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몰락한 영애
“미스터 프리랜서가 옐리자베타를 러시아에서 탈출시키고 나면 어디에 머무르게 되나요?”
“발트 3국은 여전히 러시아의 영향권에 있고, 사실 전 유럽에 SVR의 요원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니, 어디든 안전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구소련 시절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던 KGB는 이제 국내를 담당하는 FSB와 해외에서 위험한 공작을 펼치는 SVR로 나뉘었다.
그리고 FSB와 SVR 양쪽 모두 독살에 정통한 것으로 대단한 명성을 지녔다.
기껏 구해 낸 불쌍한 여인이 독이나 방사능이 들어간 홍차를 마시고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다.
“결국은 미국으로 와야겠군요?”
“그렇죠. 아무래도 안전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존 브래넌은 자세한 내용까지는 밝히려 하지 않는다. 그건 혹시 모를 책임 소재 때문이다. 모름지기 아는 것이 없을수록 책임도 없는 법이다.
“흠. 그렇다면 옐리자베타의 거처는 우리 쪽에서 제공하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존 브래넌이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진이 러시아 최고위층과 모종의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만했다.
“안 될 거야 뭐가 있겠습니까? 기왕 사람을 구해 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겠죠?”
“그렇긴 하군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이 보호하고 있다면 러시아 정부에서도 감히 손을 대기 어려울 것이다.
겨우 자신들에 비판적인 재계 인사의 딸을 손보자고 유진과 척을 질 만큼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유진 덕분에 적지 않은 자금을 만들어 왔고, 더군다나 최근처럼 중국과의 전쟁으로 미국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유진으로서도 연해주의 유전 개발에 대해 러시아 측이 계약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음에 불쾌함을 표시할 건수이기도 하다. 이모저모로 딱히 나쁠 것이 없었다.
러시아 측이 반발한다 해도 보복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러시아가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암살해 온 것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자국민이나 체첸 같은 위성국 인사들에 대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유진은 슬슬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때마침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원래였다면 러시아 정부의 올리가르히 사냥을 피해 몸을 숨기고 한동안 두문불출하다 두 번의 전쟁이 끝난 뒤, 지금의 대통령이 국내에서 형편없는 지지를 받는 틈을 타 정쟁에 나서게 되는 인물이다.
앞으로 러시아의 권력 지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사람이니, 그의 딸을 구출하고 돌봐 주는 것은 여러모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몇 가지 의논을 해야겠군요.”
“말씀하십시오.”
존 브래넌은 자신의 무리한 요구가 원했던 이상으로 풀리는 것이 기꺼운 듯했다.
“러시아가 아닌 다른 여타 국가에서도 이런 일들은 계속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들이라면?”
“권력에 맞서는 이들이 부당한 박해를 받는 일 말이지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존이 고개를 끄덕였다. CIA에서 그가 주로 맡아 왔던 지역이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 지역이다 보니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민주사회라고 다를 것은 없지요.”
존이 덧붙였다. 그가 보아 온 것은 권위주의 사회만의 어두운 면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아무 데도 없다.
어떤 사상이나 주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니까.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하면 좋겠군요. 이번처럼 말이지요.”
“흠…… 그러니까 평화적인 방안 말씀이시겠군요.”
“물론이지요. 재정적인 방법 말이에요. 그리고 합법적이면 좋겠군요. 적어도 미국 법에 한해서는.”
“그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존은 어떠한 반발도 없이, 유진이 내준 과제를 받아들였다.
“사만다와 함께 의논을 해 보는 것도 좋겠군요.”
“그렇군요. 웨스트우드 양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지요.”
백악관으로 들어가 버린 브라이언 디즈를 대신해 유진의 자선 재단을 이끌고 있는 사만다 웨스트우드라면 이 새로운 과제를 반길 것이다.
인류애를 믿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생각하는 그녀와 전직 CIA 국장 출신의 수단가가 함께라면 쓸 만한 조직을 만들어 내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리고 사만다 웨스트우드를 사랑하는 피터 헤이웍스도 틀림없이 한 발 걸칠 것이다.
기존의 기술에 비해 한 세대는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인공지능 블랙볼트를 개발한 천재까지 합류한다면 무언가를 이루어도 이루고 말겠지.
“당장 어떤 해법을 내놓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보겠습니다.”
존 브래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었고, 만족스럽게 유진이 내준 숙제를 받아 돌아갔다.
유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며칠 뒤, 존 브래넌이 키가 크고 금발이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 함께 찾아왔다.
“감사드려요. 유진이 아니었다면 전 지금쯤 상트페테르부르크 어디에서인가 차가운 땅속에 묻혀 있을 거예요.”
“그런데 부상이 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건가요?”
“네? 아! 괜찮아요. 손을 조금 삐었는데, 다 나았어요.”
부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데. 아무래도 존 브래넌이 유진의 도움이 무척이나 필요했던 모양이다.
“여기서는 안심하고 계셔도 됩니다. 물론 외부에 나가실 때는 항상 보디가드들이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방금 짐을 풀고 왔는데. 너무 과분한 방이더군요.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없는데요.”
유진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플라자 호텔의 자신과 같은 층에 그녀를 위한 펜트하우스를 준비해 주었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이 층이 가장 안전하니까요.”
유진의 안전을 위해 플라자 호텔엔 항시 100여 명에 달하는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 대부분은 유진이 머무르는 꼭대기에 머무르고 있으니, 거짓은 아니다.
대부분 시크릿 서비스 출신인 유진의 경호원들을 무력화하려면 적어도 군대 병력쯤은 필요할 것이다.
아무리 러시아라 해도 뉴욕에서 그런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부친께서도 행적이 묘연하시니 심려가 크시겠군요.”
“네. 사실 걱정이 많아요. 어디에 살아계시기라도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너무 걱정은 마세요. 드미트리 씨야 워낙 수완이 좋으신 분이니 아마 지금 어딘가 안전한 곳에 계실 겁니다.”
“정말 그렇다면 좋을 텐데요.”
얼마 전까지 러시아에서도 잘 나가는 집안의 영애였다가, 지금은 나라를 몰래 도망쳐 나올 정도로 처량한 형편이 되어 버린 금발의 미녀는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듯 글썽거리고 있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하세요. 적어도 여기 계시는 동안은 불편함이 없도록 해 드리지요.”
유진은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옐리자베타를 공주님처럼 대접할 생각이었다.
새롭게 구성될 러시아 권력자의 따님이라면 공주님처럼이 아니라 정말 공주님이라 생각해도 조금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잠시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그녀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사의를 표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가 눈부시게 빛났다.
그 뒤로도 유진은 때때로 그녀에게 잠깐씩의 시간을 할애하며 친분을 쌓아 갔다.
미래의 강대국 권력자의 자식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 * *
전쟁이 시작되고 석 달이 지났다. 러시아군과 중국군은 여전히 유전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리 없이 연해주의 절반을 집어삼킬 것 같던 중국군은 러시아가 전 국민에 대한 동원령을 내리며 무려 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극동 시베리아로 배치하자 공세에서 수세로 변환해야 했다.
더 이상 병력에서의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데다가, 한편으로는 중국군이 수십 년 동안 실질적인 전쟁의 경험이 부족한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한편 러시아군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경하게 공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과 달리 이번엔 자국을 침략당한 상태이니 그만큼 더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러시아도 중국도 핵무기의 사용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상은 이제 중국과 러시아가 길고 비참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중국 GDP가 15조 달러로 지난해보다 1조 달러 이상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중국이 본격적으로 경제를 개방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러시아와의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경제 회복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경기 침체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입니다. 이에 따라 경제학자들은 2040년 즈음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리라던 예상이 더는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지와 뉴스에서는 연일 중국 경제가 이번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얼마나 커다란 손해를 보았는지를 열심히 보도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중국이 발표하고 있는 GDP에 대해서는 의혹이 많았습니다. 중국 정부에서도 자국 내 발표되는 통계의 진실성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를 감안해도 이번 발표에 따르면 중국의 경제가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국 경제는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난관에 봉착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미국 정부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러시아에 대한 침략을 비난하며 경제제재를 이어가고 있기에, 이런 경제 위기는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G2라는 말은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체 중국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이제는 서슴없이 유진을 찾아오는 옐리자베타가 유진의 직원들과 함께 거실의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뉴스를 보다가 물었다.
비록 그녀는 러시아의 권력자들에게 쫓기는 신세이지만, 그렇다고 조국을 침략한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엔 자신들도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거잖아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자신들이라는 건 사실 중국이라는 게 문제죠. 통치권자와 국가가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잖아요?”
“음…… 그렇기는 하네요.”
옐리자베타야말로 유진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조국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고통과 러시아 정권 권력자들의 고통은 늘 별개의 것이었다.
“여하튼 중국이 점점 더 곤란해지는 건 사실인 모양이네.”
유성도 한마디 한다. 사실 뉴스를 통해 흘러나오는 이야기가 대개 그랬다.
중국 역시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 못지않게 큰 피해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