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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70화 (270/363)

270화 헤게모니

“체급이 다른 선수들을 같은 무대에서 같은 조건으로 싸우라고 하는 것은 무리이지요. 중국이 지금까지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써 온 방식들이 공정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개방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사실 개인적으로 유진은 중국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보호 정책이 없었다면 자국 경제를 지킬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많은 개발도상국이 경쟁에서 확고한 우위에 있는 서방의 기업들에 자국 시장을 개방한 결과 자국 산업은 발전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모습을 보여 왔다.

서구의 거대 다국적 기업에 자국 경제가 종속되지 않고 그나마 선진국에 준할 수준으로 발전한 경우는 아마도 한국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한 기업들은 아주 다양한 방법을 통해 해당 국가의 부를 흡수해 간다.

더군다나 그 결과로 잠재적 성장 가능성마저 제한되는 일은 너무나 흔한 경우이다.

이미 필리핀에서의 델몬트나, 중남미에서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와 같은 여러 다국적 기업들이 한 나라의 경제를 심각한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스위스 국적의 세계적인 식품회사 네슬레 또한 세계 각국에서 자사의 이익을 위해 각종 문제를 잔뜩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악명 높다.

도무지 비슷한 체급으로 볼 수 없는 이런 다국적기업들에 시장을 개방하는 것은 개발도상국들로선 독이 든 사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적어도 중국으로서는 해외 기업에게 차별적인 정책이 자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 정책이 아니었다면 중국 경제가 지금처럼 눈부신 성장을 거둘 수도 없었을 것이고, 미국이나 서구 기업과 대등한 경쟁의 자리에 서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맞습니다. 중국은 지금까지 눈부신 성장을 해 왔지만, 여전히 서구의 기업들과는 격차가 있습니다. 물론 중국 정부도 좀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지금에 와서 전격적인 개방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장시웨이는 유진의 중국을 이해해 주는 듯한 말에 잠시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요. 중국은 이미 자유로운 교역으로부터 적지 않은 과실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이제는 스스로의 것도 내려놓아야 할 시간이 온 것 같군요.”

하나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

유진은 중국의 과거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중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해 주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반대로 미국이 이렇게 중국을 몰아붙이는 배경에 바로 유진 그 자신이 있었다.

유진이야말로 중국이 경제를 완전하게 개방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다.

그래야 중국의 경제를 완전하게 손아귀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단순히 중국 주요 기업들의 지분을 매수하는 것조차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미국에서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기 충분한 지분을 손에 넣었다 해도 정부의 지침에 따라 하루아침에 기업이 망해 나가니 이래서야 큰 의미도 없다.

기업들의 흥망성쇠가 정권의 구미에 따라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유진은 백악관이 중국에 요구하고 있는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당연히 유진이 중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백악관에 중재를 서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중국이 경제 성장에 걸맞은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미국의 경제 주체들이 가지는 불만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만은 정권에 대한 지지율로 이어지겠죠.”

어느 나라이건,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결국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

아무리 독재자라 해도 최소한의 지지 기반을 지니고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건 중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인민들은 중국의 부가 해외의 자본에 종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모양이군요. 마치 창과 방패의 그것이 아닐 수 없겠어요. 결국은 창으로 방패를 찔러 보고 방패가 뚫리는지, 아니면 창이 부러지는지 확인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유진의 말에 장시웨이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중국의 경제 규제는 서 있는 입장에 따라 옳고 그름의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이 순간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쪽은 미국이었다.

힘의 논리는 항상 세계 질서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패권국인 미국이 스스로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중국을 몰아붙인 결과, 중국은 눈물을 머금고 시장의 개방을 약속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몰렸다.

“아니면 서로 적당한 선에서 갈등의 상황을 무마하는 편이 나을까요?”

“그러니까 미국의 요구를 조금 낮추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지금이 바로 미국이 요구할 수 있는 최저한도입니다. 때때로 세계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행위를 오해하고는 하지요. 협상이 가능하다거나, 공정한 경쟁을 원한다거나.”

유진의 말에 장시웨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사실 미국은 무척이나 무도하고 패권을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자국 기업의 사소한 이익을 위해 한 나라의 정권을 무너트리고, 거슬리는 행동을 한다면 최우방국이라 해도 거침없이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끝내 관철시키고는 하지요.”

“음…….”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4년마다 백악관의 주인을 바꾸는 선거를 치르지요. 그 때문에 백악관의 주인들은 언제나 자신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의 욕망을 거스르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선거 때문에 더더욱 미국은 자국 외의 나라들에 대해 얼마든지 가혹하게 나설 수 있기도 하지요.”

장시웨이 또한 20세기 이후로 미국이 수많은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과 분쟁, 그리고 학살에 대해 적지 않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우방국가인 일본과 독일의 경제 성장이 한도를 넘어 미국을 위협할 수준이 되자 미국 국민들이 느낀 공포가 결국 어떤 결과를 이끌어 냈는지도 잘 알고 있다.

“미국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정권은 물론이고 아국의 미래 또한 볼모로 잡힐 겁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꼭 중국의 경제가 해외 자본에 완전하게 종속될 것이라고만 보지 않아요. 외려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런가요?”

장시웨이가 의문이라는 듯 물었다.

“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걸어가야 할 길이 반드시 패권을 잡는 것에 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흐음…….”

“우리는 이미 아주 좋은 예시가 있습니다.”

“예시라면?”

“중국보다 먼저 미국을 추월해 세계 패권에 가까이 다가섰던 나라가 있었지요.”

“아! 일본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유진이 조금의 설명을 덧붙이자 장시웨이도 바로 의중을 알아차린다.

“맞습니다. 한때 일본은 수도인 동경의 땅을 팔면 미국 전체를 사고도 남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부를 자랑했었지요.”

“그런 적이 있었지요. 물론 그 땅값이 오른 이유가 미국의 강요에 의한 플라자 합의의 결과였지만요.”

미국이 자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요한 협약 이후 2년간 엔화와 마르크화는 달러화에 대해 각각 65.7%와 57%가 올랐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 성장은 현저하게 둔화되기 시작하게 된다.

“맞습니다. 플라자 합의로 인해 일본은 그때까지 차지하고 있던 세계 경제의 최첨단 자리에서 물러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여기로군요. 하하.”

“그러네요. 바로 이 아래였지요.”

역사적인 일본의 퇴장 장소인 플라자 호텔을 인수해, 이제 호텔 부분은 최대한 축소하고 상당 부분을 자신의 저택이나 손님 접대용 객실로 사용하고 있으니 참 공교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당시의 일본은 엔화를 강제로 강세로 전환하며, 기존보다 월등해진 구매력으로 세계 각국의 자산을 매수하여 미래를 위한 유산으로 남겨놓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중국이 당면한 현실은 단순히 저평가된 위안화의 가치를 높이는 것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위안화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장시웨이가 당연한 반론을 한다. 중국의 상황은 규모 면에서는 당시의 일본에 비견될 만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중진국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다시 통상을 시작하고 시장을 개방하면 해외의 투자자들도 다시 중국 시장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에 따라 외화의 유입이 늘어난다면, 경제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다시 위안화의 가치가 상승하게 될 겁니다.”

“해외의 투자자들이라…….”

장시웨이는 유진이 말하고 있는 투자자들이 다름 아닌 유진 그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렇다면 그 해외의 투자자들은 얼마나 큰돈을 중국에 투자하게 될까요?”

“장담은 못 하지만 적어도 몇 년 동안 중국의 GDP 절반 수준의 투자가 몰리지 않겠습니까?”

유진의 말에 장시웨이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명확한 기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유진은 지금 세계 증시에 투자한 수준의 투자를 중국에서 하겠다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액수가 들어온다면…….”

외화의 유입은 필연적으로 자국 통화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아마도 위안화의 가치가 지금보다 훨씬 더 고평가될 것이다.

“문제가 많습니다. 그런 상태에선 지금 같은 수출 기조를 이어 가기 어려울 겁니다.”

중국은 여전히 자국에서 생산되는 저렴한 공산품을 세계 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경제 성장의 주요한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고평가된 위안화 체제하에서는 수출 경쟁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될 것이다. 90년대의 일본이 그러했듯이.

“그래서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 지금과 같은 수출 정책과 급격한 경제 성장을 고집하는 건 더 이상 중국의 미래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젠 차분하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차례입니다. 고평가된 위안화로 세계 각국의 저평가된 자산을 마음껏 쇼핑할 기회가 찾아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으음……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라면 중국 인민들의 삶이 개선되기는 어렵겠지요.”

위안화의 평가절상은 지금까지의 주요 기조였던 수출의 둔화와 수입 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부르게 될 것이다. 서민들의 삶이 개선되기는 요원한 일이다.

“어차피 15억 인구가 모두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유진의 말에 장시웨이는 핵심을 찔렸다는 듯 움찔거렸다.

경제 개방 이후 중국 정부는 모든 인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다.

지금까지의 모든 정권의 최우선 목표는 예외 없이 모든 인민의 소득을 증대시키고, 삶을 향상시키겠다는 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처음 개방했을 때의 중국 내부 상황은 아프리카 최빈국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지금은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장시웨이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깊어지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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