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또다시 플라자 호텔
“요는 미국이 중국을 굴복시켰다는 이미지라는 거죠. 백악관은 이번 협상을 통해 다시 한번 미국이 적대적인 나라를 물리쳤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해요. 그것으로 충분할 테니까요. 이걸로 다음 선거는 다시 민주당의 차지가 될 거예요.”
함께 뉴스를 보던 모니카도 자신이 아는 한도에서 이번 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말해 주었다.
“그렇군요. 결국은 선거인가요?”
“어디나 마찬가지이지요. 모든 통치 행위의 목적은 정권을 지속시키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이 투표를 통한 것이든 무력이나 다른 수단을 통한 것이든 말이지요.”
“어렵군요. 하지만 이해는 가요.”
수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중국과의 기나긴 투쟁은 결국 민주당이 또 한 번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옐리자베타는 오히려 쉽게 납득했다.
그녀의 조국이 처한 현실을 돌이켜보면, 위정자들의 목표가 어떤 거창한 이상의 실현에 있기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현실성 있게 보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 협상을 통해 미국도 중국도 각기 얻는 것이 있을 테고요.”
“협상의 결과가 꼭 미국에만 유리하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인가요?”
“물론이죠. 세상에 한쪽에만 완벽하게 유리한 거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방적인 수탈의 경우에도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지요.”
스페인이 멕시코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수탈해 온 수많은 은은 결국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나태를 불렀고, 스페인의 영화는 생각만큼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식민 시대에 식민지를 수탈한 유럽의 제국들 역시도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플라자 협의에서도 일본은 수출 대국의 자리를 내준 대신 미래의 일본인들에게 남겨 줄 자산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중국이 얻는 것은 무얼까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협상 이후의 중국은 더 이상 지금의 중국과 같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협상의 결과로 가장 많은 것을 얻어 낼 사람은 협상 자리에 참석하지도 않은 유진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협상이 끝나고 합의문에 서명을 마친 다음 날, 월리 아데예모 상무부 장관과 브라이언 디즈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 함께 유진을 방문했다.
“어제 바로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할 일이 많았습니다. 같은 건물인데도.”
디즈가 짐짓 너스레를 떨며 인사치레를 건넸다.
“우리가 만나는 거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어 낸 모양이더군요.”
“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관철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입니다.”
“제가 한 일은 없지만, 이걸로 미중 관계가 다시 화해 분위기로 돌아서면 경제도 활성화될 수 있을 터이니 다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 몇 년 사이 지표가 형편없어 사실 걱정이 크던 와중이었습니다.”
브라이언이 머리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이 중국에 승리했다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돌아오는 선거가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선거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지지율이 눈에 띄게 올랐으니까요.”
합의를 앞두고 한 여론조사에서 민주당과 대통령에 호의적인 답변이 늘어났고, 합의문 발표 직후의 여론조사에서는 압도적인 지지율이 나오고 있었다.
언론들이 이번 합의가 미국에 얼마나 유리한지를 쉴 새 없이 내보내고 있었기에, 선거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놓아도 될 정도였다.
“지금까지의 불공정한 지재권 관행을 개선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월리와 아데예모는 협상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해 주었다.
미국이 중국에 요구한 것들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대부분 강력하게 관철시켰다는 말이었다.
특히 지재권에 대한 문제는 미국에게 있어서나 중국에 있어서나 쉽게 물러서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들은 중국의 기업들이 서구의 기술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제대로 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법부가 편향되어 있어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대부분 중국 기업의 승리로 끝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지식 재산에 대한 침해 사실을 중국의 법정으로 끌고 가도 외국 기업이 승소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설령 법정에서 이긴다 해도 제대로 된 배상을 받기까지는 더욱 어렵기만 하다는 인식이퍼져 있었다.
물론 중국은 이런 주장을 절대 인정하지 않아 왔다.
중국은 정의로운 사법체계를 통해 기업 간의 분쟁에 있어 현명하게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중국 측의 입장이다.
문제는 중국의 사법체계가 공산당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중국의 헌법에서 인민법원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독립적인 재판권을 행사하며, 행정기관, 사회 단체 및 개인에 의한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공산당 조직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해서는 별개로 취급하고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거대한 영토를 지닌 중국은 사법체계 또한 상당히 지방분권적이기 때문에, 각 지역의 사법 기관은 해당 지역에 뿌리를 둔 기업이나 단체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고는 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국외 기업으로서는 난처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 협상을 통해 중국은 지식재산권만을 다루는 지식재산 재판소의 권한을 높이고, 공정한 판결을 약속하며 지역 행정부의 불공정한 관행을 막겠다는 약속을 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의 약속들이 공수표로 돌아가기 일쑤였던 것에 비해, 이번에는 ISDS(Investor-State Dispute Settlement,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를 명시해 미국의 기업이 중국 정부나 사법체계의 판결에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면 제3국의 법정에 소송을 걸 수 있는 길도 마련했다.
앞으로 어떻게 실행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ISDS가 선진국의 기업들에 유리한 점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지금까지처럼 일방적인 피해는 없으리라는 것이 대개의 예상이었다.
그 외에도 금융 시장의 개방이라든지, 중국아 공기업 위주의 계획 경제를 통해 성장을 이루어가는 와중에 특정 기업들에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해 다른 기업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경쟁력을 갖게 되는 문제 따위를 이번 협상을 통해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국영 기업들은 지금껏 각 지방 정부에서 많은 보조금을 지원받고, 또 다른 기업들이 받아야 하는 규제들을 손쉽게 피해 가는 것으로 불공정하게 우대를 받아 왔지만, 앞으로는 미국인이 투자한 기업이 이러한 불공정 경쟁에 대해 제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러한 관행들이 단번에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처럼 대놓고 불공정한 행위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처음부터 기울어진 협상이었다. 미국 협상단은 원하는 대부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쉽게도 중국의 지역 패권을 향한 야욕을 막아 내지는 못했습니다.”
브라이언 디즈가 웃으며 말했다. 미국이 모든 협상에서 승리를 쟁취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정권이 체면을 차릴 수 있는 길은 남겨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을 넘겨주고 중국의 경제를 개방시키는 것이 훨씬 더 남는 장사이다.
미국 정부는 협상에 들어가기 전, 중국 정부에 지금처럼 세계 평화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전환적인 태도를 요구했다.
물론 중국 정부에서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사항이다.
적어도 국민들의 지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위대한 대 중화라는 가치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물론 미국 정부로서는 그렇게까지 중국의 내정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건 협상의 과정에서 중국을 몰아붙이기 위한 미끼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리고 협상장에서 그걸 포기하는 것으로 더욱 많은 것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사실 중국이 국제 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이 미국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객관적으로 중국의 군사력은 미군에 미치지 못하고, 중국이 투사 가능한 힘도 여전히 남중국해에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 군사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것으로, 미국 정치는 적당한 적을 상정하는 것을 통해 이익을 얻어 낼 수 있다.
미국의 정치인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항상 미국 시민들이 함께 마음을 모아야 할 만한 강대한 적을 상정해 국론을 모아 왔다.
냉전 시기에는 소비에트 연방이, 소련의 해체 직후에는 바로 이라크가, 그 뒤를 이어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그런 역할을 맡아 왔고, 지금은 중국의 시대이다.
적어도 정치인들과 언론사들, 그리고 영화 업계에 있어서만은 그런 적이 필수적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당사자인 중국보다도 오히려 미국에 있어서 중국이 군사력을 갖추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말씀하신 대로 기후 대책에 대해 가장 크게 몰아붙였습니다.”
과거부터 범세계적인 기후 대책과 관련해 이름을 높인 브라이언 디즈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입니다.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지요.”
“맞습니다. 이제 중국이 더는 탄소 배출 문제에 있어서 외길을 걷지 못하게 한 것이 사실 미래에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유진 덕분에 백악관에서도 그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놓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유진은 대통령을 비롯한 백악관 참모들에게 중국과의 협상이 시작될 경우 기후 문제를 최우선 순위에 놓아 달라는 요구를 해 왔다.
유진으로부터 받는 후원을 생각한다면 백악관으로서도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요구였기에, 이번 협상에 들어가면서 중국에 과감한 기후 대책 문제를 요구했다.
“단순히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미래가 걸린 문제이니까요.”
“물론이지요. 하지만 우리 쪽에서도 사실 유진이 다른 문제보다 그걸 더 강조하는 것에 의아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금융 투자자로서, 그리고 백악관 최대의 후원자로서 유진은 다른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의아할 것 없습니다. 결국엔 기후 문제 때문에 아주 많은 새로운 시장들이 열리고 있으니까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투자한 기업 중 절반 정도는 기후 문제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진은 솔직하게 인류의 미래가 아니라 재산상의 이익을 위해서라 말했다.
엄밀히 말해 틀린 말도 아니다. 기후 협약이라든지, 탄소 배출권 같은 기후에 관련된 논의와 제도들은 사실 서구권 기업들에 유리한 새로운 무역 장벽이나 다름없다.
서구의 기업들은 이미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조업을 축소하고, 수 세기에 걸쳐 쌓아 온 자본으로 기후에 관련된 다양한 기술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이제 막 발호하는 중진국들에게 기후 문제에 대해 공동 대응에 나설 것을 강요하고 있다.
사실상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는 제조업 위주일 수밖에 없는 나라들에게 기후 문제의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였다.
유럽과 미국으로 상품을 수출하는 국가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