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66화 (266/363)

266화 밴드웨건

며칠 동안 유진은 요안나와 함께 점심을 즐겼다.

중국에서의 상황 때문에라도 함께 있어야 했지만, 식사 자체에도 의미가 있었다.

“핵폭발 사태로 사흘 동안 14.5%가 떨어졌어요. 13%에서 회복을 시작하는 것 같더니, 더티밤이라는 소식이 뉴스를 타며 다시 3%가 빠졌어요.”

식사를 함께하면서도 요안나는 불편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니 어지간히 대범한 사람이라 해도 입맛이 있기 어려운 상황이다.

사흘 동안 주식시장에서만 1조 5,00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선진국 국민 5,000만 명이 1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정도로 큰 액수가 사라졌으니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며칠 사이에 세계 증시가 11조 달러나 사라져 버렸다고 난리네요.”

“큰일이로군. 그런데 이게 다섯 번째인가?”

마치 남의 일을 듣고 있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접시를 싹 비운 유진이 물었다.

“음…… 그러네요. 우리가 다섯 번째로 시식해 본 비건 스테이크에요. 그중에서 가장 괜찮은 편이고요.”

채 절반도 비우지 않은 접시를 보며 요안나가 대답했다.

물론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요 며칠 초유의 사태를 겪고서도 유진처럼 무신경하게 식사를 즐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유진의 예상처럼 주가는 언제고 반등하기 마련이지만, 수조 달러의 베팅을 한 상황에서 그런 손실을 즐기기는 어려웠다.

“그러니까 이 정도가 최선이라는 거지?”

여전히 유진은 방금 해치운 요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아마도요. 아직 이보다 맛있는 비건 스테이크는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에요.”

요안나는 이미 포크를 내려놓고 더 건드리지 않는다.

비건 스테이크 중에서 가장 맛있다는 것이지, 결코 진짜 스테이크만큼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확실히 비건치고는 맛있는 편이네. 물론 정말로 채식을 한다면 두부 쪽을 택하겠지만 말이야.”

동양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먹어 온 다양한 두부 요리 때문에라도 서양에서 유행하는 비건 요리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사실 비건 요리라면 명백히 동양 쪽이 수천 년은 앞서 있다.

“대체육(代替肉)은 역시 비건보다는 배양육(培養肉)에 손을 들어 주고 싶네.”

식탁 한편에 놓인 서류에 몇 가지 메모를 하며 유진이 말했다.

“그런가요? 확실히 배양육 스테이크는 기른 고기와 구별하기 꽤 어려웠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요안나도 같은 서류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비건 스테이크는 역시 한계가 있어요.”

유진이 1조 5천억 달러의 손실에 개의치 않으니, 요안나도 조금은 편안하게 마음을 먹기로 한다.

“재무부 장관이 방문하겠다고 하네요.”

모니카가 전화기를 손에 든 채 메시지를 전달했다.

“언제?”

“지금 워싱턴을 떠난다고 합니다. 가능한 시간을 알려 달라는군요.”

“오후에 다른 약속이 있나?”

“중요한 약속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편한 시간에 오시라고 해.”

미국의 재무부 장관이 직접 찾아온다는데, 퇴짜를 놓거나 시간을 미룰 필요는 없다.

더군다나 지금의 증시 상황으로는 유진이 먼저 만남을 청해도 모자랄 판국이다.

그로부터 겨우 두 시간 만에 재무부 장관이 찾아왔다. 아마도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온 모양이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급히 협상할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반갑게 맞아 준다.

“이번 사태에 대해 백악관에서 걱정이 큽니다.”

오랜만에 들른 월리 아데예모 재무부 장관이 우려의 말을 건넸다.

“간신히 살아나기 시작한 경기가 이번 사태로 다시 후퇴하면 곤란합니다.”

단순한 우려의 말이라기보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다는 표정이다.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슬슬 매수에 나설 생각입니다. 주가가 이렇게 급락하면 추가 수익을 올리기 좋은 기회이니까요.”

“다행이로군요. 유진이 나서 주면 다른 금융계에서도 뒤를 따를 겁니다.”

아데예모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번 뉴욕 방문은 유진을 비롯한 월가의 거물들에게 협조를 요청하기 위함이었는데, 처음부터 잘 풀려 다행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그나저나 재무부 장관 승진 축하합니다.”

“덕분이지요. 솔직히 유진과 함께한 시간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취임식에 참석하고 싶었는데, 여의치가 않았군요.”

“보내 주신 축전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실 투자계의 거물이 미국의 금융 투자 관련 최고직인 재무장관과 너무 개인적으로 친분을 과시하는 것도 그리 보기 좋지는 않다.

그 때문에 유진은 간결하고 형식적인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멈추어야 했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동안 쌓아 올린 우정의 두께는 취임식의 참석 여부 따위로 흔들릴 정도가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의 덕담이 오갔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아데예모는 다시 월 스트리트의 다른 유력 인사들과 만남을 위해 떠나갔다.

아데예모가 월가의 타이쿤들과 협상에 나선 사이, 모니카는 다시 언론사에 자료들을 발송했다.

주식시장의 하락이 이미 바닥에 이른 것 같으니, 추가 매수에 나서겠다는 메시지였다.

적어도 1조 달러 이상의 자금으로 바닥을 치는 종목을 구매할 예정임을 알리고 있었다.

뒤를 이어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를 위시한 월가의 다른 거물들 또한 추격 매수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엄격히 말한다면 담합에 가까운 행위일 수 있지만, 지난 9·11 사태 직후의 뉴욕 주식시장에서처럼 국가 경제를 위해 폭락 장에서 거물들이 주식을 팔지 않겠다는 공언을 하고, 적극적으로 매수에 나서는 일은 오히려 칭송을 받는 행동이다.

그만큼 미국인들에게 주식시장은 중요한 의미였기 때문이다.

엄격하기로 유명한 미국 증권거래 위원회도 이런 선언에 대해 규제에 나설 만큼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못한다.

그렇게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 덕분일까? 백악관에서 이어진 미국의 경제 기반은 튼튼하며, 멀리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추악한 테러는 미국의 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선언 때문일까? 증시의 하락은 급격하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휴우…… 이제 조금 한시름 놓겠어요.”

다음날의 식사 시간에서는 요안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즐겁게 식사에 임했다.

“확실히 보스의 움직임이 제일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어요. 물론 이번 핵폭발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건 누구라도 당연한 것이고, 보스가 저점이라 생각해 매수에 나선다니 시장이 반응하는 게 당연하겠죠.”

접시 위에 놓인 햄버거를 분해해 패티를 포크로 썰어 입에 넣으며 요안나가 말했다.

“확실히 이게 제일 낫군.”

햄버거를 통째로 베어 물어 씹으며 유진이 대답한다.

“그러게요. 진짜 고기와 차이점을 찾기 힘들군요.”

“생산 방식은 달라도 구조적으로는 진짜 고기이니까 그렇지.”

“그러네요.”

“조나선도 꽤 영리하네요. 재빠르게 웨건에 올라탔으니까요. 그다음은 로라였죠.”

요안나는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수장들을 언급했다.

“웨건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날은 특별히 러시아에서 온 손님도 불렀다. 유진의 호의로 플라자호텔 펜트하우스에서 거주 중인 옐리자베타도 이날의 식사 자리에 함께하다가 요안나의 말에 질문을 던졌다.

“밴드웨건 말이에요.”

“아! 대세를 의미하는 거였던가요?”

“맞아요. 투자계의 대세는 역시 당연하게 우리 보스니까요.”

오랜만에 미소까지 지으며 요안나가 말했다.

“확실히 저도 어제 뉴스를 보고, 나라도 지금이면 주식에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과감하게 지니고 있던 자금을 주식에 넣어 보았어요. 덕분에 하루 만에 5%나 수익을 봤지 뭐예요.”

“오! 정말요? 과감하시네요.”

“하루아침에 500만 달러를 벌었어요. 어쩐지 유진에게는 수수료라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여러모로 감사한 게 한둘이 아니에요.”

옐리자베타는 부친의 뉴욕 은행 금융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터진 후 러시아 재벌들의 서방세계 금융계좌는 전부 동결되었었지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물러서고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하며 다시 해금되었다.

아직 종적을 알 수 없는 옐리자베타의 부친을 대신해, 그녀가 대략 1억 달러에 달하는 계좌의 운영권을 획득하는 데에는 역시 유진의 도움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부친을 만나게 되면 잘 이야기해 주세요.”

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살아는 계실까요?”

부친이 언급되자 옐리자베타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꽤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있는데도 드미트리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부친은 대단한 분이세요. 그룹을 지금의 위치에 올려놓기까지 아주 많은 고난을 이겨 내셨죠.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그러면 정말 다행이고요.”

유진의 호언장담에 옐리자베타가 굳은 표정을 풀었다.

“참! 그래서 골드만삭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도 유진의 웨건에 올라탔다는 말이로군요?”

“맞아요. 우리가 매수에 나서고 바로 두 은행에서 추격 매수에 나섰어요. JP모건 체이스는 한발 늦어 오늘 아침에야 매수로 돌아선 모양이에요. 약간의 차이지만, 그걸로 수십억 달러의 이익을 놓쳤지요.”

“역시 웨건에는 빨리 올라타야 하는 법이로군요.”

오랜만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식사 자리였다.

그럴 만도 했다. 유진의 매수가 알려지며 주식시장은 온통 초록 불로 가득했다.

지난 8년 동안 단 한 번의 투자 실패도 없던 유진이 확실하게 저점이라 말했으니, 괜히 따르고 싶기 마련이다.

그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일지라도 적어도 투자에 있어서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 유진을 보는 시각이다.

이번에 큰 손실을 보았다고는 해도, 테러리스트의 핵폭탄까지 예측할 수야 없으니 그의 실력이라면 기어이 만회하리라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밴드웨건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하루였다.

주식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기회다 싶어 웨건에 올라타 매수에 참여할 생각이 들고야 만다.

너도나도 금광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를 놓치지 않을까 무서워 매수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핵폭발 이후로 패닉에 빠져 주식을 던지던 사람들도 바로 포지션을 바꾸기 시작했다.

적어도 패닉으로 인한 매도는 거의 빠진 상태였다.

매수 심리가 가득한데, 매도 물량이 줄어드니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런 상승세는 다시 추가적인 매수를 부른다. 매수가 매수를 부르는 유행의 행렬이 시작된 것이다.

요안나의 말처럼 유진의 말 한마디가 대대적인 웨건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 추세라면 1조 5,000억의 손해를 만회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더군다나 유진은 정말로 다시 1조 달러 이상을 투입했으니, 여기에서도 추가적인 수익이 기대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웨건 이펙트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거죠?”

옐리자베스가 요안나에게 물었다. 그녀는 요안나와도 친분을 쌓고 싶은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사실 유진의 명성에 가려져서 그렇지, 요안나 또한 월스트리트에서는 유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태도는 당연하다.

“서부 시대에 금광이 발견되면 악대차(bandwagon)가 요란한 음악을 연주하며 사람들을 싣고 해당 지역으로 달려간 것에서 나왔다고 하더군요. 먼저 그 웨건에 오르는 사람이 먼저 금광에 도착할 것이고, 그 뒤를 따라 많은 사람이 금광으로 몰려드는 모습에서 따 온 거죠.”

“아하! 그렇군요. 그렇다면 나도 이번에 제대로 된 금광행 역마차에 오른 것 같네요.”

옐리자베타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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