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페트로차이나
“그렇지 않아도 논의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장시웨이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 문제에 대해 준비를 해 온 듯했다.
“연해주의 유전을 개발하고 채굴할 권리가 강 회장님께 있다는 사실을, 우리 중국 정부는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연해주의 역사적 권리가 중국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 무도한 러시아 병사들이 성실하게 일하러 간 중국의 인민들을 불법적인 수단으로 학살하여 어쩔 수 없이 무력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그 와중에 중국의 좋은 친구인 강 회장님께 폐를 끼쳐드리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다시 연해주 유전의 개발 권리에 대해 강 회장님과 논의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그 러시아인들이 그 끔찍한 테러만 일으키지 않았어도, 중국 연해주 유전의 개발은 지금쯤 강 회장님과 협력하에 이루어지고 있었을 겁니다.”
장시웨이가 준비해 온 말을 꺼내 늘어놓는 동안 유진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저희는 강 회장님의 자회사와 페트로차이나가 함께 연해주의 원유 개발 기업을 세워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페트로 차이나(PetroChina, 중국 석유 천연 가스 공사)는 시노펙(SINOPEC, 중국석유화공집단)과 함께 중국의 자원 시장을 양분하는 거대한 기업이다. 단지 시노펙은 중국 국유 자산 감독 관리 위원회가 100%의 지분을 지닌 공기업인 데 비해, 페트로차이나는 홍콩과 뉴욕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기업이라는 차이가 있다.
장시웨이의 말은 유진에게 출자를 받아 함께 연해주의 원유를 채굴하는 기업을 설립해, 중국의 석유 유통으로 이익을 나누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의 말처럼 더티밤에 의해 오염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는 기약 없는 일일 뿐이다.
“지금도 연해주의 사건 지역에서는 제염 작업이 한창입니다. 때문에 언제 다시 개발이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그 전에라도 강 회장님과 본 사안에 대해 좀 더 심도 깊은 논의를 드릴 예정이었습니다.”
“그걸로 내가 납득해야 합니까?”
한참 만에 비로소 유진이 입을 열었다.
“물론 불쾌하시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중국 정부는 강 회장님께서 겪으신 재산상의 피해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를 생각입니다. 원유 생산 기업이 아니라면 현재의 주가를 기준으로 적절한 수준에서 페트로차이나 지분을 증자해서, 충분히 만족하실 수준까지 인수하시도록 해 드릴 용의도 있습니다.”
조금 찔러 보니 좀 더 전향적인 조건이 나온다. 물론 거기까지도 계산하고 나온 것이 분명하다. 페트로차이나의 지분 같은 것을 장시웨이 혼자 결정할 수는 없다.
유대 상인, 아랍 상인과 함께 중국의 상인들이 협상에 얼마나 능통한지는 유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건 그렇고, 제시한 내용이 꽤나 그럴듯하다.
페트로차이나의 한 해 매출은 약 3,500억 달러 수준으로, 메이저 정유 기업 중 2위에 해당하는 로열 더치 셸과 비슷한 정도이다.
비록 미국과의 무역 분쟁 등으로 지금은 로열더치셸의 절반 정도인 1,200억 달러의 시가 총액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때는 세계 시총 1위까지 올랐던 잠재력이 큰 회사이다.
중국의 한 해 석유 수요는 약 50억 배럴에 달하고, 그중 66%인 35억 배럴은 수입하고 있다. 시베리아 침공으로 차지한 연해주 유전으로부터 매년 15억 배럴을 생산한다면, 페트로차이나의 수익은 지금과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늘어나게 될 것이다.
중국 경제가 다시 활황을 띠게 된다면, 예전처럼 시총 1위까지는 못되어도 적어도 사우디 아람코 뒤를 잇는 거대한 정유 기업에 오를 잠재력을 지닌 회사라고 볼 수 있다.
장시웨이의 말대로라면 중국 정부는 유진에게 적어도 수천억 달러에 달하는 미래 수익을 양보할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만한 준비를 하고 왔다는 것은 중국 정부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유진도 중국이 영영 입을 씻고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대가를 내어 주리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지금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과감한 베팅을 하려는 모양이다.
물론 사태가 이렇게까지 중국 측에 불리하게만 돌아가지 않았다면 훨씬 더 헐한 조건을 내놓았을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논의를 이어 가 보도록 하지요.”
제법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내놓은 이상 유진도 중국을 계속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의 금융과 사기업의 완전한 개방일 뿐이다. 연해주의 유전을 원래보다 몇 년이나 먼저 찾아낸 것도, 중국과 러시아 사이의 전쟁을 유도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의 경제를 지금처럼 한계로 밀어넣은 이유도 말이다.
유진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중국 시장을 손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유진을 방문한 목적의 겨우 절반만 달성한 장시웨이의 표정은 무척이나 묘했다.
그를 설득해 백악관에서 내놓은 조건을 낮추는 것은 실패했다고 보아야 한다. 반대로 유진으로부터 향후 중국 경제를 개방시키고 그에 따른 이익을 나누자는 제안을 받은 셈이니 실패라고도 성공이라고도 할 수 없다.
장시웨이와의 만남이 있고 며칠이 흐른 뒤, 분석관 나탈리로부터 중국 정권 최상부에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중국 정권 내부에서 모종의 사태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현 주석이 물러나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권력 싸움인가요?”
“다툼이라기보다는 내부적으로 결정이 난 모양입니다. 주석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대신 예 서기가 지도자의 자리를 물려받기로 했다는군요.”
“예 서기가 자리에 오른다면, 평화적인 이양이 맞겠군요.”
중앙군사위원회 기율검사위원회라는 무시무시한 기관의 장으로 있는 예 서기는 현 주석의 복심이라 알려진 사람이다. 그가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쿠데타를 통한 이양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아마도 그럴 것으로 관측됩니다. 예 서기가 주석에 오르는 것을 조건으로 물러서기로 한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미국과의 협상에 나오겠다는 말이로군요?”
“예, 아무래도 강경 기조를 이어 온 현 주석이 이제 와 미국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겠지요. 미엔즈(面子)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합니다.”
나탈리는 영어로는 도저히 번역하기 어려운 그 단어를 중국어 그대로 표현해야 했다.
“아, 그렇군요. 한국어로는 체면이라고 하지요.”
미엔즈나 체면이나, 영어로 번역하면 그저 ‘face’가 되어 버린다. 그 단어로는 도저히 숨겨진 뉘앙스를 정확하게 표현할 도리가 없다.
중국인들과는 적지 않게 이런저런 사업을 해 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들의 관습과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유진은 바로 알아들었다.
중국인에게 있어 미엔즈(面子)는 외부에 자신이 비춰지는 모습을 의미한다는 점에 있어서 언뜻 체면과 동일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원초적인 의미를 지닌다. 중국인들에게 미엔즈는 인간으로서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와도 비슷한 것이다.
흔히들 미엔즈를 살려 주면 친구, 미엔즈를 깎으면 원수라고 하며, 중국인들은 미엔즈(面子)가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달고 살 정도이다. 한국에서도 체면 때문에 죽는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중국과는 비할 게 아니었다.
중국에서 사업을 영유하거나, 중국인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때때로 상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생각될 때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절대로 그걸 지적해서는 안 된다. 그건 상대의 미엔즈를 망치는 일이고, 곧 적대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미엔즈가 상했다 느낀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그 원한을 갚으려 드는 것이 중국이니까.
단순히 한 나라의 수장이 체면 때문에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유진은 나탈리를 통해 정권의 핵심부에서 그동안 많은 갈등이 생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아마 이번에는 반미파가 물러선 모양이군.’
그렇다고 해서 주석의 계파가 완전히 무너진 것도 아니다. 후계자로 거론되던 예 서기를 후임으로 올려놓은 것은 여전히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말이니까.
한편으로 유진은 장시웨이와의 회담이 이번 수뇌부의 퇴진과 어떤 관계가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협상이 곧 시작되겠군요.”
며칠이 지나지 않아 중국 언론은 현 지도자가 건강상의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발표를 했다. 예 서기가 새로운 지도자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며, 동시에 지도부의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음을 알려 왔다. 비상시국이기 때문에 전인대를 개최하지 않고 당분간 예 서기의 지도 아래 비상 체제로 시급한 현안들을 해결하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지도부의 퇴진으로 중국 내부의 시위는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최고 지도자가 물러섬으로서 시위대의 요구가 반영된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시위대로서도 정권의 미엔즈는 살려 줄 필요가 있다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도부가 물러났는데도 시위를 이어 가다가는 지도부가 아닌 공산당 자체에 대한 반발로 비추어져, 더욱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 것을 염려했거나.
한편 중국 언론들은 중국과 미국 사이의 관계가 곧 호전되고, 대미 통상 또한 정상화될 것이라는 희망 섞인 전망을 발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돼지 열병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고, 오히려 확산세를 이어 가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당장 시위의 확산은 막았다고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중국 내부의 혼돈이 진정되려면 갈 길이 멀다. 지도부의 사퇴는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 시점에서 정권 수뇌부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경제를 되살리지 않는다면 시위가 다시 불길처럼 일어나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 * *
“중국이 완전히 백기를 든 건가요?”
다시 며칠 뒤, 함께 TV를 통해 미국과 중국 사이의 협상에 대한 뉴스를 보던 옐리자베타가 물었다.
“미국의 우위가 분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을 협상장으로 끌고 나온 것만으로도 이미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기 때문에 협상의 여지는 있겠지요.”
백악관을 설득해 달라는 장시웨이의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사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이 약간의 양보는 할 것은 예상했다. 물리적인 전쟁이 아닌 무역 전쟁의 협상은 상대국 정권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론이다. 협상이 단순히 협상만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권에게 최소한의 힘을 실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인다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무리가 갈 것이고, 그럼 반미파가 힘을 얻게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협상을 통해 이익을 얻어 내는 한편,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지속될 수 있도록 신경 써야만 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는 백악관의 주인에게 친미 인사라 받아들여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