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올리가르히와 실로비키
“러시아에 있는 프리랜서에게 지원 요청이 왔습니다.”
존 브래넌이 상담할 것이 있다며 찾아와 말을 꺼냈다.
“프리랜서라면 그때 중국인 노동자를 구해 CIA에 넘긴 사람인가요? 아직도 연해주에 있는가 보군요?”
“맞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습니다.”
“활동 범위가 상당히 넓군요?”
“러시아 전역을 커버하고 있으니까요.”
러시아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직선 거리로도 6,600km나 떨어져 있다.
뉴욕에서 베를린까지의 거리보다도 더 멀 정도이다. 확실히 러시아는 무서울 정도로 넓은 나라란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어떤 지원을 요청해 왔다는 건가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은신처에 머물고 있는데, 러시아를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손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부상자도 있고, 여권 문제도 있고,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부상이라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건가요?”
존의 말을 듣고 떠오르는 질문이 꽤 여럿이다. 하지만 제일 궁금한 것은 타국, 그것도 적성국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불법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지의 문제이다.
“위험이야 늘 있기 마련이지요. 불법적인 일이 아니더라도요. 러시아는 그런 곳입니다.”
존이 웃으며 대답했다. 적어도 문제의 소지가 생길 정도로 불법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부상은 어쩌다 생긴 건가요? 많이 위급한 상황입니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위험한 사람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사람을 우연히 발견해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존은 그 자신도 믿고 있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한데 그 위험한 사람들이 FSB 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모양입니다. 만일 그대로 도움을 거두어 버린다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함께 러시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군요.”
상당히 모호한 내용이다. 러시아 국내에서 방첩을 담당하는 FSB와 얽힌 일이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유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으로 보아 존 브래넌이 꾸민 일도 아닌 것 같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러시아에서 활동 중인 프리랜서가 무단으로 벌인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도와줄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그건 그렇고, 우리의 미스터 프리랜서는 항상 그렇게 위기에 처한 사람을 잘 찾아내는 모양이로군요?”
존 브래넌이 그런 판단을 내렸다면 아마도 약간의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옐리자베타 알렉산드로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의 장녀입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라면, 베링 그룹의 회장이었던가요?”
프리랜서가 구했다는 사람의 부친에 대해 듣게 되니 비로소 존 브래넌의 요청이 이해가 간다.
“맞습니다.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알루미늄 회사의 소유자이지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실종된 지 꽤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쪽의 행방은 알고 있습니까?”
“아쉽지만 전혀 없습니다.”
러시아의 대기업은 대부분 석유나 석탄 혹은 알루미늄 같은 천연자원을 취급하는 산업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런 대기업의 회장들은 거의 예외 없이 소련 시절 국영기업을 불하받아 부를 쌓아 올린 신흥 재벌, 즉 올리가르히들이기 마련이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또한 그런 올리가르히의 한 명이었다.
소련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국영기업들이 민간인에게 불하되었는데, 그걸 인수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구 정부에 연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실제의 가치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에 국영기업을 인수한 이들은 짧은 시간 사이에 엄청난 부를 일굴 수 있었다.
특히 석유와 가스 같은 에너지 자원, 그리고 광물 자원에 관련된 기업들이 그러했다.
신흥 국가에서 그런 식으로 국가의 재산을 불하받아 부자가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한국의 소위 재벌들도 광복 이후 일본의 사업체를 싼값에 넘겨받아 성장해 온 경우가 적지 않다.
당연히 이런 올리가르히들은 러시아의 정치권 인사들과 아주 깊게 연관되어 있다.
국영기업을 불하받고, 또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검은돈이 오가고, 다양한 부정부패가 생겨나기 마련이니까.
그 때문에 러시아 국민들은 이런 올리가르히들을 상당히 미워하고 있다.
사실상 국부라 할 수 있는 국가의 지하자원들이 이들 몇몇의 부를 쌓는 데 전용되고 있으니 당연했다.
지금의 대통령은 이렇게 러시아 국민들의 증오를 받는 올리가르히들을 숙청하는 것으로 러시아 국민의 인기를 모으며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해 왔다.
20여 년 동안 올리가르히들은 부패 혐의로 처벌을 받거나, 독이 든 차를 마시거나, 혹은 러시아에서 도망가거나 하는 등의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도태되어 갔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군부나 KGB 출신 인사들이 올리가르히를 대신해 러시아 정계나 관계, 그리고 산업계에까지 진출해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총애를 한껏 받는 이들 무력집단 출신 인사들은 실로비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계속해서 러시아의 부와 권력을 손에 넣어 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올리가르히들은 적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 이미 기존에 국영기업을 불하받아 국제적 기업집단으로 성장시켜 놓은 덕분이다.
지금도 올리가르히들과 실로비키 사이의 권력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의 경제를 지배하는 올리가르히들과 국가 권력을 손에 넣은 실로비키의 싸움은 최근 들어 더욱 격렬해지는 중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와중에 올리가르히들이 연이어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소리 없이 사라져가기도 했다.
이해 1월부터 올리가르히들이 계단에서 추락해 사망하거나, 자살하거나, 심지어 일가족을 죽이고 자살하는 따위의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중이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전부 사고사나 자살이라 발표하고 있었지만,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러시아 정부에서도 구태여 진실을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올리가르히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우크라이나와의 평화 회담에 나섰다가 독극물에 중독되는 일이 발생해 국제 사회를 경악에 빠트릴 정도였지만, 러시아는 오히려 그걸 경고로 삼는 듯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마도 사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존 브래넌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올리가르히들 중에서도 한때는 현 대통령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대해 반대를 표시하며 대통령의 눈 밖에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리가르히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크라이나 침략은 국제적인 경제제재를 불러 왔고, 올리가르히들이 운영하는 기업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 또한 생산품 대부분을 서방 세계로 수출하는 알루미늄 기업의 대표이니, 우크라이나 전쟁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분위기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올리가르히들에 대한 징치를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 전쟁은 이런 올리가르히들을 솎아 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나 싶었을 만큼, 그들에 대한 과격한 숙청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그렇게 숙청되고 비게 된 자리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차지하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렇게 위험에 처했다면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게 맞겠지요. 그런데 정확히 어떤 도움이 필요한 건가요? 러시아의 두 번째 도시에 특수부대라도 보낼 것도 아니고.”
“특수부대라니요. 하하, 우리 회사에는 그 비슷한 것도 없습니다.”
존 브래넌이 운영하는 아메리카 비즈니스 센터는 그 이름대로 경제 관련 정보를 수집해 기업들과 국가 기관에 판매하는 민간정보기업이다.
무력집단 따위가 없는 것도 사실이고, 오직 국제적인 정보 네트워크만이 존재할 뿐이다.
위험한 지역에서의 정보 수집을 위해 민간 경비 기업들과 협력 활동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러시아에서 영업 중인 스트라디움이라는 물류 회사가 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꽤 잘 나가는 기업이지요.”
“그 회사의 물류망을 이용하면 러시아를 빠져나올 수 있다는 건가요?”
“네. 그쪽에 연줄이 꽤 많습니다.”
“우리 쪽에서 그 회사에 지분을 갖고 있는 거군요?”
유진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이미 백 단위를 넘어 천 단위에 이르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그런 개별 기업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존 브래넌은 아마 그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라는 여자를 빼 올 다양한 방법을 고려해 보고, 스타리디움을 통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프리랜서가 CIA 쪽에 먼저 도움을 요청했던 모양입니다.”
“그쪽에서 일했었다고 했죠?”
“네. 지금도 간간이 그쪽의 도움을 들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문제는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정치적 부담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 그녀를 도와준다고 큰 실익이 없기도 하고요. 국익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국가의 자산을 쓰는 것은 나중에 큰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으니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겠지요.”
국가기관, 특히 미국의 국가기관들은 중대한 문제의 경우 반드시 의회의 청문회가 뒤따른다는 아주 커다란 제약이 있었다.
영화에서와는 달리 위험한 작전 같은 것은 늘 그런 의회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너무 지나친 행동은 불가능했다.
“사실 옐리자베타 알렉산드로바를 구출하는 것은 우리 쪽으로서도 크게 실익은 없습니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라도 살아 있다면 후일 대가를 톡톡히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아서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군요.”
“그런데도 미스터 프리랜서의 요구가 걸리는 모양이로군요. 꽤 친분이 있나 봐요?”
“하하…… 사실 오래전부터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서요.”
존 브래넌은 전에 보이지 않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 프리랜서라는 친구가 존 브래넌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지 않은가 싶었다.
물론 유진은 존이 먼저 말해 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캐물을 생각은 없다. 때로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자원을 써서 그녀를 구출하도록 하지요. 그렇지만 그 와중에 스트라디움의 직원들이 곤란을 겪는 것은 곤란합니다.”
“물론입니다. 몇 가지 사소한 도움이면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도 책임은 프리랜서가 질 겁니다. 스트라디움은 그저 사기를 당한 것뿐이지요.”
유진은 존 브래넌이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도 일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CIA 생활만 수십 년인 베테랑이다. 스트라디움이 필요했다면, 유진을 거치지 않고 그쪽을 다룰 방법이 있었을 텐데도 허락을 받으러 온 것이 기꺼웠다.
“오늘 일은 감사드립니다. 솔직히 제 사적인 부탁을 드리는 게 잘한 일은 아닙니다만…….”
“미스터 프리랜서가 해 준 일이 있으니, 서로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사실 유진의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다. 그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러시아 첩보국에 의해 제거되거나 납치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아주 은밀한 곳에 숨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