여야 해.”
함께 농장을 탈출해 나온 창위엔둥이 재촉했다.
“하아…… 알았어. 움직일게. 움직인다고.”
왕샤오쥔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농장에서 도망을 나온 것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몇 대 맞더라도 그냥 버틸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적어도 이 추위에 몇 끼씩이나 굶으며 벌판을 헤맬 일은 없었을 테니까.
생각해 보면 이 탈출극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날 평소와 같이 식사 시간에 러시아 감독이 괜히 시비를 걸어 왔고, 참다못한 몇몇이 대들었을 때 왕샤오쥔은 그 다툼의 중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툼이 커지면서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고, 왕샤오쥔은 두려움 속에 누군가의 떠밀림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농장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농장에 근무하던 수백여 명의 노동자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고, 왕샤오쥔은 그중 몇몇 사람들과 함께 남쪽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이미 농장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들판에 서 있었다.
한데 어쩐 일인지 그와 함께하게 된 셋은 크게 걱정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달리 목적지라도 있는지, 어디에선가 구해 온 지도를 펼쳐 놓고 이동할 방향까지 정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들지?”
다른 셋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쑨홍카이가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 왕샤오쥔의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힘들지. 하아, 차라리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렇게 벌판을 헤매다 얼어 죽기라도 하면 그게 무슨 꼴이야?”
“어뤄쓰 놈들 하는 짓 못 봤어? 농장으로 돌아가면 그냥 둘 거 같아? 총으로 아무런 반항도 못 하는 동지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고도 그래? 가면 죽는다고.”
“그…… 어뤄쓰 반장이 쏜 거 맞아? 난 총소리만 들어서…….”
“놈들이 쏜 게 아니면 누가 쐈겠어?”
“하긴…….”
“근데 왕샤오쥔은 어디서 왔어?”
“이춘.”
왕샤오쥔은 힘없이 고향을 이야기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동북쪽 끝에 있는 이춘 시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서른이 될 때까지 탄광에서 석탄 가루를 먹어 가며 일하던 그는 얼마 전 연해주의 농장 건설 사업에 지원해 러시아로 넘어 왔다.
탄광에서의 일에 비하면 그리 힘들지 않았고, 급여도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시간을 보냈다.
러시아에서 몇 년 정도만 벌어 돌아가면 그래도 시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고 결혼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으로 열심히 살아오던 그였다.
중국에서도 오지인 이춘 시에서는 그다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지만, 여기서라면 한몫 벌어 갈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농장 건설이 중단되고, 러시아인 반장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폭력까지 쓰지 않았다면 말이다.
“조금만 힘내. 호수 옆쪽으로 국경을 넘어갈 수 있을 거야. 거기까지만 가 보자고.”
“지금 이 길이 맞는 거지?”
“그럼. 걱정하지 말라고.”
쑨홍카이의 격려 덕분인지, 왕샤오쥔은 더이상 투덜거리지 않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지도를 보며 앞서가던 창위엔둥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대기하지.”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 한 번도 말을 나눠 본 적 없던 창위엔둥은 어딘지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그러나 농장을 탈출한 뒤로는 누구보다 힘차게 움직이며 일행을 이끄는 무척 믿음직스러운 사내였다.
“여기가 어디쯤이야? 찻길에서 너무 가깝지 않아?”
몇 번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을 했던 왕샤오쥔도 러시아 경찰들에 잡혀 끌려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다지 차도 다니지 않으니 상관없어.”
언제나처럼 창위엔둥은 간결하게 왕샤오쥔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그가 무슨 말을 하건 먹히지 않을 것을 알기에 왕샤오쥔은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밝은 빛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란 왕샤오쥔이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쑨홍카이가 그의 입을 막고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일행은 수풀에 숨은 채 조용히 헤드라이트가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뒤 군청색 SUV가 달려오더니 일행이 숨어 있는 수풀 옆에 멈춰 선다. 순간 왕샤오쥔은 들킨 것인가 싶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쑨 동지?”
차에서 내린 한 남자가 수풀을 향해 소리를 친다. 예상 외로 중국어였기에, 왕샤오쥔은 의아한 생각보다 안도감을 느꼈다.
“옌 동지?”
“여기가 맞았군요. 나오시오들.”
잠시 인사가 오가고 나자, 왕샤오쥔을 제외한 나머지 셋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들이 많았습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다시 차 뒷문을 열고 커다란 가방을 하나 꺼냈다.
그러자 쑨홍카이가 가방을 받고는 바로 지퍼를 열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제야 화색이 돌기 시작한 왕샤오쥔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어떻게 이 자리에서 정확하게 만났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차를 타고 움직일 수 있다는 기쁨에 얼굴이 환해졌다.
“왕샤오쥔.”
쑨홍카이가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응? 무슨…….”
왕샤오쥔이 고개를 돌려 쑨홍카이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거무튀튀한 소총을 보고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조국은 당신의 위대한 희생을 영원히 기억할 거요.”
왕샤오쥔은 쑨홍카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해할 시간조차 없었다.
탕! 총탄이 정확하게 왕샤오쥔의 가슴을 뚫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고생이 많소.”
차를 몰고 온 사내도, 다른 세 명의 남자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왕샤오쥔의 모습에 그다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 무운을 빌겠소.”
차를 타고 온 사내는 다시 가방 하나를 꺼내 건네주고는 차를 타고 떠나 버렸다.
“빨리빨리 움직이게. 시간이 없어.”
쑨홍카이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무장을 나누어 주었다.
세 사람은 모두 조용히 각자의 무장을 챙기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왕샤오쥔의 모습을 무시한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장의 말대로 시간이 없었다. 무장을 받고 다섯 시간 안에 20km 떨어진 목적지에 도착해야 했다.
물론 무고한 인민의 희생은 안타까웠지만, 그들이 받은 명령은 반드시 완수해야만 했다.
연해주의 농장에서 탈주한 6,000여 명의 노동자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시베리아의 벌판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적어도 천여 명에 달하는 중국인 노동자들이 동료라고 믿어 왔던 사람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완전무장한 수천 명의 병사가 연해주 곳곳에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