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선한 영향력
“하기는 그렇군요. 단 한 번의 기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같은 투자자들보다 오히려 정치인에게 더 어울리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투자자들은 오히려 기회보다 위험을 더 생각해 여력을 남겨 놓는 법이지요.”
“맞습니다. 정치인은 지금이 기회라 생각한다면 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용기가 가장 큰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진이 준비한 몇 가지 요리 덕분인지, 윤 의원이 조금은 마음에 문을 열기 시작한다.
사실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심 세계 제일의 부호이며 한국의 경제계는 물론이고 정치계에까지 대단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진에 대해 약간의 경각심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너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마땅찮기도 했다.
지금 한국의 상황은 오직 유진의 경제적 성공과 그의 투자에 이끌려 가는 모습이다.
당장이야 유진이 한국에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가고 있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해도 그가 언제까지 그렇게 투자에 성공을 이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계속 성공을 이어간다 해도 그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국가가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은 버릴 수 없었다.
건전한 사회라면 어느 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노력과 성취가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 윤 의원의 신념이다.
더군다나 유진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지금은 미국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경각심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진이 사업적 기회를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유진의 투자가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현시점에서의 한국은 결국 어떤 미국인의 선의에 기대야 하는 무척 기형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 윤 의원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물론 유진이 제공한 기회 덕분에 미국의 유력 인사들과 만날 수 있었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정치권에서 영향력을 키울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오늘의 만남에서 자신은 결코 유진의 아랫사람이 될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밝힐 예정이었다.
설령 그걸로 어떤 정치적 손해가 생긴다 해도 충분히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가 정치권에 뛰어든 것은 단순하게 그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의원은 첫 만남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유진이 겸손한 태도로 자신을 대우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감명을 받고 있었다.
한 접시에 수억 원에 달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음식 때문은 아니다.
일기일회라는 말로 유진은 이 만남이 단순하게 윤 의원을 존중하고 있다는 진심을 표시했고, 윤 의원은 그런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 윤 의원은 만나기도 전부터 경각심을 가졌던 스스로에 대해 조금은 반성하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그를 만나고 온 많은 이들이 한결같이 대단한 사람인데도 굉장히 겸손하다 표현하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워싱턴에 방문해서 한 가지 놀란 게 있습니다. 한국 교민의 워싱턴 진출이 엄청나게 활발하더군요. 워싱턴 시내에 한국 식당도 많고, 동양인이 걸어가고 있다면 셋 중 하나는 한국어를 사용하더군요. 더군다나 미 행정부에도 한국계의 진출이 굉장히 늘었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백악관에도 동양계 보좌관 중 한국 출신이 가장 많다더군요.”
식사가 이어지며, 윤 의원은 처음보다 훨씬 더 마음 편히 이번 방미 일정에서 겪은 일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전 사실 무척 좋은 현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물론 그분들이 더 이상 한국 국적은 아니지만, 한국인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미국에서 한국과 혈연이 있는 분들의 영향력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이 지니는 위상도 과거와는 한결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한국을 말하면 노스 코리아를 일컫는 것이 스탠다드였는데, 지금은 정반대이지요.”
겨우 몇 년 전, 그러니까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때만 해도 그랬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다양한 이유로 미국인들은 한국을 굉장한 선진국으로 여기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이 동양을 대표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엔 미국 내 한인들의 지위가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위치를 결정짓게 될 겁니다.”
유진이 단언하듯 말했고, 윤 의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하기야 지정학적인 위치에서나 세계 정치 무대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외교적인 스탠스를 생각해 본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한국이 세계의 리더 격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참으로 난망한 일이겠군요.”
“하지만 미국에서 한인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그리고 더불어 문화적으로까지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면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 또한 바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지금 강 회장님께서 미국의 재계와 정치계에 가지고 있는 영향력만으로도 한국의 위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기는 한 것 같습니다.”
유진이 고개를 내젓는다.
“한 사람으로는 어렵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미국의 각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할 겁니다. 한두 해나, 십 년 정도로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지요.”
“그렇군요. 아주 길게 보아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쯤 뒤 한국 출신 인사들이 미국의 주류에 올라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보면 꽤 가슴이 찡해지는군요. 어떤 면에서는 지금의 유대인들 자리를 한국인이 차지하는 셈이겠어요.”
윤 의원은 유진의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금세 잡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유대인들과 직접 경쟁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우리의 선배로 삼아 볼 수는 있겠지요.”
유대인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겨우 1,50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인구와 비교해 보아도 1/3 정도에 불과하고, 국가로는 남수단과 짐바브웨 수준, 국가별 인구 순위로 치면 75위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유대인이 지닌 영향력은 다른 어느 민족에 못지않다.
물론 그 이유는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미국 내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미국의 정치, 경제, 문화, 학계 등의 다방면에서 골고루 두각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겨우 1.5%에 불과한 유대인들은 19%에 달하는 히스패닉이나, 13%의 흑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아직도 겨우 6%에 불과한 아시안과는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이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서는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블룸버그 통신의 마이클 블룸버그처럼 자산 최상위권 안에 몇 명이나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렇게 사회의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영향력을 가진 만큼, 정치권에 끼치는 영향 또한 클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이 몇 안 되는 미국의 최우방이면서도 다른 우방국들과 달리 미국에 일방적으로 굽신거리지 않고, 오히려 때로는 미국의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친 이스라엘 정책을 펼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역시 미국 내 유대인이 지닌 힘이라 할 수 있다.
정치적 후원을 얻어 내기 위해서라도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결코 유대인을 모욕하는 행동을 할 수 없다.
유대인보다 수십 배나 많은 구성원을 자랑하는 흑인이나 히스패닉이 결코 받을 수 없는 대우를 겨우 천만 명의 유대계 미국인들은 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친미인지 반미인지에 따라 정치적 입지가 결정되고, 때로는 반미라는 딱지가 붙는 것만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되기까지 하는 한국이 한미 관계에서 철저한 을의 입장인 것에 비해, 이스라엘은 오히려 반대로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갑의 입장을 주장하는 일까지 있더군요.”
윤 의원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차츰 바뀌어 가겠지요. 모두가 노력한다면 곧 좋은 성과가 나올 겁니다.”
“강 회장님의 예를 본받아 미국에 진출하는 사람이 더욱 늘어나고, 한국 기업들도 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그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강 회장님 때문에 인재 유출이 심각하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지요. 한국이 자랑할 거야 사실 인재밖에 더 있습니까?”
“그렇죠. 한국의 좋은 인재들이 한국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 결과적으로 한국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은 정말 엄청나게 변화했습니다. 강 회장님의 영향력은 역시 한국에 제일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요.”
처음에는 유진에게 쓴소리도 할 생각이었던 윤 의원이지만, 말을 하다 보니 그에 대해 찬사만 늘어놓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유진은 한국 사회나 경제에 좋은 기회를 주고 있을 뿐이다.
윤 의원이 걱정하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아주 먼 미래,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시간의 것이다.
“5년 전에도 한국은 선진국이었지만, 지금의 한국은 그때와는 또 다른 차원의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2017년, 유진이 5년 동안에 걸쳐 모두 5,000억 달러를 한국에 투자하기로 한 약속은 완벽하게 지켜졌다.
아니, 사실은 그의 약속 이상으로 많은 돈이 한국 경제에 투자되었다.
5,000억 달러는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인 미국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돈이다.
물론 미국에는 시가 총액이 1조 달러에 달하는 기업이 몇 개나 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기업들이 1조 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고, 지분을 보유한 사람들이 1조 달러라는 가격을 지불하고 주식을 샀다는 의미도 아니다.
시장에서 바라본 주가의 가치에 총주식의 수를 곱한 것이 시가총액일 뿐이다.
그걸 누군가에게 전부 1조 달러를 받고 팔 수 있지도 않고, 심지어 전체 주식의 몇 %만 시장에 쏟아져 나와도 주가는 급락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시가 총액이라는 것을 글자 그대로의 현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한국 경제에 뿌려진 유진의 5,000억 달러는 성질이 다르다.
각계각층에 뿌려진 그런 막대한 금액의 투자금은 경기를 활성화시키고, 규모를 확대해 오고 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을 때도 가장 무리 없이 넘길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코로나로 선진국 대부분이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보이는 와중에도 한국은 어느 나라와도 견주기 어려운 성장을 거듭해 오고 있다.
“물론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특히 부동산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던데요.”
“맞는 말씀입니다. 부동산에 낀 거품이 한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너무 과도하게 부동산에 투자했습니다.”
윤 의원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한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은 지금 시점에서 세계 제일이다.
거품으로 유명한 홍콩이나 싱가폴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물론 거기에는 유진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유진이 투자한 돈은 기업들 사이에서 돌고 돌아 금융권으로, 그리고 다시 대출이라는 수단을 통해 부동산 시장으로 유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한국 부동산에 끼어 있는 거품은 심각한 수준이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중국의 부동산이 지닌 폭발력 이상으로 한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