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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77화 (277/363)

277화 정의와 이익의 충돌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의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나치와 일본 731부대가 전쟁 포로나 피침략국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가혹한 인체 실험의 결과물들이었다.

그 때문에 미국과 유럽은 나치의 의사들을 전범으로 처벌하며 임상 시험에 대한 국제적 생명 윤리 강령(뉘른베르크 강령)을 마련해 비인도적인 임상 시험에 대한 규제를 이어 오고 있다.

또한, 60년대에는 헬싱키 선언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 연구에 대한 윤리적 원칙을 만들어 각 대학 내에 연구윤리위원회를 설치해 오고 있다.

신약을 상업화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임상 시험이 필연적이다.

그 때문에 제약회사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약을 다양한 환자에 실험하기를 원한다.

사실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실험이 꼭 나치와 일본군에 의해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다.

영국도 1930년대에 인도군 500여 명을 대상으로 겨자 가스를 실험했었고, 미국 또한 이런 인체 실험의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미국 공중보건국은 앨라배마주 터스키기에서 매독으로 고통받는 흑인들을 치료해 주겠다고 속여 다양한 인체 실험을 하면서도 정작 치료는 해 주지 않고, 보건소에서도 돌려보내도록 지시를 내렸다.

1930년대부터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정부의 주도하에 이런 실험이 이어졌고, 사실이 폭로된 이후에도 실험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과테말라에서 수감자들, 매춘부, 군인들을 매독에 일부러 감염시키고 페니실린의 효과를 확인하기까지 한 것으로 밝혀졌다.

만일 헬싱키 선언 등을 통해 의약 실험에 연구 윤리를 필수적으로 지키도록 강제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심각한 인권 침해가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20세기 후반 이후로는 그런 참혹한 일들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모든 연구 기관이 그런 연구 윤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의약 개발 회사들은 윤리 규제가 허술한 아프리카나 아시아 빈국에서 여전히 위험한 임상 시험을 이어 가고 있다.

하물며 인권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북한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곳의 인체 실험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입니다.”

북한의 장수연구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실험들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가는 밝혀질 것을 알고 있는 유진은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길 생각이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군요.”

폐쇄된 극도의 권위주의 국가에서 국민의 인권이 침범받는 일은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비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에 대한 인권을 침해하는 일들은 늘 일어나고 있기에 존 브래넌 또한 유진의 말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는다.

북한과 비교해 하나도 나을 것 없는 중동 지역 전문가로 수십 년을 보낸 존이 오히려 유진보다 그런 실상을 훨씬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부 지도자 한 명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라는 말이지요.”

장수연구소의 목적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다. 바로 위대한 지도자의 건강과 장수, 그것뿐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인체 실험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또 그를 위한 자원 또한 풍부하다.

단순하게 인체 실험 정도가 아니라 대를 이어 확인해야만 하는 유전 연구까지도 태연하게 인간을 대상으로 집행하고 있다.

“단순히 장수 문제만 연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 정도의 비용과 인적 자원을 활용한다면 아주 많은 일을 벌일 수 있겠지요.”

“유전적인 연구를 통해 인간을 개선시키는 일도 시험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본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위험한 실험들이 그곳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그런 위험한 실험을 국가의 예산으로 마음껏 하면서 축적한 연구 결과는 무척 대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국외로 탈출시켜 폭로하게 할 생각이신가요?”

“가능하다면 국제적인 논제로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요.”

“흐음…….”

물론 유진의 진정한 목적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이 축적해 놓은 연구 결과는 서방의 선진적인 의약 연구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사람을 빼돌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야 하겠죠.”

“그렇겠군요. 물증이 목소리보다 효과적인 것은 당연하니까요.”

사실 북한의 인권유린이나 인체 실험에 대한 증언은 아주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이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탈북 인사들이 그러한 주장을 이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그런 증언을 한 인사들이 실제로 그런 정보를 접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다른 제반 사정 때문에 북한의 인체 실험에 대해서는 아직 국제 사회에서 그렇게까지 중대한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탈북 인사 중에는 때때로 지원금이나 다른 목적으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마구잡이로 내뱉는 일도 있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는 형편이다.

오히려 그러한 출처 불분명한 증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에 진짜 증언마저도 신뢰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다른 나라보다 북한이 임무를 수행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가능한 수단이라면 역시 중국이나 러시아 쪽 통로를 이용하는 거겠죠. 중국의 제약 회사나 연구 기관 등을 통해 접근하는 방법이 최선일 겁니다.”

전문가답게 존은 바로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해 낸다.

“그쪽도 최신 기술이나 실험 기구들을 조달할 필요가 있을 테니, 중국의 연구 기관에 어떤 커넥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파고들어 간다면 어떻게든 포섭할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존 브래넌이나 그가 수장으로 있던 정보기관에서 가장 잘하는 것은 영화에서처럼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위험한 작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현지 사람을 회유하는 일이다.

그러니 이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존 이상의 전문가를 찾을 수는 없다.

“가능하다면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단시일 내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에 제한이 없다면 더욱 좋지요.”

“필요한 자원은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도록 하지요.”

“알겠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장기적이고 큰 비용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아! 물론 보스한테야 아무 문제가 아니겠군요.”

존은 유진이 부담할 수 있는 비용의 한계가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의 예산보다 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군다나 정부의 기관들은 아주 다양한 프로젝트를 위해 한정적인 예산을 나누어 써야 하지만, 유진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 와중에 몇몇 사람이 굉장한 부자가 된다 해도 상관없어요.”

유진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과연…… 굉장히 중요한 프로젝트로 알고 있겠습니다.”

존은 유진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다.

“이건 현재 중국에서 수명 연장 기술이나 유전자 실험에서 중요한 성과를 올린 기업들의 명단입니다. 물론 상당수는 지분 매입에 들어간 상태이고요.”

유진이 지미 탕에게 받은 서류를 존에게 넘기며 말했다.

“추가로 필요한 연구 기관이 있다면 상하이의 지미 탕에게 말해요. 그쪽에 충분한 지원을 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존은 유진이 단순히 북한의 인체 실험을 국제적인 인권 문제로 만들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진짜 이유가 무언지는 묻지 않았다.

아무리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점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다.

“여유를 갖고 한다고 해서 10년쯤 걸리는 건 곤란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진이 덧붙였다. 아직 그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늦어도 10년 안에는 치료제를 찾아내야 한다. 부친이 질병이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앞으로 8년쯤 뒤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힘겨운 투병 생활을 이어 가게 된다.

이전 삶에서도 나름대로 미국에서 재정적인 성공을 거둔 유진은 부친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까지 모셔왔었지만, 당시의 의학으로는 손쓸 도리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예 발병의 초기에서부터 해결할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의 유진은 그를 위한 해결 방법이 바로 북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 한참 뒤에 북한을 탈출한 한 연구자는 미국으로 망명해 북한의 참혹한 인체 실험에 대해 국회에서 증언하게 된다.

그리고 미국의 연구 기관에 합류해 내분기계 질환 치료에 혁신적인 방법론을 내놓았고, 인체 실험이 아니라면 찾아내기 어려울 그의 지식은 의료계에 새로운 충격을 주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 연구원은 미국에서 사회적으로, 또 재정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게 되고, 그의 방법을 사용한 약품을 생산한 기업 또한 엄청난 이익을 거두게 될 예정이다.

아쉽게도 당시 유진의 부친은 그 혜택을 보지 못했다. 임상 시험에라도 참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유진은 이번에는 그 시기를 훌쩍 앞당길 생각이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가족들의 질병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 발병의 시기가 더 늦어질 수도 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손쓸 수 있는 일을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유진이 알기로는 북한 의학계에서 쌓아 온 실험 자료들은 내분기계 질환 같은 북한 최고위층 가족들의 질병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인간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다수 있다고 했다.

그 실체는 유진이 다시 과거로 돌아올 때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대가 큰 것은 사실이다.

다행히도 이번 일은 공적인 정의와 유진 개인의 사적 이익이 충돌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정의와 사익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궁극적인 선의에 가까울 것이다.

“최근 들어 바이오, 의약 관련 투자가 늘어나고 있네요.”

여전히 옐리자베타는 러시아 정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플라자 호텔에서 그대로 거주하며 때때로 유진 형제들과 식사를 한다거나 하며 친분을 이어 가고 있었다.

이날도 함께하는 식사 도중 요안나의 호의로 뉴욕에 위치한 VC에 합류한 옐리자베타가 지나가는 듯 물었다.

“우리 회사뿐 아니라 요안나도 전체적으로 그쪽 방면의 투자를 늘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중국의 개방 때문이 크겠지요.”

북한과 관련해 좀 더 많은 중국 쪽 의약 기업들의 지분을 매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할 수 없으니, 대략 그렇게 말한다.

“중국의 의료 기술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유성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의 대형 제약 기업들에 비한다면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 그렇지만 스타트업 쪽으로는 유망한 기업들이 꽤 있어. 아무래도 중국은 지금까지 서방 세계의 기업들에 비해 연구 윤리에 있어서 훨씬 제약이 적었으니까.”

유달리 북한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적지 않은 3세계 국가들에서 알게 모르게 보편적인 인권이라는 선을 넘나들고 있다.

유진이 투자한 기업 중 일부는 과거의 그런 이력을 잘 숨기고 있는 상태였다.

“아! 그렇구나…….”

“그렇군요.”

유진의 설명에 유성이나 옐리자베타나 모두 잠시 숙연해진다.

사실 서방의 제약업체들 또한 그런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에 불편한 표정도 숨기지 못한다.

현대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건 다른 누군가의 희생 위에 올라서 있다는 사실은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그때, 옐리자베타의 전화기가 울렸다.

“네. 옐리자…… 아빠?”

전화기를 들고 응답하던 옐리자베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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