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민주당의 비밀병기
현재 러시아는 30여 년 전 붕괴 직전의 소비에트나 1세기 전 혁명 직전의 제정 러시아에 비견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러시아를 이끌어 오던 짜르의 위상이 흔들리고, 그에게 빌붙어 영화를 누리던 관료와 정보부서 파벌의 권력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일자리를 잃고 배를 곯는 시민들은 직장 대신 길거리로 나와 일자리와 먹을 것을 달라 요구하고 있었고, 정의 없는 전쟁에 끌려갔다가 부상을 당하고도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젊은 사내들의 분노는 끓어 넘치기 직전이었다.
세계 자원의 30%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 1억이 넘는 국민, 그리고 한때 미국 다음으로 뛰어난 과학 기술을 자랑하던 러시아가 어째서 국민들의 최소한의 생계마저 책임지지 못하게 되었는지 모두가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다.
바야흐로 러시아는 새로운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 * *
“드미트리는 무사히 조지아에 도착했습니다.”
며칠 뒤 유진은 존 브래넌으로부터 지시를 완수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했던 대로 유진과의 연결고리가 약한 루트를 사용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를 러시아에서 빼돌렸다고 했다.
유진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혹은 미국의 정보부와 관련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지금은 조지아의 작은 도시에서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꽤 고생했는지 상당히 수척해졌다고 하더군요.”
과거 미디어에 등장하던 드미트리는 장신에 상당한 거구로, 적어도 120kg은 나갈 것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존의 말로는 지금은 간신히 90kg을 넘을 거라고 한다. 몇 달 사이 30kg이나 빠졌다면 정말 죽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의도한 게 아닐지라도 그런 감량은 드미트리에게 도움이 될 예정이다.
피를 물려받은 옐리자베타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멋진 금발에 장신인 드미트리가 유세장에 나서는 모습은 당시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지도자 순위에서도 수위에 서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 대단한 미모가 드미트리의 높은 인기의 원인일 수도 있다.
드미트리의 외모가 자신들을 우월하다 생각하는 러시아인들의 인종적인 자존감을 자극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이다.
“당분간 체력을 회복한 뒤 며칠 내로 터키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그 후에는 어디에서 머무를 거랍니까?”
“미국으로 건너올 생각은 없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러시아 정치권에 마음을 둔 모양입니다.”
올리가르히뿐 아니라 대개의 성공한 사업가들은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드미트리는 정권의 인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 생각한 모양이다.
“우선 영국이나 프랑스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권의 박해를 피해 정치적 망명자의 위치에서 목소리를 내려는 듯합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군요.”
물론 유진도 나름 그를 위한 준비를 생각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서방 세계의 미디어 그룹에 가진 영향력을 조금 사용해 볼 생각이다. 물론 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유진이 꽤 오랜만에 다시 도널드 트럼프를 만난 것은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며칠 뒤의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 유세로 정신없이 바쁜 도널드 트럼프가 뉴욕에 올라와 트럼프 타워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며 만나기를 청해 왔고, 유진으로서야 딱히 그를 꺼릴 이유가 없으니 마음 편히 찾아갔다.
“어떤가? 자네 말대로 이번에는 내가 다시 백악관을 되찾을 수 있겠나?”
“물론이지요. 전부터 말해 오지 않았던가요? 제일 골치 아픈 시기를 민주당에 넘기고 다시 찾아오면 된다고 말이에요.”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자네는 참 대단한 거짓말쟁이야.”
도널드가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쟁이라니요. 명백히 명예훼손입니다.”
“흥! 자네가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건다면 지금까지 내가 번 돈을 다 토해 내도 모자라겠군.”
“하하! 설마요. 여하튼 도널드를 믿지 않는다면 왜 그렇게 큰돈을 내놓았겠습니까? 이번 선거에 들어가는 비용의 태반이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르지 않을 텐데요?”
“물론 잘 알고 있지. 민주당 쪽 선거 자금도 같은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도 말일세.”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건 참 마음 아픈 일이거든요.”
“모두의 친구는 누구의 친구도 아니라는 말도 있더군.”
도널드는 평생을 호불호를 명확히 하며 적을 만드는 것을 서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적을 만드는 것에서 이익을 챙기는 것에 익숙하다 해야 할 것이다.
이민자를 경멸하고, 교황을 비난하고, 정치인들을 욕하는 것에서 반사 이익을 얻어 왔다.
레슬링 쇼나 리얼리티 쇼에서도 트럼프가 욕을 하고 비난하면 모두가 좋아했다.
평생을 그렇게 누군가를 욕하는 것으로 살아온 사내는 지금도 백악관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유진에게 기어이 한마디 하고야 만다.
“물론 자네가 우리 가족의 좋은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닐세.”
그렇다고 해서 유진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다.
도널드와 트럼프 일가는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난 부를 쌓아 올릴 수 있었고, 그건 대부분 유진으로 인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유진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슈퍼팩에 기부한 액수를 생각하면, 트럼프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그렇게 한 번 삐죽거리고 물러서는 것이 전부다.
“그런가요? 제 생각은 다른데요?”
도널드의 푸념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고 말했다.
“세상에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흠…… 맞는 말이로군.”
트럼프는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덕으로 한 번 수익을 올리기 시작하면 반드시 상대를 존중하고,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상대에 의존하게 된다.
메이도프를 비롯한 수많은 폰지 사기꾼들이 어떻게 월가의 은행들이나 증권사들, 그리고 투자에 이골이 난 거물들의 돈을 잔뜩 긁어모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자명한 일이다.
“여하튼 공화당 경선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트럼프의 질투를 무시한 채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축하의 말을 던졌다.
“결과가 나오려면 아직 몇 달은 남았는데?”
“해 보나 마나인 문제 아닙니까?”
유진의 말처럼 공화당 경선은 처음부터 줄곧 전임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독주로 시작되었고, 경선의 중부 능선을 넘어선 지금도 철옹성처럼 공고하게 경쟁자들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사실 이는 경선이 시작되기 전부터 예견되어 온 일들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에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쪽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공화당이었다.
명백하게도 트럼프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공화당 내에서도 우려에 섞인 눈초리를 받고 있다.
이번 선거는 어떤 면에서는 공화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을 기회이지만, 도널드 트럼프라는 카드로는 도저히 민주당에 맞설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젊고, 좀 더 개혁적이고, 좀 더 유연한 후보가 공화당에서 나선다면, 힘겨울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민주당과의 싸움에서 승리의 깃발을 쟁취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 많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미 공화당의 골수 지지자들은 도널드 트럼프를 자신을 위한 투사로 생각하고 있었다.
“도널드의 인기는 지금까지 그 어떤 공화당 대통령에 비해서도 높다고 하더군요. 레이건 이상이라는 말도 있어요.”
“당연한 것 아닌가?”
공화당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나뉜다.
기존의 공화당은 보수적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균형 있는 시각을 지닌 실용주의적인 정당에 가까웠다.
물론 레이건 이후로 강경 보수우파 세력의 힘이 강해지며 보수적 백인 중하류 노동 계층의 요구에 따라 기독교복음주의적인 색채가 강해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시대로 들어서며 이제 공화당에는 실용주의와 현실주의자들은 완전히 소수로 밀려났고, 오직 다른 계층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고 혐오를 조장하는 포퓰리스트적 정치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정치인들이란 결국 그를 지지해 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혹은 지지자들이 원하는 말을 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금융 위기 이후 15년 동안 미국의 부는 두 배 이상 늘어났지만,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오히려 가난해졌다.
그리고 그런 소득 향상에서 소외된 노동계급과 중산층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느끼는 굴욕과 분노를 대변해 줄 사람으로 도널드를 선택했다.
사실 지금에 와서 공화당을 지탱하는 것은 그런 분노한 트럼프 지지자들과 도저히 민주당에는 표를 줄 수 없다는 사람들이고, 사실상 그들은 억지로 한배에 타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그런 이유에서 공화당 경선은 트럼프의 여유 있는 승리가 일찌감치 예견되고 있었다.
“이번 선거, 솔직히 힘들지도 모르겠더군.”
웬일로 트럼프가 약한 소리를 한다. 유진이 알고 있는 도널드라면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인데.
“내가 경선에서 승리하고, 막상 선거에서는 패배하게 되면 지난번처럼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게 되는 꼴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1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력한 내가 입은 손실은 어떻게 하겠나?”
역시 그런 말을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도널드 자신도 이번 선거에서 승리는 자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도널드가 전당 대회에서는 선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아주 많은 미국 시민들은 다시 그를 대통령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지 않는다.
결국은 패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 달라는 말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가장 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위기의 회피이다.
도널드는 수십 년 동안 사업을 이어 오며 아주 여러 번 파산의 위기를 맞이했었고, 그때마다 손실을 최소화하거나 동업자에게 떠넘기고 빠져나가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럴 속셈이다.
“그렇게 열심히 유세에 나서셨고, 국가를 위해 애쓰셨으니 국민 모두가 도널드에게 감사할 겁니다.”
유진은 짐짓 모르는 척이다. 어린아이가 칭얼거린다고 당장 사탕을 내어주면 버릇이 나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질 걸 알면서도 이대로 공화당 후보로 나서려면 민주당에서도 무언가 받아 내야 할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해 이번 선거에서 나도 적지 않게 돈을 쓰고 있단 말일세.”
민주당이라고 말했지만 명백하게 유진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번에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사용했는지 아는가? 아마 지난 몇 년 동안 자네가 벌어 준 돈을 전부 쏟아부을지도 몰라. 갈수록 선거에는 큰돈이 든단 말이야.”
도널드의 푸념은 과장이 잔뜩 섞여 있지만, 큰 줄기에서 보면 그리 틀리지는 않는다.
지난 2020년 선거에서 양당은 무려 140억 달러를 사용했다. 그 4년 전과 비교해 두 배나 늘어난 액수이다.
그리고 이번 선거에서는 다시 그 전의 두 배가 사용될 거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