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혼보다 파혼이 낫더라-281화 (281/363)

281화 일기일회(一期一會)

“그럼 오늘은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오후에는 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도널드에게 새로운 기회에 대한 힌트를 잔뜩 주고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해서 들어가게. 다음에 또 보지.”

트럼프도 지금 들은 정보를 정리하고, 자신의 투자 전문가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인지 일어서는 유진을 말리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 더 마음이 급한 쪽은 도널드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런 투자는 생각만큼의 수익과 직결되지는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경기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과 이익을 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만 다시 한번 입증하게 되리라.

플라자 호텔로 돌아가니 워싱턴에서 도착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윤 의원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습니다. 약속보다 빨리 온 제가 실례이지요. 윤형준입니다.”

유진과 비슷한 연배의 잘생긴 사내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살짝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고는 유진이 내민 손을 잡았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워싱턴에서의 일은 잘 풀리셨는지 모르겠군요?”

“덕분에 굉장한 사람들을 아주 잔뜩 만날 수 있었습니다. 겨우 2선 의원이 국무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 그리고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까지 만나다니 엄청난 호사였습니다. 더군다나 만나 주신 모든 분께서 단순히 사진 찍는 기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넉넉한 대담의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최대한 우리 입장을 어필할 수 있었습니다.”

윤 의원이 덕분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단순히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다.

정말로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한국의 2선 의원에 불과한 그와 만날 기회를 주선한 것은 유진 자신이었다.

“다행이로군요. 멀리까지 날아오셨는데, 허사는 아니었겠어요.”

“전부 강 회장님 덕분입니다. 강 회장님께서 힘을 써 주시지 않으셨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자신감 있는 태도의 윤 의원이었지만, 유진에게 받은 도움에 대해 사의를 표시할 때에는 굉장히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뉴욕은 여러 번 들르셨지요?”

“사실 겨우 두 번째입니다. 미국에 오는 것도 두 번째이고요. 하하!”

윤형준 의원은 현 국회의원 중 대표적인 흙수저 출신이다.

흔한 미국 유학 경험은커녕 다른 의원들과 함께 연수 차원에서 미국에 와 본 것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시기를 거쳐 젊은 나이에 국회에 입성했기에 상당한 엘리트이지만, 최근 점점 늘어나는 금수저 출신 의원들과 확연한 차이로 젊은 층의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시면 뉴욕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마련해 드려야겠군요. 뉴욕에는 즐길 거리가 아주 많습니다.”

“소개해 주시는 곳이 있다면 꼭 한 번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솔직히 개인적으로 전 강 회장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추종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것참 다행이로군요. 나도 윤 의원님의 팬입니다. 아직 대한민국의 국적이 있었다면 주소를 옮겨서라도 두 번 다 윤 의원님을 찍었을 겁니다.”

“어이구!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제가 얼굴을 들지 못하겠군요.”

“참! 이리로 오시지요.”

유진은 손수 손님을 마련된 자리로 안내했다. 몇 년 뒤면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가 될 사람인데, 그 정도의 수고가 아깝지는 않았다.

맨해튼의 고층 빌딩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에서는 세계 최고의 스카이라인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날은 센트럴파크가 아니라 맨해튼의 중심부를 내려볼 수 있는 곳에 만찬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내 두 사람이 앉기에는 너무 크다 싶은 식탁에 넘치겠다 싶을 정도의 요리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거…… 굉장히 호사로운 자리로군요.”

윤 의원이 부담스럽다는 듯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흙수저 출신이라는 것을 상당한 정치적 자산으로 두고 있는 윤 의원은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불법 자금 같은 불편한 상황에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유진은 그가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도 검소하기로 유명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즐겨 찾는 식당은 국밥집이나 길거리 노점이었고, 단 한 번도 고급스러운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없을 정도로 이미지 관리에 철저했다.

심지어 후일 청와대에서 지낼 때도 그런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윤 의원이니, 지금 차려진 화려한 식탁에 불편한 모습을 내비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 자리가 사진이 찍히거나 누군가에게 흘러갈 일이야 없겠지만,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당사자로서야 그럴 만도 하다.

“윤 의원님을 대접하기 위해 조금 무리를 했습니다. 이쪽은 카스피해에서 공수해 온 벨루가 캐비어입니다.”

유진은 상대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오히려 이날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한 스푼에 4천만 원이라는 소문이 돌고는 하는데, 사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한 스푼에 4천만 원이라고요?”

“최고급 자연산 벨루가 캐비어는 1kg에 60만 달러를 조금 넘어선다고 하더군요.”

유진의 이어지는 말에 자개로 된 스푼으로 캐비어를 떠올리던 윤 의원의 손이 살짝 흔들린다.

“그러니까 한 스푼을 크게 뜨면 4천만 원은 무리고 만 달러는 되겠군요.”

“하하…….”

윤 의원은 이마에서 살짝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과연 세계 제일의 부자분이시라 식탁에 오르는 것도 남다르군요.”

“사실 저도 오늘 처음 먹어 봅니다. 돈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딱히 대단한 미식가도 아니고, 고급진 서양 음식을 탐닉하는 편도 아니라서 말이지요.”

“아! 그럼…….”

“윤 의원님께서 방문하신다기에 한 번 준비해 봤습니다. 언젠가 나주에서 드셨던 어란에 굉장히 큰 감명을 받으셨다는 기사를 읽었던 기억이 나서요. 그렇다면 혹시 다른 나라의 어란에도 즐거움을 느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부담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처럼 대단치 않은 정치인을 그렇게까지 기억해 주신 것이 정말 얼마나 큰 영광인지…….”

윤 의원이 정말 감명받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스푼을 입으로 가져가 한입에 넣어 버렸다.

“과연…… 굉장한 맛이로군요. 부드러우면서도 크리미한 질감이 일품입니다.”

사실 윤 의원은 입안 가득한 캐비어의 맛을 잘 느끼지 못할 만큼 긴장한 상태였지만, 애써 그 사실을 감추며 감탄 어린 평을 내놓았다.

“다행이로군요. 전 사실 그다지 특별한 맛은 느끼지 못해서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에 주인이 따로 있다는 모양입니다.”

유진의 말에 윤 의원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참! 이쪽도 한 번 맛보세요.”

유진은 방금 전의 캐비어와 달리 은은한 호박색 알이 담긴 접시를 윤 의원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것도 캐비어인가요?”

“예. 캐비어 중에서도 알비노 철갑상어에서 채취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가요? 알비노라면 꽤 희귀한 거겠네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천 마리 중에 한 마리꼴로 잡힌답니다.”

“그럼…… 가격도 무섭겠군요…….”

윤 의원은 다시 한번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시중에 유통되는 물건은 아니라더군요. 몇몇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우디 왕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라 그 친구도 간신히 구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친구 사이에 주고받은 물건이니 값을 매기기는 어렵겠네요.”

“아! 그렇다면 어떤 비싼 보물보다 오히려 더 비싸다 하겠군요.”

“그 친구가 귀뜸해 주기를 적어도 0이 여섯 개는 붙어야 한답니다.”

“어…… 그렇군요.”

접시에 수북히 담겨 있는 황금빛 알 무더기가 적어도 몇백 그램은 되어 보이니, 수억 원도 넘는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일평생을 벌어도 힘들 만큼 큰 액수가 겨우 몇 수저로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아찔할 정도엿다.

“알비노 철갑상어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테고, 또 80살 넘은 놈에게서만 채취할 수 있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할 뿐이지요. 그래도 윤 의원님께서 즐겨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

“물론 기쁘게 먹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네요. 아마 제가 평생 먹어 온 모든 음식의 값을 더해도 이 한 스푼만 못할 것 같군요.”

“그렇다 해도 윤 의원님께서 그 한 스푼으로 우리의 만남을 기억해 주신다면 아까울 것이 없지요.”

“아!”

윤 의원은 계속해서 신음성에 가까운 탄성을 내뱉을 뿐이다.

그로서는 어째서 유진이 자신을 미국 정계의 유력 인사들과 만나게 하고, 이렇게까지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유진을 만나고 온 정치인들이 그렇게 적은 편은 아니고, 그들 모두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런 대접까지 받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대개는 뉴욕 최고의 쉐프가 멋진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는 식의 자랑을 동료들에게 하고는 했다.

만일 누군가가 이 비슷한 정도라도 대접을 받았다면, 그걸 자랑스럽게 떠들지 않았을 리 없다.

한국 정치계에서 유진과 가깝다는 소문이나, 좋은 관계라는 소리는 무조건 플러스가 될 뿐이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조금은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과한 대접을 아끼지 않으시는 건가요?”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이 일기일회라 하셨죠.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고요. 윤 의원님과의 이번 만남이 우리 모두에게 영원히 기억될 자리였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과할지도 모르지만, 윤 의원님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기뻐하실 것을 준비하려 노력해 보았습니다.”

사실 유진은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방문하는 손님 대부분에게 비슷한 말을 하고는 한다.

단순히 고급술과 호사로운 음식만을 대접하는 것보다, 이런 말을 곁들이는 쪽이 훨씬 더 상대의 마음을 열게 만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윤 의원의 취향을 조사하고, 식사 자리를 준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모니카 아래에서 일하는 비서진들의 일이다.

유진이 한 노력은 자리에 나타나기 전에 모니카가 건네준 작은 메모를 훑어보고 기억한 게 전부이다.

하나 유진의 사람들이 윤 의원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유진은 자신이 준비한 자리에 준비된 음식들이 얼마나 진귀하고 구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데에도 조금의 거리낌이 없다.

귀한 음식을 준비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충분히 전해지는 것으로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손이 많이 가고 비싼 음식이 반드시 상대의 마음에 들리라는 생각이야말로 오히려 무성의라는 생각이었다.

모두의 입맛은 서로가 다른 것이 당연하고, 때로 사람의 입맛은 그 음식의 맛 자체가 아니라 음식의 정보에서 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나 현대인은 음식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음식에 덧붙여진 정보를 먹는 것에 가깝다.

“과연…… 일기일회라. 우리 같은 정치인들도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군요.”

유진이 다음 8년 동안 한국을 이끌어 갈 지도자로 낙점한 윤 의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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