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현시창
하지만 그녀의 전화는 겨우 1분도 되지 않아 끊겼다. 옐리자베타는 멍한 표정으로 끊어져 버린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친의 연락인 모양이로군요.”
“네. 살아계셨어요. 지인의 전화기를 사용하셨다는데…… 오래는 하실 수 없다며…….”
희미한 미소를 간신히 띄우며 옐리자베타가 대답했다.
“본의 아니게 옆에서 들었는데, 그로즈니라고요?”
“네. 그쪽에서 러시아를 빠져나오실 생각이라는 것 같아요.”
아직 러시아를 탈출하지는 못한 듯했다. 두 차례의 전쟁이 끝났지만, 러시아 집권층의 올리가르히들에 대한 사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러시아의 정치 상황이 전보다도 더욱 격한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는 만큼, 올리가르히들을 이참에 전부 처리해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정권에 변함없는 충성을 보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옐리자베타의 부친처럼 러시아를 탈출할 길을 찾거나, 혹은 이미 러시아를 빠져나간 뒤였다.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네. 목소리만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으신 것 같아요.”
“다행이로군요. 그런데 그로즈니에서 벗어날 방법은 있는 거겠지요?”
“그렇다고는 말씀하셨는데…… 아무래도 위험한 방법인 모양이에요.”
오랜만에 실종된 부친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옐리자베타의 목소리는 더욱 침잠하고 있었다.
“다음번에 다시 연락이 닿는다면 우리 쪽에서 도움을 줄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해 보세요.”
“정말인가요?”
옐리자베타가 희망으로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비록 드미트리와 큰 인연은 없었지만, 누구라도 고난을 겪고 있다면 도움을 주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유진의 말에 희망을 얻은 옐리자베타는 당장이라도 전화가 걸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다시 연락이 온다면 이 전화번호를 주도록 해요.”
존 브래넌의 직통 전화번호를 알려 주자, 옐리자베타는 마치 그게 보물이라도 되는 양손으로 꼭 쥐었다.
식사 자리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그녀의 사연을 알면서도 식사를 이어갈 만큼 무신경하지는 않았다.
그날 오후, 유진은 존 브래넌을 불러 러시아의 상황을 물었다.
“러시아의 상황은 우크라이나 침공 때보다 더욱 심각하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오랜 시간동안 현 대통령과 유대를 맺어오고 있는 여당 대표인 아나톨리예비치가 벌써 20년 동안 공인된 2인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가장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예측되고 있습니다만…….”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려운가 보군요.”
“네. 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온 KGB 출신 유력자들, 소위 말하는 실로비키들과 라이벌 격인 탓에 막상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어떻게 될지 예상하기 어렵습니다.”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실로비키들 쪽에서 미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그쪽으로도 꽤 유력한 인사들이 많습니다. 권력 강화를 위해 정보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한 탓에 적지 않은 인사들이 내각은 물론이고 지금의 정보국까지 점령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FSB 국장을 역임한 니콜라이 국가안보회의 서기와 알렉산드르 현 FSB 국장이 각기 정보국에 대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야심을 드러낼 가능성이 큽니다.”
“음…….”
“이 경우 만약 니콜라이가 권력을 차지한다면, 고령인 관계로 자신의 아들인 파트루셰프 농업부 장관을 차기 대통령으로 밀 가능성도 있습니다.”
“결국엔 공식적인 2인자인 드미트리와 KGB 출신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이어질 거라는 의미로군요.”
“물론 그 외에도 군부 쪽 동향도 살펴봐야 하겠지만, 아마 둘 중 이기는 편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이 큽니다.”
복잡한 러시아 내부 사정상 현 대통령 이후의 집권층 분열은 이미 충분히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야당 쪽으로는 대안이 있습니까?”
“야당 쪽에서 권력을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됩니다.”
질문이 나오기 무섭게 존 브래넌이 고개를 내저었다.
“현집권당인 통합 러시아가 의회의 상당 부분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야당이 제대로 된 후보를 내놓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봐도 될 겁니다. 최대 야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은 러시아 제국 영토 복원을 내세우며 인기만 좇고 있어서 사실상 극우 파시스트 정당에 가깝습니다.”
“파시스트라…….”
“그 뒤를 잇는 공정 러시아는 시류에 따라 여당에 협조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사회주의 정책을 내놓기도 하고, 때로는 반동성애를 주장하기도 하는 등 정체성이 불분명한 정치인들의 모임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저 인기 영합적인 정치인 중 여당이 아닌 사람들이 모인 정도라 평할 수 있겠습니다.”
러시아 정치계는 그야말로 현실에 강림한 시궁창에 가깝다.
러시아 국민의 인기를 끌고 있는 정치인 중에는 부패한 올리가르히 출신이나 과거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음습한 러시아 마피아와의 연결되었다는 경제인도 끼어 있다.
어느 정당이 승리해 정권을 잡는다 해도 러시아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나마 지금의 대통령이 물러서지 않고 있어 그나마 러시아가 지금의 형태라도 유지할 수 있지 않은가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그건 대다수의 신흥 국가들에서 겪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부패로 가득한 기존 정당을 물리치고 새롭게 집권한 야당이 전의 정부보다 무능해 상황을 더 끔찍하게 만들고 마는 것은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베네수엘라가 그랬듯이,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듯이, 현 지도부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걸어갈 길은 힘겹기만 할 것이다.
더군다나 현시점에서 그나마 공정하고 깨끗하다는 평을 받는 인사들은 기존의 정치계에 편입되지도 못하고 있다.
“만일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전면에 나서면 어떻게 될까요?”
“드미트리는 꽤 광범위한 시민 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베링 그룹이 넘어간 지금도 해외에 적지 않은 비자금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파악되어 정치자금을 조달하는 것에도 큰 무리는 없을 테고요.”
존 브래넌은 우선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한다.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알루미늄회사인 베링 그룹의 회장으로, 소위 말하는 올리가르히 중 한 명이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는 와중에 국영재산을 불하받아 큰 재산을 마련한 올리가르히들은 러시아의 부를 독점한 까닭에 러시아 국민들에게 적지 않은 미움을 사고 있지만, 모든 올리가르히가 그렇게 부패하고 미움을 받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그렇게 모은 재산을 국민 경제나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거나, 혹은 러시아의 부패한 정치를 바꾸기 위해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이도 있다.
물론 그런 인물들은 대개가 현 정권 체제하에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지만, 여전히 러시아 국외에서 반체제 활동을 이어가는 인사도 있다.
올리가르히치고는 나름 인기를 얻고 있는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는 전자에 해당한다.
베링 그룹을 운영하며 지속해 온 지역 사회에 대한 공헌으로 적지 않은 인지도를 쌓아 왔다.
알루미늄 공장이 있는 러시아 동남부 지역은 러시아 다른 곳에 비해 훨씬 경제 수준이 높은 편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을 하고 나서며, 전쟁을 반대하는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도 했다.
그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서도 그를 위험인물로 삼아 제거하려는 것이고.
사업을 불하받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권력 핵심부와의 유착이 있었을 테니 그리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러시아 경제계 인사 중 그 정도 부도덕이 없이 성장한 사람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 국민들도 어느 정도의 부패는 용납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드미트리가 정치권에 나선다면 일정한 수준 이상의 지지를 모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존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현 러시아 정치권에서 그가 지닌 세력이 없다는 점은 단점입니다. 사실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드미트리는 명백하게 여당 측 인사로 간주되어 왔었지요. 정권에 반기를 든 지금은 그나마의 지지 기반마저도 전부 적으로 돌렸다고 봐야 합니다.”
“그를 지지해 줄 정당부터 마련해야 하겠군요.”
“그렇습니다. 게다가 상당한 인지도와 인기가 있다고는 해도, 러시아는 상당히 넓은 나라입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그를 그저 평범한 올리가르히로 생각하는 곳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러시아 상황에선 당장 내일의 일을 점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요.”
어떻게 보아도 러시아의 정치계를 개혁하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드미트리가 아직 러시아 국경을 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를 무사히 국외로 빼돌리고, 그를 차기 러시아 유력 정치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유진은 드미트리가 지닌 잠재력을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그저 재계 인사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고, 정치적 기반도 미미하지만, 한 번 정치계에 나서고 나면 마치 거대한 태풍처럼 러시아 사람들의 사랑을 모을 사람이다.
적어도 유진이 알고 있는 드미트리의 미래는 그러했다.
“딸도 도와주고 그 자신마저 도움을 받는다면 확실히 보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겠지요. 우선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러시아에서 빼내 오는 거겠군요. 그 뒤의 일은 차츰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 대단한 존에게도 러시아 정치권에 개입하는 일은 결코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것은 유진도 잘 알고 있다.
사실 유진은 그에게 어떤 해결 방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존 브래넌과 비전을 공유하는 것에 가깝다.
현시점에서 존 브래넌은 누구보다도 중요한 측근이지만, 그의 성향은 철저하게 미국에 대한 충성심에 근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유진은 잊지 않는다.
그러니 유진 자신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직도 유진은 이방인으로서 미국 사회에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이다.
그의 수많은 좋은 친구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 인사라는 것은 유진의 행동이 그 친구들의 궁극적인 이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는 안 됩니다.”
“물론이지요. 그건 염려하지 마십시오.”
두 번의 전쟁이 끝나고 난 러시아의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격랑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야심만만하게 시작한 우크라이나 침공도 아무런 이익도 얻어내지 못한 채 매듭지어야 했고, 시베리아에서 벌어진 중국과의 전쟁에서는 세계 최대급 유전의 절반과 거대한 영토를 빼앗기며 종지부를 지었다.
당연히 현 지도부에 대한 민심은 차갑기 그지없었고, 정권은 책임 소재를 떠넘기기 위한 희생양을 찾으며, 정적들의 제거에 열을 올리는 상태이다.
그나마 중국이 점령한 지역에서 벌어진 핵 테러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의 자존심이 조금은 회복되었다.
빼앗길 바에는 너도 못쓰게 만들어 주겠다는 식의 공격은 일부 러시아 우익들에게 최소한도의 보복이 성공했다는 그릇된 자취심을 선사했다.
물론 러시아 정부에서는 여전히 핵폭발과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지만, 세계는 물론이고 정작 러시아 국민들조차도 그것이 러시아 정부의 행위라 굳게 믿고 있었다.
심지어 러시아 정치인들조차 은연중에 제대로 된 응징이라 표현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