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전쟁상인
“패닉입니다. 월스트리트는 물론이고, 전 세계 금융가가 초토화 상태에요.”
투자은행과 헤지펀드, 자산운용사, 사모펀드 등 수많은 투자기관이 몰려 있어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불리는 뉴욕 맨해튼 5번가는 지금 중국의 시베리아 침공으로 혼비백산에 이르러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2위와 3위의 전쟁은 실질적으로 세계 대전에 가깝게 여겨지는 일이었다.
마치 2차 세계 대전 초기 미국을 제외한 온 유럽이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 것처럼, 지금도 미국만 아직 참전하지 않았을 뿐 실질적으로 3차 세계 대전의 초반부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중국이 러시아를 침공하기까지 적지 않은 전조들이 있었기에 전쟁을 예측한 사람들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세상 많은 일이 그러하듯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눈앞에 빤히 보이는 사실을 외면하기 마련이다.
이해 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들어갈 때도 그랬듯, 이번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시장의 대다수가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수많은 징조를 무시하는 심리는 어쩌면 인간의 공통적인 심리 현상일지도 모른다.
지난 몇 달 동안 이어져 온 긴장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기에 시베리아 침공 이전까지 위태위태하게나마 유지되어 오던 상태는, 그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무서울 만큼 급속하게 허물어져 버렸다.
“위기라는 말로도 모자랄 정도에요. 하룻밤 사이에 20%가 떨어졌어요. 블랙먼데이 이후 최악의 사태예요.”
지난 1987년 10월 19일 발생한 초유의 주가 폭락 사태에 버금가는 폭탄이 주식시장에 떨어졌다.
딜러들은 비명을 질렀고, 뉴스에서는 온종일 이날의 주가 하락에 관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어요.”
“아무도 이번 사태가 단순히 주식시장의 폭락으로 끝나리라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이겠지.”
“맞아요. 모두 이 전쟁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두려워하고 있어요.”
미국 시민들에게 있어 이날의 폭락은 명백하게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보다도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두 강대국 사이의 전쟁은 대다수 미국인에게는 남의 일에 불과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두 나라 모두 미국의 우방도 아니고 과거의, 혹은 잠재적인 적대 국가일 따름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 여파로 자신의 자산이 휴짓조각이 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다.
“어쩌면 대공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에요.”
“당연하겠지. 정말로 세계대전이 벌어지면 대공황 수준이 아닐 테니까.”
“경제학자나 외교 전문가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쟁이 무섭기는 하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이 전쟁의 당사자가 될 일은 없다는 정도겠죠.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미국의 국익에 플러스가 될 거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어요.”
“중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면 더 이상 미국과 라이벌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겠지.”
“맞아요. 중국의 성장 기세가 꺾이면 미국의 압도적인 우세가 아주 오랫동안 이어질 거라는 기대죠.”
사실 백악관에서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어느 정도 방치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계속되는 중국의 경제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도 정신없이 바빠요.”
요안나는 슬쩍 미소를 짓다가, 전쟁에 기뻐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굳혔다.
하나 그녀가 아니더라도 월스트리트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이 전쟁에 아주 큰 돈을 걸었다면 누구든 그녀와 비슷한 표정을 짓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20%의 주가가 떨어졌다. 그 말은 곧 주가 하락에 베팅한 사람이라면 20%의 수익을 올렸다는 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베팅에는 늘 레버리지가 사용되기 마련이다.
두 배의 레버리지라면 40%의 수익, 그리고 좀 과감하게 5배의 레버리지를 사용했다면 하룻밤 사이에 자산이 두 배로 늘어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요안나의 팀을 비롯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진의 투자사들은 이번 전쟁에 대해 각자 재량껏 레버리지를 사용해 무지막지한 베팅을 해 놓았다.
더군다나 그들은 대부분이 이미 몇 년 동안 뉴욕에서 아주 높은 수익을 올려온 베테랑 투자자들이다.
이번에도 유진에게 조만간 벌어질 사태에 대한 언급을 받았으니, 모두들 욕심껏 다양한 상품에 잔뜩 베팅해 두었다.
그러니까 요안나의 팀뿐 아니라 모두가 지금 정신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시시각각 불어나는 자산에 환호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비정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금융투자자들은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양분 삼아 배를 불리는 법이다.
전쟁이 시작되고 일주일 동안 유진은 전 세계의 투자사들로부터 들어오는 수익 보고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고 있었음에도 유진 자신조차도 깜짝 놀랄 만한 엄청난 속도로 자산이 불어나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적어도 10개 국가에서 올해 가장 많은 세금을 내는 법인이 되겠어요.”
대개의 국가가 금융 투자, 특히 파생 상품에 대해서는 아주 칼같이 세금을 거두어 간다.
주식 투자라면 현금화할 때까지 조세가 이루어지지 않지만, 파생 상품의 경우라면 바로바로 수익이 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라면 10%의 양도세가 부과된다. 주식 양도세인 22%에 비하면 적다지만, 주식과 달리 파생상품은 대부분 제로섬게임에 가깝기에 사실 도박장에서 떼어 가는 자릿세와 비슷한 개념이다.
거기에 법인세가 또 나가게 된다. 세계 각국에 있는 유진의 투자사들은 이번에도 각기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될 터이니, 그만큼 많은 세금을 내야 할 것이다.
“일주일 동안 미국 시장은 26%, 영국은 42%, 독일은 38%, 홍콩은 무려 57%,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나마 선방해서 34% 하락했어요.”
미국 시장의 하락은 다른 시장에는 훨씬 더 커다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특히 전쟁 당사자인 중국과 홍콩 증시의 하락은 그야말로 처참할 정도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지금까지 전 세계 증시에서 대략 35조 달러가 증발되어 버렸다고 하네요. 2년 전 코로나로 증시가 폭락했을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커요.”
당시에는 대략 25조 달러 정도가 사라져 버렸지만, 각국의 통화팽창 정책에 힘입어 2년 동안 하락분 이상을 회복했었다.
문제는 이번 사태의 경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투자 심리가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고, 주가를 비롯한 각종 지표는 바닥이 어디인지 모른 채 지속적인 하락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올해는 참 많은 일이 벌어지네요.”
“그렇지. 코로나의 영향이 드디어 끝이 나는가 싶더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고, 이제는 중러 전쟁이니 말이야.”
“최근 한 달 사이의 이익이 지난 상반기의 이익을 추월하고 있어요. 무서운 속도로 세계의 부를 빨아들이고 있어요.”
그 말을 할 때 요안나의 얼굴에는 약간의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부가 한쪽으로 너무 쏠리는 것도 절대 좋기만 한 일은 아니니까.
역사적으로도 단일 단체나 개인이 너무 커다란 부를 독점하면 항상 반발이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FO 펀드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요안나의 투자팀이 관리하는 아주 특별한 펀드가 하나 있다. 바로 세계 각국의 최고 권력자들을 위한 펀드였다.
미국의 전, 현직 대통령 일가와 몇몇 거물 정치인들, 그리고 언론계 유력자들. 영국과 네덜란드 국왕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왕가 사람들. 그리고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왕가를 비롯한 제삼세계 통치자들만이 이 특별한 펀드에 자신의 자산을 맡길 특혜를 받는다.
당연히 요안나 팀의 수익은 이 특별한 펀드의 수익에도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 버블이 터지기 시작한 지난해 말부터 중국의 시베리아 침공에 이르기까지의 1년 동안, 이 FO 펀드는 무려 200%라는 무시무시한 수익을 올렸다.
그러니까 유진에게 돈을 맡긴 세계적 인사들의 자산이 세 배로 늘어났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FO 펀드 때문에 유진의 투자 성공은 단순히 그 개인의 투자 성공에 머물지 않는다.
유진에게 돈을 맡긴 사람들 또한 유진과 경제적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유진의 투자사들이 올리는 수익의 과반수는 여전히 맨해튼에서 올리고 있어, 매년 미 국세청에 엄청난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중이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미국 또한 유진의 투자 성공에 따라 적지 않은 혜택을 보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FO 펀드는 정말 절묘한 한 수였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요안나의 말처럼 유진이 그렇게 각국의 정상들과 거대한 경제 공동체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때 즈음에 와서는 여러모로 꽤 걱정해야 했을 것이다.
“돈을 버는 건 쉬운 일이지. 하지만 그걸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맞는 말이에요. 많은 이들이 그걸 몰라 결국 수많은 적을 만들고는 하지요.”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지가 훨씬 더 중요해.”
유진은 돈을 벌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돈을 어떻게 얼마나 벌 수 있을지보다, 그걸 누구와 공유할지를 고민했었다.
자신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진은 그동안 단순히 각국의 지도자층뿐 아니라 정치인들과 관료들, 그리고 언론인들까지 혜택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
“뉴욕타임즈에서 오늘 보스에 관한 기사를 올렸어요. 중국의 러시아 침공으로 인한 가장 큰 피해자는 보스라는군요.”
요안나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접한 듯 웃고 있었다.
사실 외견적으로 보면 명백하게 유진은 엄청난 피해자가 맞다.
유진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 오히려 지금 두 나라가 벌이고 있는 전쟁의 원인인 시베리아 유전의 발굴자이자 투자자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희생자라 할 수 있다.
무려 1,000억 배럴에 달한다는 유전의 채굴권은 이제 누구 손에 들어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연히 미국인들은 자국인인 유진이 채굴권을 가지고 있는 유전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중국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이면의 진실을 잘 알고 있다. 유전의 위치 때문에 중국은 결코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원래였다면 앞으로 몇 년 뒤에나 벌어질 전쟁을 유진이 약간의 수고로 조금 앞당긴 것뿐이다.
게다가 이 발견의 당사자라는 권리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덕분에, 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건 유진은 다시 그 권리의 행사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진이 그저 평범한 정유업자나 금융투자자라면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유진은 그렇게 단순한 투자자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